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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blog.daum.net/yhwhroi/16886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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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에 사용된 불교적 용어
임헌준(예은교회 목사, Ph.D)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 가운데에는 한자어(漢字語)가 꽤 많은 편이다. 이 한자어들 가운데에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지옥(地獄), 아귀(餓鬼), 아수라장(阿修羅場), 야단법석(野壇法席), 가책(呵責), 탑(塔), 화두(話頭)와 같이 한역(漢譯) 불교 경전이나 불교 사찰에서 주로 사용되던 불교적 용어들도 적지 않게 들어있다. 이 용어들은 4세기 후반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고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불교권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 일반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당시 사회 일반에서 두루 사용되던 불교적 용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를 사용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한글 성경에 불교적 용어가 사용된 것을 굳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한글 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불교적 용어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 용어들이 모두 다 불가피하게 사용된 것일까? 그것들 가운데 불교적 용어가 아닌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있지 않을까? 혹 구태여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불교적 용어가 번역 과정에서 덧붙여진 것으로 이를 삭제해도 성경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없을까?
이 글은 이러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하게 되었으며, 한글 성경전서 개역개정판(1998)에 사용된 불교적 용어들 가운데 1차적으로 16개에 대해 (1) 불교에서 사용하는 의미, (2) 일반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미, (3) 개역개정판에서 사용된 곳, (4) 해당 용어의 성경 원어와 그 뜻, (5) 비불교적 용어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필자가 ‘불교 용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불교적 용어’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은 이 글에서 다룰 예정인 용어들 가운데 어떤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불교권에서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불교 이전부터 사용되던 한자어를 불교 경전이나 불교 공동체에서 사용한 것인지 필자가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적 용어에 대해서 어원보다는 불교에서 사용되는 의미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한글 성경에 사용된 불교적 용어를 대체할 수 있는 좋은 우리말을 찾기에 필자로서는 역부족이다. 미흡한 부분은 해당
분야를 전공하는 분들이 마무리 해주시길 기대하며, 한글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에 사용된 불교적 용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가책(呵責)
불교에서 ‘가책’이란 용어는 ‘비구(남자 승려)의 죄를 다스리는 법 가운데 하나’를 말한다. 비구가 수행 중에 잘못을 저지를 경우 대중(大衆, 많은 승려)들 앞에서 가책을 선고하고, 35가지의 권리를 박탈한다.
하지만 일반 사회에서 이 용어는 ‘(잘못을) 꾸짖어 나무람’(예. 허물을 가책하다), ‘마음에 찔림’(예. 양심에 가책을 느끼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개역개정판과 개역성경에서는 ‘가책’이 1회(요 8:9) 사용되고 있는데, 한글 성경 개역개정판의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요 8:9)와 개역성경의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요 8:9)는 헬라어 ‘아쿠산테스’를 번역한 것이다. ‘아쿠산테스’는 ‘들음’을 뜻하는 동사 ‘아쿠오’의 ‘분사/제1단순과거/능동태/주격/남성/복수’ 형태로서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의 뜻이다.
개역개정판의 ‘양심에 가책을 느껴’와 개역성경의 ‘양심의 가책을 받아’는 원문에 없는 것을 번역자가 덧붙인 것이다. 하지만 공동번역(‘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과 표준새번역(‘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에는 이러한 덧붙임이 없다. 또한 영어성경 New RSV 역시 덧붙임 없이 ‘When they heard it’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라는 번역자의 덧붙임이 없어도 성경 본문의 뜻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글 개역개정판에서도 ‘양심에 가책을 느껴’를 구태여 덧붙이지 말고 원문대로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2. 각오(覺悟)
‘각오’라는 용어는 불교 경전에서 ‘잠에서 깨어나듯이 번뇌에서 벗어나 불교의 도리를 깨닫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일반 사회에서 이 용어는 주로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함’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다(예. 고생할 것을 각오하다).
한글 성경 개역개정판에서 이 용어는 2회 사용되고 있는데, 한 번은 누가복음 22:33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는 베드로의 말 가운데 나타나고, 또 한 번은 사도행전 21:13의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는 바울의 말 가운데 나타난다.
누가복음 22:33에서 “내가 ...각오하였나이다”는 헬라어 ‘헤토이모스 에이미’를 번역한 것이다. 형용사 ‘헤토이모스’는 기본적으로 ‘준비된’(prepared)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 구절에서 ‘주격/남성/단수’ 형태로 사용되어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옥에도 가고, 죽는 데까지도 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헤토이모스 에이미’는 ‘나는 ...할 준비가 되어 있다’(I am prepared to....)는 뜻이며, ‘각오’라는 불교적 용어를 쓰지 않고도 번역할 수 있다. 그 예로, 개역성경은 이 부분을 “내가 ....준비하였나이다”로 번역하고 있고, 공동번역은 “저는 ...좋습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사도행전 21:13에서 바울의 말 가운데 들어 있는 “각오하였노라”는 형용사 ‘헤토이모스’의 부사형을 번역한 것이다. 부사형 ‘헤토이모스’는 ‘기꺼이’, ‘이의 없이’ 등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 구절에서 ‘에고 ...헤토이모스’는 ‘나는 기꺼이 ...하겠다’(I am willing to...)는 뜻으로 누가복음 22:33에서와 마찬가지로 ‘각오’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도 번역할 수 있다.
