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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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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선웅 목사 |
참고 : | 2006년 7월 2일 남문교회(예장합신) http://nammoon.or.kr |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오늘은 우리 교회를 비롯해서 전국 교회가「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출 25:1-2>의 본문 말씀을 같이 보았습니다. 이 시간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예배 때에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예물을 내게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예물이라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덴마크 사람들은 식사 때에 검고 맛없는 빵을 먼저 먹고 나서 그 다음에 맛있는 빵을 먹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 못 먹고 못 살던 때를 기억하려는데 있습니다. 옛날 곤고했던 시절을 돌아봄으로써 오늘의 번영에 더 감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저 북쪽에서는 여전히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한에서는 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다 살기가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전에는 어렵게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끼니를 제대로 때우기 어려웠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보릿고개」가 되면 더 힘들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맥추절은 우리로 하면 보리를 수확하고 나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성경에 “칠칠절 곧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출 23:16, 잠 3:9).
첫째: 우리가 예배 때에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본문 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는「예물」은 감사와 예절의 표시로 존경하는 이에게 드리는 선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람에게도 감사와 예절의 표시를 해야 되지만 특별히 하나님께 해야 합니다. 성경은 예물을 예배에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시 96:8>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 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 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 지어다”고 하였습니다. 그 궁정에 들어갈 때 예물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궁정은「성전」을 가리킵니다. 신약시대 표현으로 하면「예배당」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준비해서 드림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성도가 하나님께 경배드릴 때 예물을 준비해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 23:15>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맥추절과 수장절과 유월절의 절기를 지킬 것을 명하시면서 너희는 내게 나아올 때에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빌 4:18>에도 보면, “너희가 에바브로 디도 편에 보낸 것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향기로운 제물」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향기로운 제물」이라는 말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 또는 예물이라고 하는 뜻의 “프로스포라”라고 하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물은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예배의 필수조건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창 4:3-4>에 가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창 8:20>에 노아도 번제단에서 “제물”을 여호와께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창 14:20>에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레 1:2-3>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느냐 하면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께 드리는「예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번제」로 드리는「짐승」이든 다른 어떤「헌물」이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두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물을 모세 이후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의 의무로 못 박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드리는「헌금」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예물」이요 감사해서 드리는「감사의 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헌금의 은혜가 따르지 않는 은혜는 참 은혜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성도는 헌금을 드리고 싶고 바치고 싶어지게 마련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나는 너의 돈주머니가 회개하기 전에는 너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물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예물을 내게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예물을 내게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타협이나 흥정이나 권면이 아닙니다.「명령」입니다. 여기 보면 “내게 가져오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명령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4:7>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전부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까지도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 이제 그만 살고 와라!”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시면 그 때는 내가 그만 살고 가야 됩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나에게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네 독자 이삭을 내게 바치라고 했을 때「순종」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과연 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아들을 내게 줄 수 있겠느냐?”고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아브라함이 통과를 한 것입니다(창 22:1-4).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까? “그렇다! 나는 본래 자녀가 없었고 이삭을 낳을 때에도 나나 내 아내가 나이가 많아서 자식을 낳을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내게 주셨다. 그 아들을 내게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는 사실을 그가 인정했기 때문에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 때에 아브라함이 “어림도 없는 말씀 마십시오. 어떻게 얻은 아들인데 바치라는 겁니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이 아들 절대로 못 바칩니다.”라고 했더라면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는 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눈에 흙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이 주신 사실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 후로 엄청난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문이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게 됩니다. 손대는 것마다 흥왕하고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됩니다. 그 앞을 막아 설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되로 드리고 말로 돌려받았습니다.
