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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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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2005-05-22 http://www.nosuchjesus.com/ |
주기도문(7)-자동응답기를 달아 놓으신 하나님
마태복음 강해 7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9)
하느님 이 번에도 저를 버리십니까?
신자와 불신자가 확실히 다른 점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가 안 믿는가인가? 아니다. 불신자들도 하나님이 계심을 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모든 인간의 속에 심겨져 있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 수 있어 핑계치 못한다.(롬1:18,19) 아무리 완악한 불신자라도 그랜드 케년에 가 보면 너무나 웅장한 그 모습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조물주는 있는 것 같다는 실토가 저절로 나온다.
그럼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한 후 손을 놓고 있다고 생각하면 불신자이고, 계속해서 생사 화복을 다스리고 있다고 믿으면 신자인가? 이것도 아니다. 불신자도 자기가 생각해도 큰 죄다 싶은 잘못을 범하면 “이러다 천벌을 받지”라고 스스로 두려워 한다. 또 남이 그러면 “하늘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해”라고 충고한다. 아주 특별한 행운을 만났거나 자기 계획과 노력 이상으로 일이 술술 잘 풀릴 때는 “하늘이 나를 도와주나 봐”라고 한다. 이런 것들이 무심결에 하는 말이 아니다. 간섭, 섭리, 은총 같은 종교적인 용어를 모른다 뿐이지 인간 만사를 주장하는 눈에 안 보이는 신비한 힘이 있고 이 땅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다른 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신자들도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한국에서 아주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L 의원이 자서전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2002년 4월 17일.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을 중도 포기한 후 아산 현충사로 가면서 “하느님, 이번에도 저를 버리십니까!”라고 달리는 차 안에서 밖에까지 들릴 만큼 절규했다. 비록 하나님의 호칭이 하느님으로 둔갑했지만, 자기로선 최선을 다했지만 어떤 절대자가 방해했거나 그 분의 비위를 거스린 것이 아닌가 염려해 앞으로는 제발 자기를 도와 달라는 애절한 하소연이었다. 그것은 기도다. 아침마다 정한수 떠놓고 비나이다 까지는 않더라도 불신자들도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어떤 형태로든 신을 찾고 간구한다. 기도하는 것만으로 신자 불신자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예수를 믿으면 신자인가? 표면적으로는 물론 그렇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예수를 스스로 잘 믿는다고 믿고 있는 오래 된 신자 가운데도 성령으로 거듭났느냐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가 많다. 지금 당장 죽어 천국 갈 자신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장로도 심지어 목사도 주저하며 즉답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 또 ‘예’라고 대답한 자들조차 천국 갈 수 있는 근거와 이유를 물으면 잘 설명하지 못한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삼았는지에 관해선 오직 본인과 하나님만이 알 수 있지 객관적으로 검증할 기준과 재간이 없다.
대화하시는 하나님
신자와 불신자의 경계선을 분명히 그을 수 있는 잣대는 따로 있다. 지금 주 기도문을 배우고 있는데 특별히 기도라는 측면에서 신앙과 불신앙을 분명하게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있다. 신자의 기도와 불신자의 간구는 겉 모습은 같을지 몰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신자란 기도할 때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지금 내 곁에서 내 기도를 분명히 듣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응답으로 기도자가 확실히 알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과 통로로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자가 신자다. 그런 인식이 전혀 없고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불신자다.
모든 종교인들과 불신자들이 절대자 하나님은 종교마다 그 이름만 다르지 오직 한 분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며 기도하고 섬기고 바친다. 기도로 따지면 이슬람 교도만큼 많이 하는 자들도 없다. 문제는 그들은 자기들의 절대자에게 온갖 미사여구로 아뢸 줄은 알아도 하나님 당신이 기도자에게 계시해 주는 말씀을 들을 줄 모른다. 창조주로서 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과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일대일로 개인적인 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자가 신자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불신자다.
