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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주의와 싸우라!

야고보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517 추천 수 0 2012.10.08 14: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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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약1:19-2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9.2 주일 http://dabia.net/xe/609121 

jys.jpg 정용섭 목사

 

세속주의와 싸우라!

야고보서 1:19-27, 창조절 첫 주일, 2012년 9월2일

 

야고보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좀 유별납니다. 복음의 정체성이 약해보입니다. 복음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로움과 구원입니다. 야고보서에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의 편지들과 비교해보면 이 차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그게 복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반대로 말합니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 칭의론을 거부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야고보서는 처음부터 유대교를 암시하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한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유대교적인 특징이 강하고 복음의 정체성이 약하기 때문에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를 정경으로 결정한 397년의 종교회의는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복음이 율법을 지양(Aufhebung)하거나 때로는 충돌한다고 하더라도 율법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도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복음은 율법을 부정해서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배의 형식은 율법적인 겁니다. 헌금도 율법적인 겁니다. 원초적 복음에만 충실하겠다면 예배도 필요 없고 헌금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범주 안에서 복음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등장하면서 유대교와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했지만 훗날 그들도 구약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 보면 유대교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게 분명합니다. 둘째, 야고보서는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지적하고 계몽하기 위한 편지입니다. 약 4:1 이하를 보면 야고보 공동체는 교인들끼리 크게 싸웠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약 4:11 이하를 보면 그들은 서로 비난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약점들을 그대로 보이는 교회를 향해서 똑바로 살라고 충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전제한다면 야고보서는 성경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야고보서의 핵심 주제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게 그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야고보서 전체는 이 구절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야고보에 의하면 참된 신앙은 행동하는 것이며,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거짓 신앙은 행동이 없이 말에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겠습니다. 본문 19-27절은 논리적으로 기록한 글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권면들이 반복적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도 본문을 차례대로 따라가면서 설명하겠습니다.

 

19절에 따르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를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속히 할 것과 더디 할 것을 구분합니다. 목사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 보면 할 말 못할 말 구분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겉으로 크게 성을 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속으로 짜증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다 성을 내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20절에서 성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저도 성이 날 때가 많을 걸 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 게 분명합니다. 성을 내지 않는 문제는 단순히 교양의 차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더 근본적인 차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즘 힐링이나 멘토링이라는 말들이 유행합니다. 그게 마치 시대정신인 것처럼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극한 경쟁 구조에서 살기 때문에 치료받아야 할 상처가 그렇게 많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만나서 가볍게 웃고 즐기다 보면, 그리고 살아가는 방법을 처방받다 보면 상처가 치유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입니다. 그런 것마저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만 힐링 캠프와 멘토링 컨퍼런스를 통해서도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술 취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정도의 도움을 줄 뿐입니다. 야고보 선생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21절에서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2절에서 야고보는 말씀을 받기만 하면 곤란하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읽기만 하거나 필사만 하는 것은 아무리 열정적으로 수행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이지 경건의 능력은 없다는 뜻입니다. 정확한 진단입니다. 오늘 한국 개신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종교적인 포즈는 세련되지만 삶의 능력은 없습니다. 자주 모이고, 기도에 열심이고, 해외선교에 열정적이고, 교회당 건축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지만 사회 변혁의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경제정의 문제, 남북분단 문제, 노동과 생태 문제 등에서는 무능력합니다.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를 사모하라고 말을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몸집을 키우는 데만 열심을 냅니다. 위선적입니다. 이것을 야보고는 자기를 속이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속이는 믿음, 헛된 믿음을 야고보는 당시의 속담으로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잊어버리거니와...” 당시의 거울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으로는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없습니다. 귀족들이 쓰는 거울은 그래도 좀 나았을지 모르지만 일반 사람들이 쓰는 거울은 형제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의 거울로는 자기 얼굴을 봐도 곧 잊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거울이 너무 좋아서 문제이긴 합니다. 심지어 스마튼 폰은 사진처럼 자기 얼굴을 반사시켜줍니다. 이런 현대 문화에 빠져사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호수에 비춘 자기 얼굴에 매료되어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헬라신화의 나르시시즘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고대인들의 거울은 아주 거칠어서 자기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 없게 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그와 같다는 겁니다. 말씀과 삶이 완전히 분리된 상황입니다. 우리가 실제 삶을 어떻게 사는지 조금만 정직하게 살펴보면 야고보 선생의 말씀이 틀렸다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이런 신앙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헛된 것이며,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는 26절에서 앞에서 언급한 잘못된 신앙을 보충해서 설명합니다.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즉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혀의 재갈’을 물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경건은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혀의 재갈을 물린다는 것은 ‘말하기를 더디 하라’는 19절의 말씀이고, 자기 마음을 속인다는 것은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한다는 22절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야보고의 주장은 과격합니다. 당신들 그렇게 믿음생활 하면 다 헛 거야, 하고 나무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런 말을 듣는 청중이나 독자들은 양심이 찔리기도 하고, 반발심이 나오기도 했을 겁니다. 예수 믿으려면 고상한 도덕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야고보가 그런 의미로 이 편지를 쓴 게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 자체로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지금 그는 기독교 영성의 중심을 말하는 중입니다. 예수 믿네, 하고 큰소리를 치지만 실제로는 영성이 없는 사람들을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 중입니다. 영성이 없는 그들은 남을 비난하고, 자기 성찰은 전혀 없고, 말씀의 허세만 부립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거들먹거립니다. 이들을 향해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세속주의와의 투쟁