3. 걸식(乞食)
불교계에서 ‘걸식’이라는 용어는 출가 수행자가 집집마다 들러 음식을 얻어다 생활을 영위하는 고타마 싣닷타 이래로 오랫동안 이어져온 불교의 생활법이자 수행법을 가리키며 ‘탁발(托鉢)’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일반 사회에서 이 용어는 단순히 ‘음식을 남에게 빌어먹음’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한글 성경 개역개정판에서 이 용어는 1회(시 37:25) 사용되고 있다. 시편 37:25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했다”에서 “걸식함”은 히브리어 ‘므박케쉬 라헴’을 번역한 것이다. ‘므박케쉬’는 ‘찾다’, ‘구하다’, ‘요구하다’ 등의 뜻을 지닌 동사 ‘빠카쉬’의 ‘Pi./분사’ 형태로서 ‘구걸함’, ‘빔’을 뜻한다. 그리고 ‘라헴’은 ‘떡’, ‘빵’, ‘음식’ 등을 뜻하는 명사 ‘레헴’의 ‘남성/단수’ 형태로 ‘므박케쉬’와 함께 ‘먹을 것을 빔’을 뜻한다. 그러므로 개역개정판의 ‘걸식함’을 ‘빌어먹는 것’ 또는 ‘얻어먹는 것’으로 바꾸어 쓸 수 있다.
4. 결박(結縛)
우리말에서 ‘결박’은 ‘몸이나 손 따위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동이어 묶음’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심신을 속박하여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번뇌를 결박이라고도 한다.
이 용어는 한글 성경 개역개정판에서 67회(구약 40회, 신약 27회) 쓰이고 있다. 개역성경에서는 구약 39회, 신약 28회 쓰이고 있는데 개역개정판과 횟수에서 차이가 나는 까닭은 이사야 22:17의 경우 히브리어 동사 ‘아타’의 ‘Qal.능동태 분사/2인칭 남성단수 접미’ 형태인 ‘오트카’를 ‘개역성경은 ‘너를 속박하고’로, 개역개정판은 ‘너를 결박하고’로 번역하고 있고, 마태복음 22:13의 경우 헬라어 동사 ‘데오’의 ‘분사/제1단순과거/능동태/주격/남성/2인칭/복수’ 형태인 ‘데산테스’를 개역성경은 ‘결박하여’로, 개역개정판은 ‘묶어’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역개정판에서 ‘결박’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들은 구약의 경우 40회 가운데 히브리어 동사 ‘아싸르’(묶다, 가두다)에서 온 것이 29회, 동사 ‘아카드’(묶다, 매다), ‘짜아’(웅크리다, 구부리다), ‘라타크’(묶다, 매다), ‘아타’(쥐다, 감싸다, 가리우다)와 동사 ‘아바트’(감다, 짜다, 엮다)에서 유래한 명사 ‘아보트’(끈, 밧줄), 성서외어(聖書外語)에서 유래한 명사 ‘하르쭙빠’(끈, 족쇄, 차꼬)에서 온 것이 각 한 번씩 6회, 아람어 동사 ‘케파트’(묶다, 얽매다)에서 온 것이 5회이다.
신약의 경우 27회 가운데 헬라어 동사 ‘데오’(묶다, 동이다) 계열에서 온 것이 24회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동사 ‘데오’에서 온 것이 17회, 이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 ‘데스모스’(굴레, 묶는 것, 끈)에서 온 것이 6회, 명사 ‘데스모스’에서 유래한 동사 ‘데스뮤오’(묶다)에서 온 것이 1회이다.
그리고 2회는 마가복음 3:27과 이 본문의 평행구인 마태복음 12:29에서 번역자가 각 1회씩 덧붙인 것이다. 이 본문의 헬라어 성경에서는 동사 ‘데오’의 ‘가정법/제1단순과거/능동태/3인칭/단수’ 형태인 ‘데세’가 각 1회씩만 쓰이고 있지만, 한글 개역개정판과 개역성경에서는 번역자가 본문을 풀어서 번역하며 ‘결박’을 1회씩 덧붙여 2회씩 쓰이고 있다.
나머지 1회는 헬라어 동사 ‘뤼오’(풀다, 놓아주다, 해체하다)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 22:30의 경우, ‘풀다’(to loose), ‘놓아주다’(to release), ‘해체하다’(to dissolve)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동사 ‘뤼오’의 ‘직설법/제1단순과거/능동태/3인칭/단수’ 형태인 ‘엘뤼센’이 강조형 대명사 ‘아우토스’의 ‘목적격/남성/3인칭/단수’ 형태인 ‘아우톤’을 목적어로 하여 사용되고 있다. ‘엘뤼센 아우톤’은 ‘그가 그 사람을 풀어주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개약개정판에서 “(천부장이) 그 결박을 풀고”로 번역한 것이다.
한글 성경 개역개정판에 67회 쓰이고 있는 ‘결박’이라는 용어를 동사는 ‘묶다’, ‘동이다’, ‘옭아매다’, ‘가두다’ 등으로, 명사는 ‘끈’, ‘밧줄’, ‘오라’(죄인을 묶던 붉고 굵은 줄), ‘굴레’, ‘멍에’, ‘묶는 것’, ‘메인 것’ 등으로 바꾸어 쓸 수 있다.
그좋은 예를 개역개정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태복음 22:13의 경우 개역성경에서는 “그 수족을 결박하여”라고 번역한 것을 개역개정판에서는 “그 손발을 묶어”로 번역하고 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3:27의 경우, 개역개정판에서는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에 비해 새번역에서는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것이다.”로 번역하고 있고, 공동번역 개정판에서는 “또 누가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 세간을 털어 가려면 그는 먼저 그 힘센 사람을 묶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그 집을 털 수 있을 것이다.”로 번역하고 있다.
