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출21:12-27 |
---|---|
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2.8.31 새벽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출애굽기(56) 십자가가 해답입니다 (출애굽기 21장 12-27절)
본문에는 폭행과 관련된 여러 율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율법들은 한편의 권익만 보호하지 않고 쌍방의 기본 권리를 보호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처럼 공의를 철저히 수호하면서도 사랑의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 모세 율법의 특징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기본 인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본문은 잘 알려줍니다.
‘인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기에 무엇보다 앞세워야 할 최상의 가치입니다. ‘인권’은 영어로 ‘human rights’라고 합니다. ‘right(옳은, 바른)’이란 단어가 내포한 뜻대로 인권은 가장 옳고 바른 가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인권’을 주장하면 약간 급진적인 사람처럼 인식됩니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하기에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성경은 세상의 어떤 문서보다도 ‘인권’의 가치에 깊이 주목하고 있음을 늘 기억하십시오.
또한 본문의 율법은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임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왜 율법이 필요합니까? 저절로 두면 공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공의’가 아니라 ‘힘’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내세우는 정의는 대개 강자의 이익과 편의를 대변합니다. 그처럼 돈과 힘이 있는 이들이 법을 자기들 뜻대로 적용하니까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생겼습니다. 그런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성도는 공의가 무너진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하지 말고 ‘옳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할 줄 아는 유연한 원칙주의자가 되십시오. 공의가 바로 서지 않으면 모두가 존엄을 누리며 사는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굴욕을 느끼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랑과 존중에 있습니다. 그 율법이 없으면 세상은 힘에 의해 난도질을 당하고 수많은 편견과 차별로 인해 영혼이 질식되고 결국 힘이 정의가 되는 세상이 펼쳐집니다. 사회는 가만히 놔두면 항상 그렇게 흘러가기에 말씀의 법을 통해 그 흐름을 막아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앞장서서 부강한 나라를 꿈꾸기 이전에 모두가 인간적 존엄을 누리며 사는 나라를 꿈꿔야 합니다.
< 십자가가 해답입니다 >
유대 전통에서 절기 축제에 참여하는 부잣집 소녀들은 허름한 옷을 빌려 입을 때가 많았습니다. 옷차림에서 차별이 느껴지면 축제가 진정한 축제가 될 수 없기에 가난한 집 아이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왜 사랑이 넘치는 선교 후원자들이 은밀한 후원을 즐겨합니까? “내가 돕는다!”라고 사방에 알리면 자신의 명예는 올라갈지라도 도움 받는 사람의 명예가 깎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하나님은 공평과 공의가 넘치는 따뜻한 세상을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힘써 동참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금 공평과 정의가 넘치는 세상을 이루시길 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어떻게 동참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최종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요새 뉴스를 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는 보복 테러들에 관한 소식이 심심찮게 보도됩니다. 구약성경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동태보복법을 인정하지만 사실 그 법은 보복을 장려하려고 세워진 법이 아니라 오히려 보복하면 보복 당한다는 두려움을 심어줌으로 사적인 보복을 최대한 줄이려고 세워진 법입니다. 그런 율법 정신이 신약 시대에 더욱 승화되어 나타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사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결국 십자가가 해답입니다.
힘으로 제압하고 보복으로 얻어지는 참된 평화는 없습니다. 서로의 죄를 덮어주고, 서로의 차이를 용납하고, 전체의 조화를 이루려고 조금씩 양보하는 십자가의 길이 결국 평화와 승리의 길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면 손해처럼 느껴지기에 이해득실을 따지는 상인적인 마음으로는 용서와 양보가 힘듭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장과 축복은 계산적인 상인 근성을 버리고 십자가를 질 때 가능합니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