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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blog.daum.net/yhwhroi/168861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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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실존과 구원
임헌준(예은교회 목사, Ph.D)
1. 기독교의 인간의 실존과 구원에 대한 이해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인간의 실존 및 구원에 대한 이해는 “(1) 하나님의 인간 창조, (2) 인간의 범죄(타락), (3) 하나님의 심판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인간, (4) 하나님의 인간 구원”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인간 창조
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창 1:27)
②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받은 인간(창 1:28a)
③ 자연의 관리자로서의 인간(창 1:28b)
④ 에덴 동산을 선물로 받은 인간(창 2:8, 15)
⑤ 자유 의지를 지닌 인격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창 2:9, 16-17)
(2) 인간의 범죄(타락)
① 선악의 갈림길에서 악의 유혹을 받는 인간(창 3:4-5)
② 악의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짓는 인간(창 3:6)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의지를 남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게 되었다(창 3:1-6).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게 하였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교만과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악의 유혹에 넘어가(창 3:4-5)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여 선악과의 열매를 먹었다(창 3:6). 이것이 죄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과 욕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는 불순종이 죄이다.
(3) 죄의 결과 : 하나님의 심판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인간
(a)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고통당하는 인간
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단절되고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창 3:23-24)
② 평등한 관계이던 부부 사이에 남녀차별이 생김(창 3:16)
③ 노동이 “기쁨”에서 “고역”이 됨(창 3:17)
④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이 생김(창 3:15, 18)
⑤ 형제간에 살인사건이 일어남(창 4:8)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죄를 지은 결과 하나님, 다른 사람, 자연과의 참된 관계가 단절되게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은 예외 없이 모두 다 죄인이다(롬 3:23).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롬 5:12).
(b)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①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완전한 선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다(전 7:20).
②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롬 3:23).
③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공로와 노력으로는 결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렘 2:22).
(4) 하나님의 인간 구원
(a)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
①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복을 내리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②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의 은총과 사랑을 베푸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다(요 3:16; 롬 5:8; 사 53:5-6).
③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롬 3:24; 참조. 롬 7:19, 23-25).
(b) 믿음으로 구원
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인간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음으로써 받게 되는 것이다(롬 10:9-10; 롬 3:28; 참조. 엡 2:8-9).
②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요 3:16).
③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요 1:12).
④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시며(롬 8:16; 갈 4:6;), 성도의 삶 가운데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갈 5:22-23).
(c)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다
성경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한다(행 4:12).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요 14:6).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기독교가 불교에 비해 배타적이고 독선이 강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이 문제는 뒤의 “기독교와 불교, 그 개방성과 포용성” 부분과 “전도와 포교” 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2. 불교의 인간의 실존과 해탈(解脫) 성불(成佛)에 대한 이해
불교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자신의 선악 간 업(행위)에 따라 윤회(輪廻)하는 존재이며,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존재이다.
불교에서는 윤회와 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로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는 근본불교 경전과 대다수의 대승불교 경전들에서 전개되는 자력문(自力門) 교설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불교 가운데 정토부 경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타력문(他力門) 교설이다. 자력문 교설은 인간 자신의 이성(理性)을 신뢰하고 일체의 문제를 이성에 의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에 서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타력문 교설에서는 인간이 무력(無力)하고 죄업(罪業)이 심중(深重)한 존재라는 입장에서 아미타불과 같은 타력(他力)에 의한 구제(救濟)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흔히 ‘해탈’(解脫) 혹은 ‘성불’(成佛)이라고 하는데,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해탈’이라고 하고, 무명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된다는 의미에서 ‘성불’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 추구하고 있는 해탈 성불의 길은 경전이나 종파에 따라서 무척 다양하게 제시된다.
(1) 근본불교(根本佛敎)의 가르침
근본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사성제(四聖諦)인데,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룬 후 ‘최초로 가르친 교설’(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이 사성제설에서는 괴로움(고통)에서 벗어나는 길로 팔정도(八正道)를 말하고 있다. 곧 팔정도를 수행함으로써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성제(四聖諦)
고(苦)-괴로움
집(集)-괴로움의 발생 이유 : 어리석음(무명)으로 말미암는 그릇된 집착
멸(滅)-괴로움의 소멸
도(道)-괴로움을 소멸하는 길로서 팔정도(八正道)
① 정견(正見) : 바르게 보는 것
② 정사유(正思惟) : 바르게 생각하는 것
③ 정어(正語) : 바르게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 : 바르게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 : 바르게 생활하는 것
⑥ 정정진(正精進) : 바르게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 : 바르게 기억하는 것
⑧ 정정(正定) : 바르게 선정에 드는 것
(2) 대승불교의 가르침
(a) 육바라밀(六波羅蜜)
육바라밀은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菩薩)의 수행법으로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실천 덕목이다.