5. 경계(境界)
‘경계’(境界)라는 용어는 불교에서 (1) 과보(果報)에 의하여 각자에게 주어진 지위나 처지, 혹은 (2) ‘제불경계’(諸佛境界)에서와 같이 마음의 깨달은 상태를 이르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 용어를 줄여서 ‘경’(境)이라고도 하는데, ‘근(根, 인식 기관)-경(境, 인식 대상)-식(識, 인식 작용)’에서와 같이 인식 작용의 대상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 사회에서 이 용어는 주로 ‘어떤 지역이나 분야가 갈라지는 한계’의 뜻으로 사용된다.
한글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에서 이 용어는 113회(구약 112, 신약 1) 사용되고 있다. 신약성경의 경우, 사도행전 17:26에 사용된 ‘경계’는 ‘지계를 정함’(a setting boundaries), ‘확정된 지계’, ‘지계선’ 등을 뜻하는 헬라어 ‘호로데시아’의 ‘명사/목적격/여성/복수’ 형태인 ‘호로데시아스’를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개역개정판의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를 “거주할 지역(places)을 정해 놓으셨으니”로 바꿔 쓸 수 있다.
구약성경의 경우, ‘경계’(境界) 용어가 개역개정판에서는 113회, 개역성경에서는 65회 사용되고 있다. 두 곳에 모두 사용된 경우가 63회, 개역개정판에만 사용된 경우 50회, 그리고 개역성경에만 사용된 경우가 2회이다.
개역개정판에 사용된 113회의 대부분은 ‘구역’, ‘영역’, ‘한계’, ‘지계’ 등을 뜻하는 히브리어 명사 ‘게불’에서 온 것이다(91회). 나머지 12회 가운데는 ‘게불’의 여성형 명사 ‘게부라’에서 온 것이 7회, ‘게불’에서 유래된 동사 ‘가발’(접경하다)과 명사 ‘카쩨’(끝, 변두리)에서 온 것이 각 3회씩이다. 그리고 ‘하쩨르’(체류지, 촌락), ‘호크’(의무, 법규, 정해진 몫), ‘야드’(손), ‘예레카’(가장자리, 구석진 곳, 깊숙한 곳), ‘페아’(구석, 앞면, 옆면, 모퉁이), ‘카쭈’(끝, 지계), ‘싸파’(입술, 말, 가장자리) 등 7개의 히브리어 명사에서 온 것이 각 1회씩이다. 나머지 한 곳은 히브리어 성경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지만 번역자가 덧붙인 곳이다.
‘경계’ 용어가 개역개정판에만 사용되고 있는 50곳 가운데 49곳의 경우, 개역성경에서는 그 자리에 ‘지경’(13회), ‘지계’(32회), ‘땅’(1회), ‘가’(1회), ‘촌’(1회)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다른 한 곳인 출애굽기 19:24의 경우, 개역개정판에서 ‘경계를 넘어’로 번역된 것이 개역성경에서는 ‘돌파하고’로 번역되어 있다.
‘경계’ 용어가 개역성경에만 사용되고 있는 두 곳(수 16:5a; 19:33)의 경우, 개역개정판에서는 ‘지역’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경계’라는 불교적 용어 대신에 ‘지계’, ‘지역’, ‘땅’, ‘가’(가장자리) 등의 용어를 사용해도 성경 본문의 뜻을 이해하는데 걸림이 되지 않는다. 한편, 역대상 4:33의 경우 ‘체류지’, ‘촌락’ 등을 뜻하는 명사 ‘하쩨르’의 ‘남성 복수/3인칭 남성 복수 접미’ 형태인 ‘하쯔레헴’을 개역개정판에서는 ‘주민들의 경계’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글 성경들에서는 ‘촌’(개역), ‘마을들’(새번역), ‘천막촌들’(공동번역)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6. 공부(工夫)
‘공부’(工夫)라는 용어는 불교에서 불도(佛道)를 열심히 수행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일반 사회에서 이 말은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거나 닦음’의 뜻으로 두루 사용된다. 개역개정판과 개역성경에서는 이 용어가 전도서 12:12에 한 번 사용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많이 공부하는 것”은 히브리어 ‘웨라학 하레뻬’를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웨라학’은 접속사 ‘와우’와 ‘연구’, ‘탐독’, (책에) ‘전념’ 등의 뜻을 지닌 명사 ‘라학’의 ‘남성/단수’ 형태가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하레뻬’는 ‘많다’, ‘크다’, ‘증가하다’, ‘커지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라바’의 ‘Hi./부정사 절대형’으로서 ‘부사’ 역할을 하고 있다. 공동번역에서는 ‘하레뻬’를 부정사 절대형의 ‘강조의 부사’로 보고 그 의미를 살려서 ‘웨라학 하레뻬’를 “너무 책에 빠지면”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공부’ 용어를 쓰지 않고서도 이 본문을 충실하게 번역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7. 공양(供養) ‘공양’(供養)이란 용어는 불교에서 음식이나 옷 따위를 삼보(三寶), 부모, 스승, 죽은 이 등에게 공급하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 불교 사찰에서는 식사 일반을 가리켜 ‘공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반 사회에서 이 용어는 ‘어른에게 음식을 드림’의 뜻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널리 쓰이지는 않는 편이다. 개역개정판과 개역성경에서는 이 용어가 마태복음 25:44에 한 번 사용되고 있다. 이 구절에서 “공양하지”는 헬라어 ‘ 디에코네사멘’을 번역한 것이다. ‘디에코네사멘’은 ‘섬기다’, ‘봉사하다’, ‘돌보다’, ‘시중들다’, ‘돕다’, ‘부양하다’ 등의 뜻을 지닌 동사 ‘디아코네오’의 ‘직설법/제1단순과거/능동태/1인칭/복수’ 형태이다. 이를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모두 “돌보아 드리지”로 번역하고 있다. 참고로 마태복음 4:11에서는 ‘디아코네오’의 ‘직설법/미완료/능동태/3인칭/단수’ 형태인 ‘디에코눈’을 개역과 개역개정판 모두 “수종드니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새번역에서는 “시중을 들었다”로, 공동번역에서는 “시중들었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예에서 보듯 마태복음 25:44의 ‘디에코네사멘’을 ‘공양’이란 불교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번역할 수 있다. 8. 