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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blog.daum.net/yhwhroi/168861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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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 그 개방성과 포용성
기독교가 불교보다 폐쇄적이고 배타성이 강한가?
임헌준(예은교회 목사, Ph.D)
1. 부적절한 예증과 잘못된 결론
비기독교인들, 특히 불교인들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불교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불교가 개방적인 것에 비해 기독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런가? 불교가 개방적인 것에 비해 기독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가? 앞에서 인용한 말은 무심히 지나쳐 들으면 그럴 듯 하지만, 한번 더 살펴보면 서로 다른 논리 구조를 지니고 있는 예증으로부터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위의 인용문을 예증부와 결론부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예증
.............. 불교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결론
그러므로 불교가 개방적인 것에 비해 기독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성이 강하다.
예증에서 핵심이 되는, 밑줄 표시한, 두 문장은 서로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문장은 ‘누가’-‘어떻게 된다’는 ‘주체-결과’의 구조이다. 반면에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문장은 ‘어떻게 하면’-‘어떻게 된다’는 ‘조건-결과’의 구조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는 문장을 근거로 하여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방법에 있어서 적절치 못하며, 그 결론 역시 적합하다고 할 수 없다. 두 문장을 예증으로 하여 타당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두 문장을 본래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같은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문장은 ‘어떻게 하면’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깨달음을 이루어야만’)을 넣어서 “누구나 깨달음을 이루어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문장은 생략되어 있는 주체(‘누구나’)를 넣어서 “누구나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로 바꿀 수 있다.
이렇게 두 문장에 각각 빠진 내용을 삽입할 경우 두 문장 모두 ‘누가’-‘어떻게 하면’-‘어떻게 된다’는 ‘주체-조건-결과’의 같은 논리 구조를 지닌 문장이 된다.이제 예증이 되는 두 문장을 다시 보도록 하자.
불교에서는 ‘누구나 깨달음을 이루어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누구나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2. 기독교와 불교, 그 개방성과 포용성
이제 새로 바꾼 두 문장을 예증으로 하여 기독교와 불교의 개방성과 포용성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앞의 새로 고친 두 문장에도 나타나듯이 기독교와 불교라는 두 종교에서 각각 추구하고 있는 지향점은 두 종교 다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다.
그러나 두 종교에서 추구하고 있는 지향점(구원-성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종교에서 각기 제시하고 있는 서로 다른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과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성불’에 이르는 조건을 비교하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롬 10:13; 행 2:21). 이처럼 기독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조건은 마음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마음의 결단 여부에 따라 기독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한편, 앞의 “불교의 해탈” 부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해탈 성불의 조건은 불교 경전이나 종파에 따라서 다양하게 제시된다. 그러나 경전이나 종파를 뛰어넘어 공통적인 것은 누구나 원한다고 해서 쉽게 성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해탈 성불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이 해탈 성불하기 위해서 가장 보편적으로 취하는 방법은 세속적인 삶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수행에 몰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출가 승려가 되어 전문적인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출가 승려가 되어 수행한다고 해서 ‘깨달음’의 성취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사십이장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지라도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성전편찬회 편, 『불교성전』p. 257.)
불교에서 제시하는 해탈 성불의 길은 언뜻 보기에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길이다. 그러다 보니 전문수행자가 아닌 보통 불교신자들에게 있어서 성불은 그림의 떡과 같이 현실에서 멀리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문수행자에게는 성불이 보장되는가? 그런 것도 결코 아니다. 불교의 해탈 성불의 길은 닫혀 있고, 포용적이지도 못하다.
구원/성불에 이르기 위한 조건들을 살펴볼 때, 불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폭이 좁고 어려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더 닫혀 있다. 기독교가 불교보다 훨씬 더 열려있다. 그러므로 “불교가 개방적이고 포용성이 큰 것에 비해 기독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성이 강하다.”는 말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가 개방적이고 포용성이 큰 것에 비해 불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성이 강하다’라고 말해야 옳다.
*이 글의 출전
임헌준, 『아는 만큼 보인다』(서울: 쿰란출판사, 2005), pp. 8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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