그럼 대화(對話)는 어떤 것인가? 일대일로 서로 말을 주고 받는 것이다. 간혹 여러 명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해도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따로 구분되어 있어서 서로 간에 의사 소통이 분명히 이뤄지면 대화다. 그러나 상대가 듣던 말든, 알아 먹든 말든, 관심을 갖든 말든,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은 잔소리, 주문, 타령, 헛소리, 독백 이다. 또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인데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향해 말하거나,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상대와 말을 주고 받는 것은 연설, 선전, 광고, 발표, 포고이지 대화는 아니다. 대화가 되려면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그 표정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니까 인간에게 말씀하는 것 정도야 충분히 하실 수 있겠지 하고 인정하는 정도로 그쳐선 안 된다. 그 단계로는 아직까지 신자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고, 들을 줄 알고, 듣고 있으며, 또 항상 듣고 싶은 열망에 사로 잡혀 있는 자라야 신자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결코 신비하거나, 이상 야릇한 현상이 아니다. 기껏 피조물인 주제에 주제넘게 절대자와 맞서보려는 억지, 무모함, 교만과도 거리가 멀다. 달라스 윌라드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책에서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빼고 인간 존재를 생각하는 것이 더 주제넘고 위험한 일이 아닌가?”라고 했다. 쉽게 말해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듣지 않고선 제대로 참 인간답게 살 수 없다. 인간이 우연에 우연이 겹치어 진화된 존재라면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개념조차 없어야 한다. 그러나 지구상의 어떠한 미개 민족이라도 비록 초보적인 모습일지라도 절대자에 대한 근본 인식은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보면 흔히 작가의 혼이 베여 있다고 평하고 또 그 작가가 반드시 친필로 자기 작품임을 증명하는 싸인을 한다. 말하지 못하는 물질로 만든 것조차 그러한데 하물며 고귀하고 신령한 생명체인 인간에게 그 만드신 분이 친필 싸인을 해 놓지 않았다고 고집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모든 인간에게는 만드신 분의 친필 싸인-하나님의 영이 내재되어 있다.
특별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니라”고 하시면서 모든 신자의 이름을 그 분의 손 바닥에 아로 새겨 놓았고 하늘의 생명책에 올려 놓았다. 그 분은 우리 모두를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알고 계신다.
그래서 신자가 기도하러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 꿇을 때에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아버지’ 앞에 나온다는 확실한 느낌과 생각을 가져야 한다. “아버지! 접니다. 저 누구누구 아시지요? 다름이 아니고….”라는 독백이 진심으로 속에서 절로 우러 나오면서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또 하나님이 정말 아버지 같은 인자하고 따스한 미소를 띄우고 나의 말을 들으려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향해 무릎을 끌어 당긴다는 이미지가 자동적으로 연상되어야 한다. 기도 드리려고 엎드리자마자 마치 따발총 쏘듯이 자기 할 말만 쏟아 놓아선 안 된다.
비나이다 타령
서로 말을 주고 받는다고 해서 다 대화가 아니다. 부부 싸움, 학술적 토론, 정치적 논쟁을 두고 대화라고 하지 않는다.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서로 간의 간격을 좁혀 가는 과정이라야 대화다. 자기 뜻을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주입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명령과 복종의 관계다. 서로 다른 생각과 계획을 갖고 있더라도 대화를 통해 공통분모를 찾아 서로 간의 수정과 보완의 절차를 거쳐 두 의견 중에 하나를 결정하든지, 절충하여 쌍방이 만족하는 제 삼의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대화다.
불신자도 기도는 한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비나이다 비나이다만 외칠 뿐이다. 절대자의 대답을 듣지 않는다. 들을 수 있다고 생각 못하기 때문에 아예 들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의 일방적인 소원이 응답될 때까지 한정 없이 빌기만 한다. 빌다 못해 오직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한 일념으로 탑을 3천번 돌고 절도 만번 한다. 발이 부르트고 무릎이 까져 피가 나도록 한다. 마치 하루 종일 대답 없는 자기들 신을 부르다 못해 자기 몸을 칼과 창으로 찔러 피를 흘리고 광란의 춤을 추는 갈멜산의 바알 선지자들과 다를 바 하나 없다. 그러다 도저히 지치면 중도 포기하는 수 밖에 없다.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자의 기도에는 간구자의 계획과 욕심만 있지 절대자의 뜻은 없다. 또 절대자의 의도가 전혀 반영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 빌어도 된다. 욕심이 지나쳐도 되고, 선(善)과는 거리가 멀어도 되며 심지어 나쁜 것을 구해도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아들만 낳게 해 주시면 시댁식구로부터 구박만 받고 천덕구러기 같은 저 딸은 가뜩이나 살기 힘든데 고아원에 갖다 버려도 좋습니다”, “사업만 흥하게 해주시면 동업자 몫을 속이거나 헤어지는 정도는 눈 깜짝 안하고 해 치울 수 있습니다”는 식이다.
