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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6: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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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민선기 목사 |
참고 : | 2005,07,31,주일저녁영월순복음사랑의교회 http://www.e-lovechurch.org/ |
성막론(18)성막의덮개①(해달의가죽)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 매 폭의 장은 이십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하고, 그 앙장의 연락할 말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앙장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앙장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대하게 하고,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앙장을 연합하여 한 성막을 이룰지며,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각 폭의 장은 삼십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열한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하고 그 여섯째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 드리우고, 앙장을 연락할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놋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그 고를 꿰어 연합하여 한막이 되게 하고, 그 막 곧 앙장의 나머지 그 반폭은 성막 뒤에 드리우고, 막 곧 앙장의 길이의 남은 것은 이편에 한 규빗, 저편에 한 규빗씩 성막 좌우 양편에 덮어 드리우고,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 덮개를 만들지니라” (출 26: 1-14)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 장군은 1648년 의회군을 이끌고 왕 당파를 물리친 후 공화국을 세웠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정치가였으며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무엇보다 경건한 신앙을 생활에 실천하려고 노력한 청교도였습니다. 그는 식사 때마다 이렇게 기도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중에는 먹을 것이 있어도 식욕이 없는 이가 있습니다. 또한 식욕이 있어도 먹을 것이 없는 이가 있습니다. 저희에게 먹을 것과 식욕을 함께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두 곳입니다. 하나는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겸손하고 감사하는 심령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는 성막이 덮개에 대하여 알아보고 은혜를 받겠습니다.
성막의 덮개는 네 겹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밖으로부터 첫 번째 덮개는 회색빛이 나는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어 덮었습니다(14절). 두 번째인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만든 덮었습니다. 세 번째의 덮개는 염소 털로 짠 앙장(막)으로 덮었습니다. 네 번째 성소의 천정이 되는 덮개는, 백색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밖으로부터 첫 번째 덮개인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에 대하여 고찰해보고 은혜 받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해달은 바다의 포유동물입니다. 해달(seaotter)은 족제비과에 속하는 물짐승으로서, 수달과 비슷한데, [해다리]라고도 합니다. 텔레비전에서 해달이 조개를 잡아서 배에다가 얹어 놓고 돌로 깨서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해달의 가죽을 가지고 성막의 가장 밖에 덮개를 만들어 덮었습니다.
그러니까 밖에서 성막을 보면 이 해달 가죽만이 보였던 것입니다. 해달의 가죽은 모양이 아름답게 보이거나 호화롭게 보이는 가죽이 아닙니다. 그러나 질기고 햇빛과 비바람에 강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가죽이랍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밖에서 보면, 화려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성막은 하늘나라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히브리서 8장5잘의 말씀에서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하늘나라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성막의 겉만 보면 회색 빛나는 해달의 가죽으로 덮였기에, 우중충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천국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에게는, 그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천국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고 천국에 가라고 하면 콧방귀를 뀝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예수님 믿고 이 땅에서 부자 되라고 하면 솔깃해 합니다. 이것은 아름답고 영화로운 천국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천국보다 이 땅이 훨씬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부자가 크리스마스이브 날에 의자에 앉아서 자기의 재산을 계산해 보다 피곤해서 책상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꿈속에서 천사와 함께 천국의 거리를 거니는데 아름답고 멋진 집이 가득한 거리에 이르렀습니다. 한 아름다운 집에 이르자 그 부자가 물어 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천국에서 이런 좋은 집을 소유했습니까?'고 하자, 천사가 책을 들여다보더니 '이 집은 당신의 정원사의 집입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부자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정말이요? 당신은 무슨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그 사람은 세상에서 내 땅에 있는 조그마한 오막살이에 사는 사람인데 이런 집을 소유할 사람이 못됩니다.'고 하더랍니다. 그러자 천사가 대답하기를 '천국에서는 절대로 실수를 하는 법이 없습니다.'하더랍니다.
천사와 부자는 걷다가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부자는 어느 형편없이 작은 집에 이르러 '천국에서는 어떤 불행한 사람들이 이런 작은 오막살이에 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다시 책을 보더니 '이 집은 바로 당신이 올 집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이 말을 들은 부자는 '당신은 뭔가 잘못 보았겠지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겨울이나 여름별장도 잇고, 시골이나 도시에 집이 있습니다. 이런 집이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까, 천사가 하는 말이 '이것은 분명히 당신의 집입니다. 천국에서는 실수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 집은 당신이 세상에서 보낸 재료를 가지고 지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이 부자가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부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삶에 방법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천국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기에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천국이 믿어지지 않기에 예수님을 못 믿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들을 놀리느라고 천국은 이미 만원이라고 교회 다녀봐야 못 들어간다고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180도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예수 잘 믿다가 육신을 장막을 벗어 버리는 그날에, 천국에 들어가서 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도 겉이 해달의 가죽으로 덮인 성막의 겉 모형처럼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 2절이하의 말씀에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하기를,“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흠모할 만한 모습이란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 눈에는 이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못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우리를 되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을 전도하다가 보면, 예수가 밥 먹여 주나 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모르니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서슴지 않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몰라서입니다. 모르면 용감하거든요? 예수님 믿고 회개하면 괜찮겠지만, 그냥 죽는다면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이 집사는 노방 전도대의 팀원이었습니다. 전도대가 어느 날 지방 소도시를 찾아 거리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복음에 귀를 기울여주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 집사가 가장 많이들은 말은 ‘아니오’였고, 덧붙이는 말들이, 이 집사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 형님이 장로요. 그런 형님이 믿는 예수가 난 싫소.” “내 옆집 사람이 집사입니다. 말도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도 아프고 얼굴도 뜨거웠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집사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예수 믿는 놈을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이들은 예수님을 모르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만을 보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깊이 아는 사람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전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데 앞장을 서서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 일 때도 죽이는 것이 옳다고 하였던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시리아 공화국의 수도인 현재의 `다마스커스')까지 갔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 동북쪽 약 230km정도이랍니다. 이 먼 다메섹에 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갔다가, 길 위에서 정오에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그는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사울이란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뒤 그 이름을 바울이라고 불렀는데, 빌립보서 3장4-6절까지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의 신분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으로 또 유대교인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는데 어떻게 달라졌느냐? 하면, 빌립보서 3장 7-9절까지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높은 지식으로 여겼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마음에 모시고 살게 된 것을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면 그 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입은 치유자의 저자인 헨리 나우웬이란 사람은, 한때 천재로 불리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집필한 30여권의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명인사가 되어, 그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공한 인생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그가 어느 날 “나는 교수직을 포기한다. 이제 정박아시설에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놀란 주위에 사람들이 말리면서“그 많은 명예와 보수를 왜 버리려 하는가. 차라리 후학을 양성하라.”고 권면을 하였답니다.
그러나 그는 굽히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왜 그렇게 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오르막길 인생은 성공과 칭찬에 가려, 예수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낮은 곳에서 예수를 만날 것이다.” 그는 인생의 말년을 매사추세츠 정박아시설에서 장애인들을 돌보다가 소천을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고통과 눈물의 돌 자갈이 깔린 곳에 예수님의 미소가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예수를 바르게 알면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하신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바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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