교만(驕慢) ‘교만’(驕慢)이란 ‘자신을 높이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수나라 혜원(慧遠)이 지은 불교 용어 사전의 일종인 <대승의장>에서는 ‘스스로를 높이어 남을 능가함’을 ‘교만’이라고 설명한다. 일반 사회에서도 이 용어는 ‘잘난 체하여 뽐내고 버릇이 없음’을 이르는 말로 두루 사용되고 있다. 개역개정판에서 이 용어는 138회(구약 124, 신약 14) 쓰이고 있고, 개역성경에서는 133회(구약 119, 신약 14) 쓰이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개역개정판과 개역성경의 같은 곳에 사용된 경우가 117회, 개역개정판에만 사용된 경우 7회, 개역성경에만 사용된 경우 2회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개역개정판과 개역성경의 같은 곳에 14회 사용되고 있다. 개역개정판의 구약성경에 124회 사용된 ‘교만’ 용어는 히브리어 동사 ‘가아’(오르다, 높여지다) 계열에서 온 것이 51회(명사42, 형용사9)로 제일 많고, 그 다음으로는 동사 ‘주드’/‘지드’(끓어오르다, 거만하게 또는 무례하게 행하다) 계열에서 온 것이 26회(동사6, 명9, 형11), 동사 ‘가바흐’(높다, 존귀하다) 계열에서 온 것 18회(동13, 명2, 형3), 동사 ‘룸’(오르다, 높아지다, 높임 받다) 계열에서 온 것이 12회(동8, 명3, 부1)이다. 그리고 동사 ‘솨안’(안심하다, 마음을 놓다, 평안하다) 계열에서 온 것(명1, 형2)과 동사 ‘가달’(자라다, 커지다, 찬양하다)에서 온 것(동3)이 각 3회씩이고, 동사 ‘나사아’(들어올리다, 나르다, 옮기다)에서 온 것(동2), 동사 ‘라하브’(7292, 난폭하게 또는 거만하게 행동하다) 계열에서 온 것(동1, 형1), 동사 ‘라하브’(7337, 크다, 커지다, 넓다, 넓어지다)에서 유래한 형용사 ‘라하브’(7342, 넓은, 광대한)에서 온 것(형2)이 각 2회씩이다. 그밖에 형용사 ‘야히르’(건방진, 오만한, 거만한)에서 온 것, 동사 ‘싸랄’(들어올리다, 높이다)에서 온 것, 동사 ‘아팔’(부풀다, 뽐내다)에서 온 것, 동사 ‘아타크’(이동하다, 나아가다)에서 유래한 형용사 ‘아타크’(뻔뻔스러운, 거만한)에서 온 것이 각 1회씩이다. 나머지 한 곳은 히브리어 성경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지만 번역자가 덧붙인 것이다(욥 15:25). 개역개정판의 신약성경에 14회 사용된 ‘교만’ 용어는 헬라어 동사 ‘휘시오오’(부풀어오르게 하다, 우쭐대게 하다)에서 온 것 6회, 동사 튚호오(흐리게 하다, 어둡게 하다)에서 온 것 2회, 형용사 ‘휘페렢하노스’(아주 뛰어난, 현저한)에서 온 것 5회, 그리고 명사 ‘휘페렢하니아’(오만, 거만, 불손)에서 온 것 1회이다. 한편, ‘교만’ 용어가 개역개정판에만 사용되고 있는 7곳의 경우, 개역성경에서는 그 자리에 ‘자고’(출 9:17; 시 66:7), ‘자만’(렘 48:26), ‘안일’(암 6:1), ‘망자존대’(시 38:16), ‘침범’(습 2:8), ‘높아지다’(욥 22:29)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교만’ 용어가 개역성경에만 사용되고 있는 두 곳의 경우, 개역개정판에서는 그 자리에 ‘높은’(욥 38:11), ‘오만’(렘 43:2)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개역개정판에 사용된 ‘교만’이라는 불교적 용어 대신에 ‘뽐내다, 우쭐거리다, 잘난 체하다, 건방지다, 부풀리다, 높임, 거만, 오만, 자만, 무례, 존귀’ 등의 용어로 문맥을 고려하여 바꿔 쓸 수도 있다. 9. 금강석(金剛石) 금강석은 흔히 다이아몬드(diamond)라고 불리는 순수한 탄소의 결정물로서 광물 가운데 경도(굳기)가 가장 높고 광채가 아름다워 보석으로 귀하게 여겨진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금강석의 견고함을 추상화시켜서 가장 견고한 것, 최고 최상의 것을 상징할 때 ‘금강’(金剛)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해 왔다. 대승불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은 ‘피안(彼岸)에 이르는 최상의 지혜를 담고 있는 경전’이란 뜻이고, 대승불교의 한 종파인 밀교를 뜻하는 금강법륜(金剛法輪)은 ‘최상의 진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밀교에서는 본존불인 대일여래(大日如來)를 금강석 같이 견고하고 강한 최고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금강계여래(金剛界如來)라고 하고, 밀교의 근본 양부 가운데 하나를 태장계(胎藏界)와 대비하여 금강계(金剛界)라고 한다. 그리고 밀교에서 사용하는 방울 모양의 도구를 금강령(金剛鈴)이라고 한다. 그런가하면 대승 보살의 마음을 금강석처럼 견고하다는 의미에서 금강심(金剛心)이라고 하고, 모든 진리에 통달한 삼매를 일컬어 금강삼매(金剛三昧)라고 한다. 이 외에도 불교에서는 금강경(金剛經),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 금강역사(金剛力士), 금강동자(金剛童子), 금강권(金剛拳), 금강저(金剛杵), 금강신(金剛神) 등 ‘금강’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명산인 금강산의 이름도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금강산, 오대산 등 여러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붙여진 비로봉(毘盧峯)이란 이름도 불교의 최고불인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글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에서 ‘금강석’이란 용어는 구약에만 4회 사용되고 있다. 이 가운데 3회(렘 17:1; 겔 3:9; 슥 7:12)는 ‘가시’, ‘차돌’, ‘부싯돌’, ‘매우 단단한 물질’ 등을 뜻하는 히브리어 ‘솨미르’에서 온 것이다. 개역개정판 본문-“금강석 끝 철필”(렘 17:1),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겔 3:9),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슥 7:12)-에서 보듯, 이 세 구절에서 ‘솨미르’는 ‘매우 단단한 상태, 굳은 상태’를 나타내기 위한 비유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구절들의 ‘솨미르’를 공동번역처럼 ‘금강석’ 대신에 ‘차돌’(렘 17:1; 슥 7:12)이나 ‘부싯돌’(겔 3:9)로 번역할 수도 있다. 새 번역은 ‘금강석’(렘 17:1; 겔 3:9), 또는 ‘차돌’(슥 7:12)로 번역하고 있다. 개역개정판에서 나머지 1회는 에스겔 28:13에서 다른 보석 이름들과 함께 나타난다. 