① 보시(布施) :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
② 지계(持戒) : 계율을 잘 지키는 것
③ 인욕(忍辱) : 괴로움을 참는 것
④ 정진(精進) :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⑤ 선정(禪定) :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
⑥ 지혜(智慧) : 모든 법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
(b) 참선(參禪)
禪은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닦는 수행법이다. 불교의 선(인도선)은 불교 이전부터 내려오던 인도의 요가(yoga)로부터 기원한다. 그러나 고타마 싯다르타는 요가의 수련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니었다. 요가의 수련에서는 대부분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 선을 수련하였으며 두 번째로 육체적 건강을 도모하는 한 방법으로 선을 수련을 하였다. 그러나 고타마 싯다르타는 해탈에 중점을 두고 선을 수행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달마선은 6세기에 중국에 온 보리달마(Bodhidharma, 532년 죽음)로부터 유래하였다고 말하여 지고 있으며, 중국에서 종파로 성립되어 한국과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이 달마선에서는 그 종지(宗旨)를 다음과 같이 열 여섯 문자로 집약하여 나타낸다.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불립문자(不立文字) : 선은 이론에 의존하지 않는다
교외별전(敎外別傳) : 선은 싣닷타가 가르친 말 외에 별도로 전해지는 것이다
직지인심(直指人心) : 선은 사람의 마음의 실상을 바로 가리키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선은 인간의 성품을 바로 보고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다.
(c) 간경(看經)
간경은 경전을 통해 불법을 공부하는 것으로, 생각으로만 부처의 가르침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천을 통해 그 말씀이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수행이다.
(d) 화엄경의 십지(十地) 수행
화엄경에서는 부처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서 다음과 같은 열 단계의 수행 체계를 말하고 있다.
① 환희지(歡喜地) : 10대원을 세움
② 이구지(離垢地) : 십선업을 행함
③ 발광지(發光地) :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등을 관함
④ 염혜지(焰慧地) : 三十七助道品을 닦음
⑤ 난승지(難勝地) : 사성제를 닦음
⑥ 현전지(現前地) : 십이연기를 관함
⑦ 원행지(遠行地) : 십바라밀을 닦음
⑧ 부동지(不動地) : 무생법변(無生法邊)을 얻음
⑨ 선혜지(善慧地) : 사무애지(四無碍智)를 얻음
법운지(法雲地) : 대법우(大法雨)를 뿌림
(e) 염불(念佛)
염불이란 부처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거나 상호를 관상하거나 공덕을 생각함으로써 불국토에 왕생(往生)한다는 수행법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해탈 성불의 길이 경전이나 종파에 따라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해탈 성불의 길은 누구나 원한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길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수행자가 혼신의 정열과 노력을 쏟아야만 올라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취하는 해탈 성불의 방법은 세속적인 삶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수행에 몰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출가 승려가 되어 전문적인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출가 승려가 되어 수행한다고 해서 해탈 성불의 길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사십이장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리심을 냈을지라도 닦음도 없고(無修) 증함도 없는(無證) 경지에 이르기는 참으로 어렵다.”(성전편찬회 편, 『불교성전』p. 257.)
3. 맺는 말
기독교와 불교는 인간에게 선을 권장하고 악을 멀리하도록 가르친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두 종교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삶의 본질적인 부분에서부터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①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반면에 불교의 인간 이해는 모든 존재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우주적인 현상을 전개시킨다는 연기의 관점으로부터 출발한다.
②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고통의 세계에 살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악한 행위에 대한 결과로 고통을 겪게 된다고 가르친다.
③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수행을 통해서 고통스러운 세계로부터 벗어나 생명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④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구원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다. 누구든지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행 2:21; 계 3:20). 불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의 길은 출가 수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만 열린다.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지 않는 불교신자에게는 이생에서 부처가 될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다만 현생에서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선하게 살고, 그 과보로 내생에는 출가수행자가 되어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되고자 하는 희망사항이 있을 뿐이다.
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로부터 오는 참된 기쁨과 소망, 참된 평화와 안식이 함께 한다(마 11:28; 요 3:16). 그러나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지 못한 불교신자는 생의 마지막 길에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극락에 간다는 보장도 없다. 그저 업보윤회의 굴레 속에서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막막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인간의 실존과 구원에 대한 이와 같은 차이는 신자들의 현실에서의 삶의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삶의 현장에서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어떤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고자 한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동행하고자 한다. 현실의 고난 가운데서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본다.
불교인은 과연 어떠할까? 현실에서 부딪치게 되는 다양한 현상들을 인과응보와 윤회의 틀에서 해석하고자 하지 않을까?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을 과거에 자신이 지은 악한 행위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지는 않을까?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현실 가운데서 업보의 무게에 눌려 자포자기하게 되지는 않을까? 현실세계의 수많은 유혹들 앞에서 ‘오늘의 잘못에 대한 과보는 받아도 내가 받는다’면서 불의와 타협하려고 하지는 않을까? 아마도 진정한 불교인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상한 현실 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진리의 세계를 찾아가고자 부단한 노력을 할 것이다.
*이 글의 출전
임헌준, 『아는 만큼 보인다』(서울: 쿰란출판사, 2005), pp. 6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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