그들에게 신은 오직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는 로보트다. 겉으로는 손을 싹싹 빌고 허리를 굽힐 대로 굽혀 절하지만 속으로는 인간이 신에게 명령하고 신은 인간에게 복종한다.
야고보 사도가 신자들에게조차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 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약4:2,3) 신자가 불신자와 다른 점은 일방적으로 자기 욕심과 계획을 이루려고만 기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나님과 대화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계획을 수정할 용의가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기도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
예수님이 본문에서 신자가 하나님에게 바칠 것이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우리 아버지여 …을 받으시오며” 라고 했으니 무엇인가 드려야 한다. ‘거룩히 여김’을 드려라고 했다. 값 비싸고 귀한 물건이나 신자의 선한 행위가 아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믿음과 중심만 바치면 되지 특별히 따로 바칠 것이 없다.
구태여 정성과 치성과 열심도 바칠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바치지 말라는 뜻은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것이다.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받는 자가 신자다. 하나님의 신자를 향하신 생각과 계획을 신자가 알아 듣도록 분명히 보이고 들리도록 밝혀 드러내어 주신다. 그래서 신자가 그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온전히 믿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기도다. .
그렇다고 해서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우뢰 같은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총천연색 영화처럼 환상으로 보이는 어떤 특별하고 신비한 방법으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는 자라면 기도 중에 미세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상 생활 중에도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방법으로 신자에게 보여 주신다. 성경 말씀이나, 마음 속의 확신이나, 되어져 가는 환경이나, 주위에 일어나는 사건이나, 매일 만나는 평범한 사람을 통해 말씀하신다. 신자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도록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신령한 자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은 야고보 사도의 지적대로 자기 정욕으로 쓰려고 구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불신자처럼 일방적으로 기도만 해 놓고 하나님의 대답을 들으려 한 적이 없고 나아가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기껏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이번에 이 일만은 꼭 해 주셔야 합니다. 안 해 주시면 말 많고 재미 없는 구역예배뿐 아니라 교회 출석하는 것도 재고해 보겠습니다” 이다.
기도하는 자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자는 기도한 후에 전개되는 일을 통해서 반드시 들을 수 있다. 평소 때에 항상 기도하고 매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는 것이 이상하다. 텔레비 난시청 지역에서 방송을 보려면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안테나를 방송국 송출 타워에 주파수 방향을 제대로 맞추는 것과 약하게나마 수신된 전파를 더 크게 들리도록 증폭기를 다는 것이다. 안테나는 무엇인가? 기도다.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맞추고 그 신호를 포착하려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안테나가 서 있으면 그 전파가 잡힐 리가 만무하다. 증폭기는 무엇인가? 성경 말씀이다. 기도를 통해 들린 미세한 성령의 음성을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님의 복음에 맞춰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분간시켜 준다.
기도만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완전하게 다 들을 수 없다. 기도 중에도 분명하게 들릴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듣기 위한 준비다. 들은 것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작업은 성경을 읽으면서 따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이 둘은 신자의 신앙 생활의 두 기둥 역할을 한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 보지 않고도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다고 기대하는 것이 너무나 어리석지 않은가?
거기다 요즈음 세태가 돌아가는 꼴을 보라. 이 세상은 어디 가나 난시청 지역으로 바뀐 지 오래다. 하나님 말씀이 갈수록 기갈이 들고 있다. 신자라면 기도와 말씀 없이는 정말 참 신자답게 제대로 살아 갈 수 조차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참 신자가 아니거나 세상에서 가장 신경이 무딘 사람 둘 중 하나다.
자동 응답기를 달아 놓으신 하나님
미국은 자동차의 뒷 범프에 재치 있는 글이 쓰여진 스티커를 많이 부치고 다닌다. 어떤 스티커에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제발 집에 전화 좀 하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주기도문에 따르면 하나님은 성도의 아버지며 그 자녀들은 수시로 아버지가 계시는 집으로 전화해야 한다. 자녀들의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반드시 대답하기 마련이다.