이 구절에서 금강석은 보석의 이름 가운데 하나인 히브리어 ‘야하롬’을 번역한 것이다. ‘야하롬’은 ‘벽옥’(jasper)이나 ‘마노’(onyx)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며,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보석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야하롬’을 개역개정판의 다른 곳에서는 ‘홍마노’로 번역하기도 한다(출 28:18; 39:11). 참고로 공동번역에서는 이를 ‘백수정’으로 번역하고 있다(겔 28:13; 출 28:18; 39:11). 한편 에스겔 28:13에서는 히브리어 ‘쇼함’을 ‘홍마노’로 번역하고 있다. ‘쇼함’은 ‘마노’(onyx)나 공작석(malachite), 녹주석(bery) 등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며, ‘야하롬’과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보석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쇼함’을 개역개정판의 다른 곳에서는 ‘호마노’(창 2:12; 출 25:7; 28:9; 35:9, 27; 39:6), ‘마노’(대상 29:2), ‘청옥수’(욥 28:16)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성경을 읽는 독자는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먼저, 금강석과 홍마노가 같은 종류의 보석인가, 아닌가? 물론 이 둘은 서로 다른 종류의 보석이다. 금강석(다이아몬드)이 순수한 탄소의 결정물로 되어있는 것에 비해, 마노 종류는 석영(石英), 단백석(蛋白石), 옥수(玉髓)의 혼합물로 되어있다. 두 번째 질문, ‘야하롬’과 ‘쇼함’이 같은 종류의 보석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종류의 보석인가? 이 두 보석의 실체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같다거나 다르다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에스겔 28:13에서 각종 보석의 이름 가운데 ‘야하롬’과 ‘쇼함’이 함께 열거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둘이 서로 다른 종류의 보석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번역 과정에서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야하롬’의 번역어로 우리말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보석을 가리키는 금강석과 홍마노를 섞어 쓰기도 하고, 서로 다른 종류의 보석이라고 추정되는 ‘야하롬’과 ‘쇼함’의 번역어로 ‘홍마노’를 양쪽에 같이 사용하기도 한다. 이로 말미암아 성경을 읽는 독자는 필요 이상의 수고를 해야 한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하여 히브리어 보석 이름을 번역할 때 먼저 그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를 통일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역개정판에 4회 사용되고 있는 불교적 용어인 ‘금강석’을 문맥에 따라, 단단하고 굳은 물질의 의미로 사용될 경우에는 ‘차돌’, ‘부싯돌’ 등으로, ‘보석’ 이름을 나타낼 때는 통일된 다른 이름(예, 홍마노, 백수정 등)을 사용하거나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다이아몬드’라는 외래어로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10. 귀신(鬼神)
주일 아침 어린이 예배 시간이다. 설교를 맡은 부장 선생님은 마가복음 9:14-29의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어린이를 고치신 이야기를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였다. 예배 후 공과시간에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가 담임교사에게 “선생님, 귀신 있어요?” 하고 묻는다. 교사는 어린이에게 대답 대신 되묻는다. “네가 지금 말한 귀신은 무엇을 뜻하니?” 어린이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는 거요.”라고 대답한다. 교사가 말한다. “그런 귀신은 없단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다시는 우리에게 나타날 수 없는 거야.” 어린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한다. “아까 부장 선생님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어린이를 고쳐주셨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어떤 어린이에게 귀신이 들어가서 그 아이가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고 경련을 일으키는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고쳐주셨다고요.” 어린이의 말을 들은 교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한다. “성경에 나오는 귀신은 사람이 죽어서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괴롭히고 나쁜 짓을 하는 악한 영을 말하는 거야.” 교사는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답답해짐을 느낀다. 이러한 풍경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에서 어린이 예배 시간에 흔히 볼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이다.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 성도들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이따금씩 보게 된다. 왜 이러한 혼란이 생기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 일반 사회에서 사용하는 ‘귀신’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대체로 ‘귀신’하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곧잘 귀신이 있느니 없느니 말씨름이 벌어지곤 한다. 