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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16: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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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호 목사 |
참고 : | 2012.2.5 http://www.godswill.or.kr/index.php?mid=media_1&page=4&document_srl=552 |
은혜와 상처.
시 116:12-14.
요즘은 가끔 집에 아내와 저 둘만 있을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만성신부전증이 오셔서 매주 두 번 정도 혈액투석을 받으시는데 연세가 많으셔서 집에서 다니시기가 어려워 주중에는 병원에 계시고 주말에 집에 오시고 아이들도 둘은 출가하였고 남은 하나도 방송국 드라마 조감독 노릇을 하느라 거의 집에 잘 못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저녁 아내와 둘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조금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 아들이 유학가기 전 한 일 년 반 정도는 네 세대 여덟 식구가 딩굴던 집이었는데 덜렁 아내와 둘만 집에 있게 되니 그런 마음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은퇴를 한 후 진짜 노인이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이 계속 들면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은퇴와 노후를 위한 준비에 대한 글을 하나 써서 페이스 북에 올렸습니다. 노후와 은퇴 준비를 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안정과 친구를 사귀는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보통의 경우는 은퇴를 위하여 경제적인 준비를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저도 은퇴를 위하여 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목회자의 경우, 그것도 저처럼 제법 큰 교회의 목사인 경우 최고의 노후대책은 교회의 원로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일은 물론 아니나 많은 경우 원로목사에 대한 대우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까지도 지탄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을 반대하고 연금으로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 교단의 연금이 잘 되어 있어서 내 경우는 은퇴 한 후 큰 문제가 없다는 내용도 올렸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글에서 강조하려고 하였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인 준비가 되었다고 완벽한 은퇴 준비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남보다 더 부자로 살기위해 무조건 경쟁만 하다보면 친구보다는 적을 더 많이 만들게 되는데 그런 식으로 살다가 은퇴하게 되면 아무리 경제적인 안정이 된다고 하여도 외로워서 불행해 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부자와 재벌들이 그 많은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지 못하고 요즘은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며 사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늘그막에 제일 좋은 친구는 자식과 손주들이니 늘그막에 자식과 친구하고 손주들과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하여 지금부터 신경을 쓰고 아이들에게 잘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글에 댓글이 140개가 넘게 달렸습니다. 보통 개인의 글에 댓글이 100개 넘어 달리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댓글이 140개를 넘어선 것입니다. 보통 때는 그렇게 많은 댓글이 달려도 대개 찬성하고 좋아한다는 내용의 댓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댓글이 그 글의 핵심이고 중심인 ‘친구’에 집중되지 않고 ‘연금’에 집중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랑하듯 연금이 든든하여 은퇴 후가 문제없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농촌의 가난한 목사와 개척교회 목사들의 심정이 어떻겠냐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루를 사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는 사람들에게 이 글은 더 숨이 차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대개 이런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어떤 흥분한 분은 ‘자랑 질이나 하는 목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의 조금은 흥분되고 과열된 것처럼 보이는 댓글들을 보며 옳고 그른 것을 떠나 많은 목회자들의 아픔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프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 글을 읽으며 정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조심성이 없었구나 하는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다음에 이런 글을 쓴다면 연금과 은퇴준비 이야기를 안 써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하니 그러면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같이 원로목사가 되어 나름 작지 않은 보장을 받을 수 있는 목사가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여 연금으로 만족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나름 영향력을 끼쳐 상식을 벗어난 원로목사 대우의 폐해가 조금은 줄어 들터인데 그런 이야기를 숨기게 되면 그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목사가 무슨 믿음 없이 세상 사람들처럼 연금을 들고 노후 준비를 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름 자극을 주어 적절하고도 상식적인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게 하는 일까지 줄어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자니 은퇴 준비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상처를 받고, 그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어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더 좋은데, 그렇게 되면 가난한 목회자들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인 원로대우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분들까지 편해져서 문제가 생길 터인데 그 이야기를 해서 비상식적인 대우를 받는 목회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것을 포기하고 그냥 가난한 목회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이 옳은가 하는 고민이 제게 있었습니다.
