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만물의 복종에 대해

히브리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202 추천 수 0 2012.11.04 22:57:16
.........
성경본문 : 히2:5-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10.7 주일설교 http://dabia.net/xe/614872/ 

jys.jpg 정용섭 목사

 

만물의 복종에 대해

히브리서 2:5-9, 창조절 여섯째 주일,

2012년 10월7일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여러분들은 교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생존해 계실 때는 물론 아닙니다. 십자가, 부활, 승천 직후도 물론 아닙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교회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던 사람들이 어느 일정한 날을 기해서 교회를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아주 천천히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역사 과정에는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유대교인으로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들, 유대교인으로 다른 나라에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그 외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이 살아온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과 그 표현 방식도 달랐습니다.

 

오늘 제2독서로 읽은 히브리서는 신약성서의 다른 책들과 비교할 때 크게 차이가 납니다. 히브리서는 유대 기독교에서 활동하던 지도자가 쓴 책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문화를 잘 알고 있었고, 묵시문학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 정권의 박해에 직면해 있던 로마 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적 인내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이 글을 썼습니다. 그가 유대 기독교 지도자이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예컨대 예수님을 ‘큰 대제사장’으로(4:14 이하) 묘사하고, 예수 사건을 구약의 종교시설인 성소와 결부해서(9:1 이하) 설명합니다. 그 외에도 가인과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여러 사사들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존귀와 영광

 