반면에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고, 악한 영이라고 가르친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다시는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으며, 귀신이 죽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악한 영이 그 사람의 모습으로 가장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필자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귀신에 대한 개념과 교회 밖 세상에서 흔히 생각하는 개념 사이에 차이가 있다 보니 앞에서 예로 든 것과 같은 혼란이 생기곤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말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귀신’ 용어를 다른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한글 성경에서 ‘귀신’을 다른 용어로 대체하여도 ‘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한, 또 귀신의 정체에 관한 신학적 논쟁은 가능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귀’(鬼)와 ‘신’(神)을 구분한다. 귀(鬼)는 불교의 세계관에서 윤회하는 육도(六道) 중생의 하나인 아귀(餓鬼)를 말한다. ‘귀신’이라는 한자어는 불교 경전이 한역되기 이전부터 중국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아귀는 산스크리트어 ‘프레타’(Preta)를 한역한 것인데, ‘프레타’가 ‘죽은 이’란 뜻이므로 ‘귀’라고 번역한 것이다. 불교 경전에서는 사람이 악행을 하거나 탐욕과 질투가 심한 경우에는 아귀로 태어나서 기갈(飢渴)로 고통당하는 형벌을 받게 되는데 아귀의 목구멍은 마치 바늘구멍처럼 가늘어서 음식을 먹으려 해도 먹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유래하여 염치없이 먹을 것을 탐하거나 음식을 두고 서로 먹으려고 다투는 것을 빗대어 아귀 같다고 말한다. 한편, 신(神)은 8부 신중(神衆)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귀신에는 선악의 구분이 있는데, 선한 귀신은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악한 귀신은 중생을 괴롭히고 나쁜 짓을 자행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일반 사회에서 ‘귀신’ 용어는 주로 불교적 의미보다 본래 중국에서 사용하던 대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한(恨)을 품고 죽은 사람의 영혼은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이 세상에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글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에서 ‘귀신’ 용어는 119회(구약2, 신약 117) 사용되고 있다. 개역개정판 구약성경에서 2회 사용된 귀신 용어 가운데 신명기 32:17의 “귀신들에게”는 히브리어 전치사 ‘르’(to, at, for)와 명사 ‘쉐드’(a demon, an evil spirit)의 복수형이 결합된 ‘랏쉐딤’(to demons)을 번역한 것이다. 이를 개역성경에서는 “마귀에게”로 번역하고 있다. 다른 한 곳인 스가랴 13:2의 “더러운 귀신”은 히브리어 본문 ‘루아흐 핱투므아’(the unclean spirit)를 번역한 것으로, ‘영’(spirit), ‘바람’(wind)을 뜻하는 ‘루아흐’를 개역개정판에서 ‘귀신’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를 개역성경에서는 ‘사귀’로,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영’으로 번역하고 있다. 개역개정판 신약성경에서 117회 사용된 귀신 용어를 출처에 따라 분류하면 헬라어 명사 ‘다이몬’(a demon, an evil spirit) 계열에서 유래한 것 75회, 명사 ‘프뉴마’(spirit, wind) 계열에서 유래한 것 31회, 이 둘이 함께 쓰인 어휘에서 온 것 1회, 동사의 인칭꼬리를 ‘귀신’으로 풀어서 번역한 것 8회, 대명사를 풀어서 귀신으로 번역한 것 1회, 그리고 헬라어 본문에 없는 것을 번역 과정에서 첨가한 것 1회이다. 명사 ‘다이몬’ 계열에서 유래한 것들을 세분하면, 명사 ‘다이모니온’(a demon, an evil spirit)에서 온 것이 55회로 제일 많고, 그 다음으로 동사 ‘다이모니조마이’(to be possessed by a demon)에서 온 것이 16회이다. 그리고 명사 ‘다이몬’에서 온 것 3회, 형용사 ‘다이모니오데스’(demon-like)에서 온 것이 1회이다. 명사 ‘프뉴마’ 유래한 것들은 동사 ‘프네오’(바람이 불다, 숨을 쉬다)에서 온 것이 1회이고, 나머지는 모두 명사 ‘프뉴마’에서 온 것이다. ‘프뉴마’가 홀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여러 구절에서 ‘아카달톤 프뉴마’(unclean spirit, 마 12:43), ‘프뉴마톤 아카달톤’(unclean spirits, 마 10:1; 행 5:16) 같이 ‘프뉴마’의 앞이나 뒤에 부정적인 수식어가 함께 쓰이고 있다. 한편, ‘다이몬’ 계열과 ‘아카달톤 프뉴마’ 계열은 종종 한 본문 안에서 같은 의미로 함께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7:24-30 본문을 보면, 동일한 대상을 25절에서는 ‘프뉴마 아카달톤’으로 표현하고 있고, 26, 29, 30절에서는 ‘다이모니온’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가복음 8:26-39 본문에서도 동일한 대상을 나타내는데 29a절에서는 ‘프뉴마티 토 아카달토’가, 다른 구절들(27, 29b, 30, 33, 35, 36, 38절)에서는 ‘다이몬’ 계열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구절 외에도 누가복음 4:31-37, 8:26-29 등에서도 같은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토대로 정리하면, 우리말 성경에서 히브리어 ‘쉐드’와 헬라어 ‘다이몬’은 ‘악령’으로 번역하고, 히브리어 ‘루아흐’와 헬라어 ‘프뉴마’가 수식어와 함께 쓰인 경우에는 ‘(어떠어떠한) 영’으로(예. 더러운 영)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면 성경 원어에 담긴 뜻을 살리는 동시에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귀신’ 용어로 말미암아 생기는 혼란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11. 