기도란 하나님께 전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혹시 자동 응답기를 달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진 적은 없는가? “지금 하나님은 출타 중이오니 용건이 계신 분은 메세지를 남겨 주시면 돌아오는 즉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러다 아무리 전화해도 녹음된 목소리만 나오니까 나중에는 아예 전화 코드마저 빼놓으신 것은 아닐까라고 의심하지 않았는가?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널리 인정 받는 사역자 중의 한 사람으로 피터 마샬이란 분이 있었다. 미국 상원의 기도 담당 목사라는 직책을 맡았던 분인데 그가 젊었을 때 영국에서 겪었던 일이다. 노섬벌랜드라는 황무지를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지름길로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무턱대고 걷고 있는 데 “피터”라고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원체 캄캄해서 안 보이니까 주위에다 대고 “누구냐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몇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더 큰 목소리로 아주 다급하게 “피터”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깜짝 놀라 그만 넘어져 무릎이 땅에 닿고 말았는데 손이 닿아야 할 지점에 아무 것도 잡혀지지 않았다. 그곳은 채석장으로 써다 버려진 골짜기 낭떠러지의 바로 끝이었다.
이런 일이 믿어지지 않는가? 이런 식의 간증이라면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나눌 만큼 수도 없이 많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 보자. 아주 신실한 신자로 알려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장마철에 하루는 기차로 국내 시찰을 하던 중이었다. 밤 안개가 자욱한데다 비까지 휘날리는 밤중이었다. 기관사가 전방을 바라 보니 뿌연 안개 속에 어떤 사람이 자꾸 두 손을 벌리고 서 있지 않은가? 비켜라고 경적을 몇 번이나 울려도 꼼짝도 않고 오히려 팔을 자꾸 더 흔들어 대고 있었다. 급 브레이크를 밟고 내려서 철 길을 살펴 보았더니 아무도 없었고 대신에 바로 앞에 철교가 홍수로 떠내려 가고 없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다 허깨비나 천사를 보았나 생각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커다란 파리 한 마리가 기차 앞 유리창에 달라 붙어 죽어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던 발람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당나귀가 말을 하게 해서까지 그 음성을 듣게 하셨다.(민22장)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당나귀, 파리를 움직여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고 신자가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보이신다. 이 세상 전부가 자신이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이 쓰지 못할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없다. 당신의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선 무엇이든 언제든지 동원하실 수 있다.
이런 예화를 들으면 신자들은 항상 그 신비한 능력과 문제가 말끔히 해결 된 결과에만 관심을 쏳는다. 이 두 가지 예화에서 우리가 정작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살펴야 할 하나님의 은혜는 따로 있다. 신자들은 주로 언제 기도하는가? 위급한 상황이 생겨야 하나님에게 911 비상 전화하듯이 한다. 이 두 경우는 신자가 하나님에게 비상 전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에게 비상 전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마샬이나 빅토리아 여왕 같은 경건한 자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 쪽에서 911 긴급 전화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그것도 그 자녀들이 제대로 잘 알아 듣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 당신이 먼저 가셔서 악한 세력을 초토화 시킨 후에 신자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 일은 도저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하나님이 자동 응답기를 달거나 전화 코드를 빼 놓은 것이 아니다. 신자가 자동 응답기를 설치해 놓았다. “지금은 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 출타 중이오니 메세지를 남겨 주십시요.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전화 하셨다면 자꾸 전화 거는 번거로움을 피해서 하나님이 미리 알아서 다 해 주세요.”
그런데 이 정도만 되어도 상당한 수준의 믿음이다. 하나님이 먼저 전화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말이다. 대부분의 신자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스스로 전화 하실 수 있다는 인식조차 없다. 하나님과 통하는 전화는 아예 코드를 뽑아 놓은 지 오래다. 어쩌다 한 번 긴급 사태가 발생해야 다시 코드를 꼽는다. 그런데 사용한지가 하도 오래 되어 어떻게 전화 하는지도 잊었고 밧데리 충전도 안 되어 있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한창이었던 냉전 시대에 큐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다. 소련이 미국의 턱 밑에 위치한 큐바에다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고 위장 화물선에 미사일을 잔뜩 싣고 가다 미국에 들킨 것이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초강경수로 대응했다.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소련과 3차 대전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외의 사태에 놀란 후루시쵸프 소련 수상이 양보하여 배를 철수 시키는 바람에 전 세계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벗어났다. 그 이후 소련과 미국은 두 정상이 직통으로 통하는 전용전화(Hot Line)를 백악관과 크레믈린에 각각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냉전이 한창인데도 혹시라도 의사소통에 착오가 생겨 불의의 사태를 막겠다는 의도였다.