오늘 본문에서도 구약의 시편이 인용되었습니다. 히 2:6-8절은 시편 8:4-6절의 인용입니다. 시편 말씀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니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여기서 사람과 인자는 말 그대로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천사처럼 초월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쓴 것처럼 특별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수 있고 지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영광과 존귀의 관이라는 표현은 문학적 수사입니다. 만물 중에서 사람이 가장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만물을 지배합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합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구에서 사람이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현대 문명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에 일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기자도 사람을 절대화하려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말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창세기 기자의 관점과 통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만물의 창조를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경우에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생명체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어떤 것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사람은 영광과 존귀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의 영적 시각에서 나온 설명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기자의 이 진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해당된다고 보았습니다. 9절에서 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는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심을 받은 분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습니다. 이런 표현들이 너무 종교적인 것으로 들려서 가슴에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천사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못하다는 말은 예수님의 역사적 현실을 가리킵니다. 천사들은 먹지도 않고 배설하지도 않고 아이를 낳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이 가고 싶은 곳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갑니다. 넘어져도 다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천사들은 초월적인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천사들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사람의 한계를 그대로 안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천사보다 못했다는 말은 실제로 천사보다 못하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적인 실존을 그대로 안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죽음의 고난입니다. 이건 그렇게 어려운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것도 예수님이 천사와 같이 않았다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천사는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셋째는 영광과 존귀의 관입니다. 영광과 존귀는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종교적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에 하나님이 현현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예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부활은 종말에 일어난 궁극적인 생명을 가리킵니다. 부활은 인류 역사에서 예수님 이외에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여전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왕에게도, 학자에게도, 장군에게도 영광과 존귀는 불가능합니다. 숨을 쉬지 않거나 먹지 않고도 사는 사람이 있다면 영광과 존귀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모두 죽을 운명으로 살아갑니다. 부활의 주님께만 영광과 존귀의 관이 주어졌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세 가지 사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사람이 겪어야 할 실존적인 한계 안에서 사셨고, 가장 비극적인 죽음인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동일하게 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나마 천사보다 낮았던 운명이 그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운명과 일치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이런 주장이 복잡하게 들리십니까? 이해가 안 되십니까? 동의할 수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 안에 들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또는 이 사실을 또렷하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그런 영적인 깊이까지 들어갔는지는 더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내용은 모르면서도 그냥 낱말 뜻만으로 아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그 세계에 들어왔는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만물의 복종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우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영광과 존귀의 관을, 즉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셨다면 만물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치입니다. 로마 시대 때 아들이 없는 귀족들은 종종 양자를 두곤 했습니다. 양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습니다.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양자는 아버지와 동일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양자가 이전에 어떤 신분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뒤로(호모 우시오스) 하나님의 전권을 그대로 행사할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만물이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듯이 예수님에게도 복종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히 2:8b) 히브리서 기자는 광신자가 아닙니다. 관념주의자도 아닙니다. 현실을 왜곡해서 아전인수적으로 보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이 아직 예수님께 복종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이 세상에 아직 구원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신 뒤로도 이 세상은 그 이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불행이 없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허무와 소외도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자의 고난도 여전합니다. 악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였다는 증거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그것을 근거로 기독교를 비판합니다. 예수가 메시아인 증거가 이 세상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을 좁히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간증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예수를 믿지 않거나, 다른 종교를 택하는 경우에도 일어납니다. 어떤 분은 마음의 확신이 있다고 말할 겁니다. 성령이 그런 확신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으로 말하면 사이비 이단들의 믿음이 훨씬 좋습니다. 그런 확신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기독교인은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는 너무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은 확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한 것 같은 현실을 더 많이 경험할 겁니다. 여전히 불안하고, 허무하고, 좌절하고, 이기적입니다. 우리의 삶이 여전히 예수님께 복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걸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구원 증거들을 보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의 인식은 정확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실존은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구원 공동체인 교회에 속해있지만 구원의 증거는 없습니다. 이런 딜레마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그래서 증거가 있는 것처럼 위장합니다. 세상과 자기를 정확하게 직면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열광적인 신앙형태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어떤 교회의 금요심야 집회는 마치 ‘오빤 강남스타일’의 싸이 공연처럼 진행됩니다. 싸이 공연은 연예로서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연예와 신앙을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간 세련되어 보이는 경배와 찬양 유의 집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에 심취하는 신자들은 ‘만물이 복종하지 않는다.’는 그 현실을 직면하지 못하고 도피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직면할만한 용기도 없고, 그런 인식도 없습니다. 이런 신앙은 잠시 고통을 잊게 하는 최면의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파괴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단숨에 해결할 왕도는 따로 없습니다. 그런 묘책, 그런 비술을 찾지 마십시오. 기독교인의 실존적 딜레마를 그대로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이는 마치 구원받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죽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직면하고 그 운명을 그대로 안고 살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이런 상태로 그냥 머물러 있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런 모순, 딜레마, 충돌을 직면할 뿐만 아니라 넘어서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보고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적 시각이 무엇인지 주목하십시오. 예수가 받은 영광과 존귀의 관은 죽음의 고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수의 운명에 그런 방식으로 개입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히 2:9b). 우리도 히브리서 기자와 더불어 예수의 십자가를 봅니다.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모든 인류의 운명을 예수님이 대신 지신 일이었습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이제 모든 인류의 죽음이 극복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그 예수를 본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운명에서 만물의 복종은 이미 신비한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의 운명을 그 사건에 맡기고 사십시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은 만물이 예수님께 복종하는 구원의 세계를 선취적으로(미리 당겨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7507 민수기 도피성 민35:1-34  이정원 목사  2012-11-05 3209
7506 민수기 기업을 주시는 하나님 민34:1-29  이정원 목사  2012-11-05 2601
7505 민수기 은혜를 회고함 민33:1-56  이정원 목사  2012-11-05 2401
7504 민수기 함께 싸우라 민32:1-42  이정원 목사  2012-11-05 2405
7503 민수기 죄와 싸우라 민31:1-54  이정원 목사  2012-11-05 2311
7502 민수기 서원에 대하여 민30:1-16  이정원 목사  2012-11-05 2739
7501 민수기 천국을 바라보는 삶 민28:16-31  이정원 목사  2012-11-05 2983
7500 민수기 예배하는 삶 민28:1-15  이정원 목사  2012-11-05 2604
7499 마태복음 좁은 문 마7:13-14  황성현 목사  2012-11-05 4738
7498 마가복음 퀴리에 엘레이송! 막10:46-52  정용섭 목사  2012-11-04 2967
7497 욥기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다 [1] 욥38:1-11  정용섭 목사  2012-11-04 2469
7496 마가복음 돈이냐, 하나님 나라냐 막10:23-31  정용섭 목사  2012-11-04 2213
» 히브리서 만물의 복종에 대해 히2:5-9  정용섭 목사  2012-11-04 2202
7494 예레미야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 렘33:1-3  조용기 목사  2012-11-04 3439
7493 시편 위급한 일에 대처하는 길 시91:1-16  조용기 목사  2012-11-04 2172
7492 히브리서 사랑과 징계, 진노와 심판 히12:4-13  조용기 목사  2012-11-04 1972
7491 누가복음 마귀와의 싸움 눅10:17-20  조용기 목사  2012-11-04 2170
7490 요한계시 충재와 대전쟁 계9:1-21  강종수 목사  2012-11-04 1911
7489 디모데전 사랑이 넘치는 교회 딤전3:15  한태완 목사  2012-11-02 3248
7488 마태복음 십자가의 능력 마5:39  황성현 목사  2012-10-31 5123
7487 갈라디아 십자가와 나 갈2:20  김동호 목사  2012-10-31 2831
7486 시편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시23:1-6  김동호 목사  2012-10-31 2567
7485 요한복음 십자가와 구원 요3:16-18  김동호 목사  2012-10-31 2712
7484 시편 은혜와 상처 시116:12-14  김동호 목사  2012-10-31 2347
7483 로마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롬1:16-17  김동호 목사  2012-10-31 2399
7482 시편 남은 날 계수할 지혜 시90:12  김동호 목사  2012-10-31 2158
7481 고린도후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교회 고후4:18  김동호 목사  2012-10-31 2103
7480 스가랴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루 슥6:1-15  최장환 목사  2012-10-31 4824
7479 미가 누구를 잘되게 하실까 미4:1-13  최장환 목사  2012-10-31 4799
7478 요나 요나의 기도 욘2:1-10  한태완 목사  2012-10-30 2925
7477 이사야 교만한 자의 결과 사2:12-17  한태완 목사  2012-10-30 2332
7476 요한계시 나팔재앙 계8:1-13  강종수 목사  2012-10-28 1830
7475 마태복음 표적 마4:7  황성현 목사  2012-10-26 4431
7474 시편 하루 한 번쯤은 시90:12  한태완 목사  2012-10-26 2503
7473 골로새서 예수그리스도의 탁월성 골1:18-20  김남준 목사  2012-10-26 2064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