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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old.greenchrist.org/99spirisym/lee-answer.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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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영성4> 중에서
먹이사슬도 살생인가?
질문과 대답(질문은 기록되지 않았슴)
답 : 먹이사슬.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지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다. 왜 문제가 되느냐 말이지요. 먹이사슬이 깨지면 사람뿐이 아니라 모두가 다 죽으니까. 먹이사슬은 우리 몸통의 피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요. 더 돌아야겠죠. 먹이사슬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깨지고 끊어지는데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먹이사슬을 깨지게 하는 인간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골치예요. 오죽하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후회하셨겠어요? 괜히 만들었다고 그렇게 보면 아주 옛날부터 인간 스스로 인간에 대해서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이 인간들이 쓴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하느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도록 그렇게 표현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그 때부터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실망하였었다는 그런 이야기지요. 그런데 문제는 넘어지지 않은 놈은 일어나서 걸어다니는 것이 얼마나 좋은 줄을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아주 하느님의 법을 어김없이 잘 지켜요. 해와 달과 별과 하물며 바닷물, 풀 한 포기까지 그렇죠? 개미까지 하느님이 처음 만들어 놓은 법칙에 따라서 틀림없이 살죠. 유독 인간만이 그걸 어긴단 말이에요. 왜 어길까? 그걸 혼자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왜 하느님의 형상을 가지고 만들어진 인간만이 먹이사슬도 끊어 버리고 자연의 법칙도 자꾸 어기는 걸까?
전 엉뚱한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굶어보지 않은 놈은 밥이 얼마나 맛있줄을 모른다는 것. 사랑이라는 것은 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죠.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가짜 사랑한테 진짜한번 속아봐야 아 이게 아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아까 제가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탕자가 집을 떠났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줄 뒤늦게 깨닫는 것이지요. 저는 이 깨달음은 인간에게만 있다고 생각해요. 개나 짐승들은 여전히 낙원에 살고 있지만 거기가 낙원인 줄을 모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실락해왔기 때문에 그래서 낙원이 어떤 것인 줄을 어렴풋이 나마 그리워하고 거기를 향해서 갈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그래 먹이 사슬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도 그게 끊어져봐야 알거든요. 그런 면에서 인간은 역시 인간이다 참 대단한 존재다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떤 카톨릭 학자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을 타락(falling)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상승을 전제한 말입니다. 인간의 품격을 상승시키는 말입니다. 상승이라는 것은 떨어진 놈만이 위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날 때 이미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앞에서의 추락은 인간의 상승이라 보는 관점도 옳다고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먹이사슬도 문제가 아니고, 먹이사슬을 끊어버리는 인간도 부분적으로는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잘 될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 질문인 병균, 이것도 마찬가지의 논리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충주에서 살 때 저희 집 변소는 재래식이었습니다. 거기 가서 용변을 보려면 쪼그리고 앉아야 되지요. 그래서 벽에 생각나는대로 써 붙여 놨었죠."'휴지 요만큼" "똥구멍은 요만한데 왜 이렇게 많이 쓰냐? 휴지 두 칸만 잘라서 써라" 그런걸 제가 그려놨었습니다. 그거 하나 써 붙여 놓고 그 옆에다가 "당신이 당신의 두발로 걸어와서 여기 쪼그리고 앉아서 오줌누고 똥누고 하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렇게 한번 해보라"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후배 목사님이 몸이 마비가 되어서 대소변을 다 받아내야 하는 사태가 되었어요. 시골에서 요양하다가 저희 집에 같이 살았는데요. 그 사모님이 변소 갔다온 다음날 "아, 목사님 맞아요. 맞아. 그 얼마나 좋은지 난 알아요" 자기 남편의 대소변을 다 받아내 보니까 두발로 걸어가서 쪼그리고 앉아서 용변보는게 그렇게 좋더라 이거지요. 그렇다면 병균도 우리에게 건강하게 산다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렇게 고생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병 이야기 하니까 생각납니다만, 장일순 선생님이 암으로 진단 받았습니다.