마귀(魔鬼) 한글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마귀’ 용어는 불교 용어인 ‘마’(魔)와 ‘귀’(鬼)가 합해진 말이다. ‘마’(魔)는 산스크리트어 ‘마라’를 음역한 ‘魔羅’(마라)의 줄임말로서 장애자(障碍者), 살자(殺者), 악자(惡者) 등으로 번역되며, 몸과 마음을 요란케 하여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을 말한다. 불경의 한역(漢譯) 초기에는 ‘磨’로 표기했으나 양 나라 무제 때부터 ‘魔’로 표기한다. 불도(佛道) 수행을 방해하는 악한 신을 ‘악마’(惡魔)라 하고, 불도를 방해하는 온갖 번뇌나 나쁜 일을 일컬어 ‘마군’(魔軍)이라고 한다. ‘귀’(鬼)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교의 세계관에서 윤회하는 육도(六道) 중생의 하나인 아귀(餓鬼)를 가리킨다. 산스크리트어 ‘프레타’(아귀)를 한역하면서 불교 경전이 한역되기 이전부터 중국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던 ‘귀신’이란 말에서 차용한 것이다. 한글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에서 ‘마귀’ 용어는 신약성경에만 34회 사용되고 있는데, 모두 ‘헐뜯는’, ‘그릇되게 비난하는’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헬라어 형용사 ‘디아볼로스’에서 온 것이다. 이때 형용사 ‘디아볼로스’는 관사를 동반하여 ‘헐뜯는 자’, ‘그릇되게 비난하는 자’의 뜻으로 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마귀’ 용어와 ‘디아볼로스’ 용어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뜻을 살펴볼 때 ‘마귀’ 용어가 ‘디아볼로스’의 번역어로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와 ‘귀’가 지니고 있는 어감과 ‘디아볼로스’가 지니고 있는 어감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가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개역개정판 신약성경에서 ‘마귀’와 병행하여 사용되고 있는 ‘사탄’ 용어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용어는 개역개정판에 55회(구약 19, 신약 36) 쓰이고 있다. 구약성경의 경우 19회 모두 ‘대적자’(adversary)를 뜻하는 히브리어 ‘사탄’에서 온 것이다. 신약성경의 경우 34회는 히브리어 ‘사탄’의 헬라어 음역인 ‘사타나스’에서 온 것이다. 나머지 2회 가운데 고린도후서 12:7의 것은 히브리어 ‘사탄’의 헬라어 음역인 ‘사탄’에서 온 것이고, 고린도후서 11:15의 것은 11장 14절의 ‘사타나스’를 받는 대명사 ‘아우투’(of him)를 풀어서 번역한 것이다. 그러면 ‘마귀’(디아볼로스)와 ‘사탄’(사탄, 사타나스)은 같은 용어인가, 서로 다른 용어인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성경에서 ‘마귀’와 ‘사탄’의 쓰임새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칠십인역성경(The Septuagint)에서는 히브리어 ‘사탄’을 헬라어 ‘디아볼로스’로 번역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역개정판의 ‘마귀’ 용어는 모두 헬라어 ‘디아볼로스’에서 온 것이다. (2) 신약성경의 한 본문 안에서 ‘사타나스’와 ‘디아볼로스’가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4:1-11(‘예수님의 시험 받으심’)의 경우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1, 5, 8, 11절에서는 ‘디아볼로스’가, 11절의 예수님 말씀에서는 ‘사타나스’가 사용되고 있다. (3) 신약성경 안의 평행 본문에서 ‘사타나스’와 ‘디아볼로스’가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공관복음서의 ‘예수님의 시험 받으심’에 관한 본문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마태복음 4:1, 5, 8, 11과 누가복음 4:2, 3, 5, 13에서는 ‘디아볼로스’가 사용되고 있고, 마태복음 4:11과 마가복음 1:13에서는 ‘사타나스’가 사용되고 있다. 또 예수님께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 그 뜻을 설명하시는 본문 가운데 마가복음 4:15에서는 ‘사타나스’가, 이와 평행구인 누가복음 8:12에서는 ‘디아볼로스’가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쓰임새로 볼 때 ‘마귀’(디아볼로스)와 ‘사탄’(사탄, 사타나스)은 같은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을 토대로 정리하면, 불교적 용어인 ‘마귀’는 헬라어 ‘디아볼로스’의 번역어로 적합하지 않으며, 한글 성경에서 ‘마귀’와 ‘사탄’을 ‘사탄’으로 통일하여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12. 금생, 현세, 내생, 내세 불교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행위(업)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人), 천(天)의 여섯 세계를 돌면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거듭한다고 가르친다. 이 과정에서 지금 살고 있는 생을 금생(今生)이라하고, 이전 생을 전생(前生), 다음 생을 내생(來生)이라고 한다. 또 돌고 도는 세상에 초점을 맞추어,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현세(現世), 이전 세상을 전세(前世), 다음에 올 세상을 내세(來世)라 부르기도 한다. 사람이 이렇게 삼세에 걸쳐 여섯 세계를 돌면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거듭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삼세육도윤회설(三世六道輪回說)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전생, 금생, 내생, 혹은 전세, 현세, 내세라는 용어는 윤회설의 세계관에 관련하여 말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사용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기독교의 세계관에서는 두 세상, 곧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다음에 올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한글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에서는 이 두 세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금생, 현세, 내생, 내세라는 불교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먼저 이 용어들이 개역개정판에 사용된 경우를 살펴보자. 