경제 용어 가운데「저비용 고효율」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최저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극히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누리는 것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실 이보다 더 좋은 경제원리는 없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성공 원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펌프질을 통해 지하에 있는 무진장의 물을 퍼 올리기 위해 미리 한 바가지의 물을 투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눅 6: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고 차고 넘치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백낙준 박사의 아버지 이야기를 여러분 아시지요?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예배당을 짓는다고 해서 하나밖에 없는 소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혼자서 논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선교사가 그곳을 지나다가, “거 소 한 마리가 있었다면 좋을 뻔했습니다. 힘드시지요?”라며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백낙준의 아버지가 “괜찮습니다. 힘은 들지만 소를 부릴 때보다 지금이 더 기쁩니다. 소가 한 마리 있기는 있었는데 예배당 짓는데가 드렸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교사가 그만 감동이 되서 한마디 했습니다. “제가 뭘 좀 도울게 없겠습니까? 혹시 공부하고 싶어 하는 아드님이 있으시면 서울에 있는 제 연락처로 연락을 주시지요.” 그렇게 해서 백낙준이 미국 유학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돌아와서 연세대학교 총장이 되게 되었습니다. 백낙준의 아버지는 소 한 마리 드리고 아들을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만들었다니까요.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가난해서 가져오라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뺏기 위해서 가져오라는 것 아닙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그 정성을 보시고, 그 순종을 보시고 칭찬하시고, 상주시고, 복 주시려는데 있습니다. <마 6:20-21>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여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 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보물은 귀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마음이 그곳으로 끌려가게 마련입니다. 마음이 그것을 더나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 사람은 그 마음이 하늘에 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땅에다 보물을 쌓는 사람의 마음은 땅에 있게 되지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의 마음은 하늘에 있게 됩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찬국에 가서 썩지 않는 보물을 받게 되므로 복이요,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종이 되어 살지 않게 되기 때문에 복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정말 필요할 때 가장 안전한 하늘 은행으로부터 지급을 받아서 가장 요긴하게 쓸 수 있게 해주십니다(잠 3:10). 지금까지 역사가 그랬습니다. 간증 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일에 승리하므로 인생 승리자들이 다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예물이라야 합니다.
<2절>에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 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물 자체나 예물의 양보다는 예물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를 보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물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헌금을 얼마나 드렸느냐를 보시기 보다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드렸느냐를 보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물질이 아닙니다. 내가 곧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입니다. <잠 23:26>에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 지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그 명령대로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가져와도 아주 많이 가져왔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가져오는 사람들의 것만 받았는데도 너무 많아서 더 이상 받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여기 <출 36:3-5>에 “백성들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연하여 가져오므로 - 성소를 건축하는 기술자들까지 나서서 도무지 당신들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이제 좀 그만 가져와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있는 예물을 드릴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명령에 순종해서 믿음으로 예물을 드렸습니다. 자원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호마노, 어떤 사람은 향품을 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해달의 가죽, 어떤 사람은 금목걸이, 어떤 사람은 가락지, 팔찌를 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술로 봉사하였습니다(출 35:4-8, 출 36:4-8). 그들은 쓰고 남아서 드리지 않았습니다. 여유가 있어서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형편과 지금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자기들이 그동안 소중히 간직해 오던 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드렸습니다. 힘껏 드렸습니다. 그들은 지금 광야를 통과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나온 지도 꽤 오래 되었기 때문에 처음보다 피난 보따리가 많이 작아져 있었습니다. 그들도 언젠가 자기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되면 돈이 좀 있어야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하고 살림도 장만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힘껏 드렸습니다. 그들은 자기 보따리 적어지는 것만 보지 않았습니다. “이 다음에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어떻게 살아야 되나?”하는 그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입도 없었습니다. 드리고 나면 거기 광야에서는 다시 마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드렸습니다. 그들은 내일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기쁘게 받으실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예물」은 그 예물을 받는 이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물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일도 그렇습니다. 즐겁게 일하는 사람과 억지로 일하는 사람은 얼굴 표정부터 다릅니다. 일의 능률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찬송도 기쁨으로 하는 사람과 마지못해서 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헌금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기쁨으로 드리는 사람과 억지로 드리는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도 그것을 압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어느 성악 교수에게 같은 기간에 두 가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선교 공연이었고, 하나는 연주회 출연이었습니다. 선교 공연은 내 돈 내고 가서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주회에는 돈을 받고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민했습니다. 고민하다가 먼저 약속한 선교 공연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후로 감당 못할 만큼 여기저기서 이 오페라 저 오페라, 이 도시 저 도시, 이 방송 저 방송에서 공연 요청이 쇄도하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즐거운 마음으로 힘껏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면 되는 겁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습니다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과 감사로 드리는「예물」입니다. 정성과 기쁨으로 드리는 「예물」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보시기 전에 먼저 성도의 마음을 보십니다. 성도의 믿음을 보십니다. 먼저 성도의 마음을 받으시고, 성도의 정성을 받으십니다. <고후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예물을 드리려고 할 때 처음 생각이 성령님께서 내게 주신 마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처음 생각대로 예물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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