기도는 성도와 하나님의 긴급직통 전화다. 이 사람 저 사람 아무나 사용하는 공중 전화(Public Phone)가 아니다. 우주의 근원 되시며 그 심장부에 좌정하고 계시는 하나님에게 빛 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개별적으로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미소간의 직통전화가 쌍방 전화이듯이 하나님도 우리에게 긴급한 메시지를 전해 온다.
백악관과 크레믈린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그 직통전화를 시험 점검한다. 의사소통이 잘못되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혹시라도 선로에 고장 나 불통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다. 신자가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과 전용 선로를 점검하지 않으면 그 전선에 녹이 쓸고 굽어져 불통되는 사태가 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적대관계인 그들도 아침 저녁으로 대화를 나눴는데 하나님이 911로 경고해 주시고, 구하는 것을 들어 주시고, 잘못 구하면 지혜로 깨우쳐 주시겠다는 데도 전화 코드를 빼놓으면 도대체 어쩌겠다는 배짱인가? 주는 복도 차버리겠다는 배짱인가?
당신은 참 신자인가?
신자가 하나님을 거룩히 여겨야 할 까닭이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과 은혜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 분이 신자에게 축복과 은혜를 부어주시기 위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의 믿음 뿐이지 다른 어떤 것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다. 나아가 그 분이 우리가 찾기도 전에 거룩하고 빛과 생명력이 넘치는 권능의 말씀을 때때로 들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자가 기도하지 않는 까닭은 복 받기 싫어서가 아니다. 다른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싫어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싫다는 것이다. 아니면 아직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줄 몰라서다. 즉 지난 신앙 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기도해서 응답 받아 본 횟수에 비해 응답되지 않은 것이 더 많기 때문에 기도해 봐야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계획과 생각대로 살 수 밖에 없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죄만 짓지 않고 스스로 깨우치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가르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까 평생을 도 닦으며 지낼 수밖에 없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나님 당신이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 아래 눌려 있는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내려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까닭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그 분과 원수 되었을 때에 먼저 찾아 오셨다. 절대자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일 성수 꼬박꼬박 잘 지키는 것만으로 신자가 되었다고 함부로 자신해선 안 된다. 예배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음성이 설교로만 들리는 것은 아니다. 찬송 중에, 기도하는 중에, 심지어 헌금하는 중에 아니면 주는 것 하나 없이 꼴 보기 싫은 다른 성도들을 통해서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여러분이 정말 신자인가 아닌가 다시 점검해 보자.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불신자도 그렇다. 하나님이 생사화복을 주관함을 아는가? 불신자도 인정한다. 예수를 믿는가?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하나님과 당신만의 비밀이다. 주기도문을 외우는가? 아이큐 세 자리만 되면 한 두시간 안에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알아듣도록 분명하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 지금 이 시간에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는가? 그 음성이 나를 위로하고 힘 주시고 지혜로 깨우쳐 주시고 믿음으로 승리케 하시는 참 된 축복과 은혜의 말씀이었음을 기억하는가? 세상의 어떤 달콤한 위로보다 더 나를 든든하게 일으켜 세울 수 있음을 확신하는가? 그래서 그 말씀을 듣기를 소원하고 지금도 듣고 있는가? 하나님과 직통 전용 전화가 가설 되어 있는가? 그 전화를 수시로 점검하는가? 응급처치가 필요할 때만 전화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심심찮게 하나님 쪽에서 먼저 걸려온 전화를 받아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 곁에서 구체적으로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고 계신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 기도 응답으로 생각하지 말라. 도깨비 방망이 뚝딱하듯이 환난이 끝나는 것만 기다리다 보면 기도에 힘이 없어지고 간구자는 이내 지쳐 떨어진다. 여러분의 지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실감할 수 있지 않는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해 보라. 또 다시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비책을 가르쳐 주리라 너무 기대하지 말라. 그런 일은 아주 드물다. 대신에 하나님은 신자가 어떤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지혜, 위로, 소망, 인내, 용기, 담력, 믿음으로 풍성하게 채워 주신다. 나아가 먼 장래의 크고도 신비한 비전을 보여 주신다. 그것이 참된 은혜이자 실질적인 기도의 응답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면 매일 매일을 기적 같은 인도와 보호하심으로 채워 넉넉히 승리하고도 남는다.
지금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통하는 여러분의 전화기에 가설해 놓은 자동 응답기를 제거하라. 직통 전화(Hot Line)를 개설하고 아침 저녁으로 점검해 보라. 여러분의 인생이 당장 달라질 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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