제가 병원을 찾아가 '투병'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정색을 하시면서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암세포는 내 세포가 아닌가? 잘 모시고 가야지." 그러시더라구요. 그리고 "지구가 지금 암을 앓고 있는데 지구 땅덩어리가 앓고 있는데 나는 '아프다'고 소리나 지르지. 나 좀 아프니까 후배들이고 뭐 사람들이 와 가지고 이렇게 여럿이 와 주는데 땅덩어리가 아프다고 누가 좀 울어 주지도 않고 땅은 신음도 하지 않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우시더라구요. 그런 식으로 자기 몸의 병을 모시고 사셨다가 암하고 같이 가셨지요. 투병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아주 생태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단어가 아닌가? 뭐하고 싸우자는 건가? 생태적인 삶이란 다 나의 몸인데 모든 것이 나의 몸인데 나의 몸하고 내가 어떻게 싸운다는 것인가? 나에게 이익을 준다고 판정되는 것들만 내 친구가 아니라 지금 당장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주는 것 같이 판단되어져도 결국 내 몸이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투병이라는 말이 차츰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병과 함께, 병을 잘 다루면서 병을 통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내가 배울 수 있는 부분을 잘 간직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걸 생각하는 것이 성숙한 사람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답: 저는 병을 잘 모신다는 것이 병하고 즐긴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약도 먹고 모든 치료를 다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병은 나 한번 이겨 봐라 하고 오는 거예요. 전 그렇다고 생각해요. 니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의 지혜를 발휘해서 나하고 한번 겨루어 보자. 그러는 동안 너 커라 이거지요. 군대 마귀가 예수님 만나서 뭐라고 합니까. 제발 나를 지옥에다가 던져 무저갱에다 집어 처넣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무저갱에다 집어 처넣으면 그놈 이제 못 나옵니다. 그러지 말아 달라는 것은 예수님한테 그럴 힘이 있다는 것이지요? 제발 나를 무저갱에다 넣지 말라 그랬을 때 예수님 안 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 저 돼지들 속에 들어가겠다 그래 그래라 아주 점잖게 살려주지 않습니까? 그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소위 악이라고 하는 것과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잘 알려주는 교훈이라
고 생각됩니다.
답 : 지난달에 공동선인가 하는 잡지에서 "오늘의 우상, 돈" 그런 제목으로 한쪽 쓰라고 해서 썼습니다. 돈은 돈이 번다든가, 돈이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하는데 그 말을 정확하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돈이 어떻게 해서 사람을 타락시킵니까? 돈한테 힘이 있다면 사람이 그 돈한테 자기의 힘을 실어 준거지요. 결국 다시 문제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체제라든가 제도 같은 것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고 쉽게 이야기들 합니다. 지난번에 어떤 모임에서 한 사람이 어떤 기관에서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말한 사람에게 그랬지요. 좀 정확하게 이야기하죠. 기관이 그런 결정을 했냐? 그렇게 했대요. 기관이 아니라 이사회나 그런데서 했겠죠. 기관이야 사람이 모여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금전만능주의라는 것도 인간이 만든 겁니다. 돈이 만든 것은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그 책임도 역시 사람에게 있습니다.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고 보는데요. 아까 제 논리대로 이야기한다면 돈 노름을 진탕 해봐야 "아휴 이게 돈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어 있다고 저는 보는 거죠. 그런 면에서 좋지 못한 현상으로 보이는 것들 모두가 우리를 돕고 있다고 볼 수 없느냐 하는 거지요. 인간 전체를 볼 때 깨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요. 자본주의가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데 -제 사견입니다만, 저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섭리를 느낍니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대안이 없는 자본주의 전체, 그것도 미국식 자본주의가 전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됐단 말이지요. 이것이 눈앞에 뻔하고 우리 나라도 이미 그 체제 안에 들어갔지요. 그래서 돈이 정말 세상의 주인 노릇 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죠. 자본주의의 잘못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자본주의를 겪지 않고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노예가 되지 않고 어떻게 노예해방이 가능하겠느냐 그겁니다.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는 낙관주의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여튼 저는 크게 봐서 다 잘될 것이라고 봅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돈, 돈이 좋다. 돈이 이 세상에서 최고다 이러는 사람도 많지요? 나 자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 자신도 그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지요? 사실은 그럴 때 어떻게 탈출할 것이냐? 그렇지 않은 삶을 어떻게 회복하고 찾을 것이냐 하는 건 우리들 각자가 자기 삶에서 치열하게 모색해야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안 그러는 데 내가 어떻게 합니까? 저 사람 자기 돈이 최고라고 살아가는데 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는 하지요. 이야기는 하지만 안 듣겠다는 걸 어떻게 합니까? "너 이거 먹으면 죽어, 임마. 농약인데 먹으면 죽어" "아, 나 죽고 봐야겠다는 데요." 할 수 없지요. 그래서 망할 놈들은 망해가게 그냥 두자 그겁니다. 정신 차린 사람들끼리 뭐합니까? 세상을 제대로 사는 사람은 '내가 그렇게 살면 세상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노아 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인류가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노아는 개인이지요. 노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보았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개인적인 차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닙니다만 깨어있는 사람이 되는 것밖에는 자본주의의 문제든, 사회주의의 문제든, 경제문제든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상태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 가는 인간들의 존재, 거기 밖에는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이현주 (목사)
댓글 '2'
최용우
그러나 '공동번역성경'은 개신교측의 반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천주교만 사용합니다.그래서 천주교에서 '하느님'을 부르게 된 것이지요.그게 원래부터 천주교 용어가 아닙니다. 기독교와 천주교가 모두 사용하자고 합의를 한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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