야고보는 참된 믿음과 경건을, 즉 건강하고 생명 지향적인 기독교 영성을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인 27절에서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라.” 건강한 기독교 영성을 알고 싶으면 이 구절에 자신을 비쳐보면 됩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교의 전통입니다. 율법에도 자주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성서시대에는 생존이 가장 취약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들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전제한다면 그들을 돌보는 것은 분명히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오늘날 성서가 말하는 고아와 과부는 반드시 그런 이들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더 확장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고아와 과부가 누군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이들이 누군지를 보십시오. 오늘 한국교회는 사회윤리적인 차원을 회복해야 합니다. 개인윤리는 나름으로 강조되지만 사회윤리는 관심 밖입니다. 부의 대물림, 가난의 대물림을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야고보가 말하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둘째, 야고보는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세속주의와의 싸움을 가리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세속이 무엇일까요? 저 사람은 세속적이야, 하는 말들을 합니다. 이기적이거나 천박하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합니다. 세속, 또는 세속주의는 그렇게 부정적인 뜻만은 아닙니다. 세속적이라는 말은 종교적이라는 말과 대비됩니다. 세속이 없으면 종교도 없습니다. 세속을 세상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세상은 수도원이 아닙니다. 세상의 원리가 따로 있습니다. 적자생존의 원리가 작동됩니다. 여기에는 경쟁, 쾌락, 소유, 폭력, 또는 인기, 연예, 돈벌이 등등의 단어들이 연상됩니다. 그게 인간 삶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수도승이 아니라 일반 사람으로 사는 한 기독교인 역시 세속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야고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속을 떠나라고 말하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경험하다시피 이게 쉽지 않습니다. 세속주의는 강압적입니다.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나름으로 성취감도 줍니다. 우리의 세상은 그런 메커니즘으로 돌아갑니다.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들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도 이런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그런 세속을 떠날 수는 없지만 물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은혜 한번 받아서 해결된다면, 성령 충만으로 단번에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순간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세속주의와 투쟁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구도적입니다. 투쟁은 곧 구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교양을 쌓는 방식도 아닙니다. 야고보가 명시적으로는 언급하지 않지만,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구도적인 태도로 천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바로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이자 증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들어간 깊이만큼 여러분은 세속주의에 물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싸움의 과정이 기독교인의 한평생 삶입니다. 우리는 지금 함께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삶의 영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다면 성령께서 도우셔서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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