결론은 이런 식의 부작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연금을 통한 상식적인 목회자의 은퇴 준비와 노후 준비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앞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은 글을 써야 할 때는 또 그렇게 쓸 작정입니다. ‘은퇴 준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목회자들 앞에서 철딱서니 없이 자랑 질이나 하는 목사’라는 오해와 비난을 받아도 그렇게 쓸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댓글 중에 개척교회를 하신다는 어느 목사님의 글이 제 마음에는 들었습니다. <저는 개척교회 목사여서 내년 생계도 준비가 안 되어 있지만, 저희 같은 대부분 작은 교회 목사들에게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니 태도를 배우면 되고, 대형교회의 상왕 형 목사님들에게는 충격과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똑같이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자신의 표현대로 노후는 고사하고 당장 내년 생계도 보장되어 있지 있는 상황에 있는 목회자인데도 어떤 사람은 상처를 받고 또 어떤 사람은 상처를 받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그 글을 읽으면서 많이 해 보았습니다. 도리어 그 목사님은 제가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 고맙다면서 칭찬까지 해 주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교회의 목사가 죽을 때까지 평생 먹을 것을 쌓아둔 팔자 좋은 목사를 칭찬하고 두둔 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목사님의 페이스 북엘 들어가 보니 이제 40대 초반의 목사님이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이 참 건강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두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상처 받았다’는 말을 참 자주 합니다. 사람들이 '상처 받았다'는 말을 자주 쓰는 까닭은 말 그대로 상처를 자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상처를 자주 받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상처를 자주 받게 되는 까닭은 세상에 상처를 주는 말과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주니까 상처를 받는 것이지요. 당연하게. 의식적으로도 상처를 주고 무의식적으로도 상처를 줍니다.
그럼으로 말과 행동을 할 때 이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야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저의 글에 비판적인 댓글을 다신 분들의 이야기 대부분이 표현을 강하게 하셨든 부드럽게 하셨든 이 말을 저에게 해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정말로 옳으신 말씀이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상처를 주는 사람과 말에도 불구하고 별로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조금 상처를 받는 듯 싶다 가도 히쭉 한번 웃고 툭툭 털어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그 젊은 목사님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바보가 되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분석해 보면 이유가 있습니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많은데 그런 사람은 좀처럼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상처보다 더 좋은 것은 평시에 더 많이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은혜와 사랑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세상엔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못지않게 은혜와 사랑도 많습니다. 은혜와 사랑은 부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와 사랑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주어집니다.
옛 말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을 대표적으로 잘 설명한 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은혜를 물에 흘려보내어 쌓이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받아도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원수와 그 원수가 준 상처는 돌에 새겨 잊지 않습니다. 상처를 쌓아 두면 그 상처가 너무 아파서 원수가 아닌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삶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오는 말에도 상처 받고 가는 말에도 상처를 받는 사람이 됩니다.
저도 자주 말씀 드리지만 제법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저에게는 가난의 상처가 별로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자라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은혜를 많이 입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자 친척들로부터도 정말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난하다고 업신여김 받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교회와 친척들에게서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가난의 상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나보다 부자라는 것 때문에, 내게는 없는 것을 그가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별로 상처 받지 않았습니다. 잘 믿어 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제가 받은 최고의 복중에 하나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사람들에게 정말 상처를 받는 일들이 있곤 했는데 그런 일에도 뜻밖에 제가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가정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내와의 사이가 좋았고 아이들과의 사이가 좋았습니다. 때로 목회를 하다가 정말 죽을 것만 같은 어려움을 당하곤 하였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당할 때는 그런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직접적으로 제게 준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이 힘들었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못 견딜 만큼 밉지 않았습니다. 저도 잘 이해가 안 가리만큼 말입니다. 그것도 제 복입니다. 큰 복입니다. 저는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이 밉지 않습니다. 저를 제법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제가 기껏 하는 말과 생각은 ‘사람이 그렇지 뭐’ 그 정도입니다.
저는 상투적인 말처럼 들리실는지 모르겠으나 상처보다는 사랑과 은혜를 더 잘 기억하고 보존하는 스타일 같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저는 사랑하는 여러분들도 그 복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압니다. 정말 압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느낄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가슴이 뜨거울 때면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상처 안 받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감사하게도 어려서부터 말씀에 은혜를 받을 줄 알았습니다. 어려서 노래를 곧잘 불렀습니다. 그래서 예배 중에 특송을 할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인데도 좋은 소리가 나는 때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받았을 때였습니다. 설교에 은혜를 받으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면 소리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늘 특송 부탁을 받으면 설교 후에 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감동 잘 받고 은혜 잘 받는 은사 같은 것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은사라면 저는 최고의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으실 줄 아는 사람 되기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노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쌓아 둘 줄 아는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누릴 줄 아는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와 상처는 동시에 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있는 한 어떤 상처도 내게 상처가 될 수 없습니다. 똑 같은 상처도 은혜가 충만할 때와 그렇지 못할 때가 다릅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상처는 나에게 상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작고 가벼운 상처도 은혜가 없을 때는 큰 상처로 내게 다가오고 남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를 묵상하며 살았는데 우리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수할까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은혜를 묵상하지 않고 상처를 묵상합니다. 상처를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상처를 주는 사람만 원망하고 탓을 하고 있으니 삶이 중환자실 감이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병균에도 취약하여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와 사랑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와 사랑으로 상처 주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 살면서도 상처 받지 않고 은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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