개역개정판에서 이 용어들은 ‘금생’ 1회(딤전 4:8), ‘현세’ 2회(막 10:30; 눅 18:30), ‘내생’ 1회(딤전 4:8), ‘내세’ 3회(막 10:30; 눅 18:30; 히 6:5)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세 구절에서 ‘금생과 내생’(딤전 4:8), ‘현세와 내세’(막 10:30; 눅 18:30)가 짝을 이루며 사용되고 있고, 히브리서 6:5에는 ‘내세’ 용어만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용어별로 살펴보는 것보다 구절별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디모데전서 4:8의 경우, 개역개정판에서는 헬라어 본문 ‘조에스 테스 눈 카이 테스 멜루세스’(life of the present and of the coming)를 “금생과 내생”으로 번역하고 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를 “현세의 생명”, “내세의 생명”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새번역에서는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좋은가는 독자들이 판단할 것이다. 마가복음 10:30과 누가복음 18:30의 경우, 개역개정판에서는 헬라어 본문 ‘토 카이로 투토’(this age)를 “현세”로, ‘토 아이오니 토 엘코메노’(the coming age)를 “내세”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새번역에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공동번역에서는 마가복음 18:30은 개역개정판처럼 “현세”와 “내세”로 번역하고 있으나, 누가복음 18:30에서는 새번역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번역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6:5의 경우, 개역개정판에서는 ‘멜론토스 아이오노스’(of a coming age)를 “내세”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공동번역에서는 이것을 “앞으로 올 세상”으로, 새번역에서는 “장차 올 세상”으로 번역하고 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이 세상’과 ‘다음에 올 세상’, 이 두 세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굳이 불교 윤회설의 용어인 ‘금생’, ‘현세’, ‘내생’, ‘내세’를 끌어다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이 세상’, ‘다음에 올 세상’(또는 ‘오는 세상’)으로 표현해도 성경 본문의 뜻을 전달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13. 논의(論議)
논의’(論議)는 본래 산스크리트어 ‘우파데샤’를 한역한 것으로 ‘경론(經論)의 이치를 분별하여 밝히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일반 사회에서 이 용어는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논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개역개정판에서는 2회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16장 7, 8절에 사용된 ‘논의’는 ‘숙고하다’, ‘고려하다’, ‘논쟁하다’, ‘토론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헬라어 동사 ‘디알로기조마이’에서 온 것이다. 7절에서는 ‘디알로기조마이’의 ‘직설법/미완료/중간태/3인칭/복수’ 형태인 ‘디엘로기존토’(they reasoned)가 쓰이고 있고, 8절에서는 ‘디알로기조마이’의 ‘직설법/현재/중간태/2인칭/복수’ 형태인 ‘디알로기제스테’(reason ye)가 쓰이고 있다. 이 부분을 새번역에서는 두 곳 모두 ‘수군거리다’를 사용하여 번역하고 있다. 공동번역의 경우 7절은 ‘수군거리다’로, 8절은 ‘걱정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마태복음 16:5-12 본문의 상황을 살펴보면 ‘논의하다’보다는 ‘수군거리다’는 번역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고로 마태복음 16:5-12과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 8:14-21에도 같은 헬라어가 사용되고 있다. 즉 마 16:7의 평행구인 막 8:16에는 ‘디엘로기존토’가, 마 16:8의 평행구인 막 8:17에는 ‘디알로기제스테’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개역개정판 역시 ‘논의하다’라는 말 대신 ‘수군거리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번역하고 있다. 14. 대회(大會) ‘대회’라는 용어는 불교에서 ‘설법을 하거나 법회를 열 때 수많은 승려와 신도들이 모인 것’이른다. 즉 불사(佛事)를 위한 큰 모임, 대법회라는 뜻이다. 하지만 일반 사회에서 이 용어는 (1) 많은 사람의 모임, 성대한 회합, (2) (국부적인 모임에 대하여) 전체적인 모임 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개역개정판에서 ‘대회’ 용어는 7회 사용되고 있는데, 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명사들은 ‘집회’, ‘모임’, ‘회합’, ‘회중’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 출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히브리어 ‘아체레트’에서 온 것이 2회(레 23:6; 민 29:35)이고, ‘아차라’(왕하 10:20), ‘카할’(시 35:18), ‘마크헬라’(시 68:26), ‘미크라’(사 1:13)에서 온 것이 각 1회씩이다. 그리고 나머지 1회는 ‘집회’를 뜻하는 ‘케힐라’를 ‘크다’는 뜻의 형용사 ‘가돌’이 뒤에서 수식하는 ‘케힐라 그돌라’를 번역한 것이다(느 5:7). 이들을 새번역에서는 5회를 ‘모임’(레 23:36; 민 29:35), ‘집회’(왕하 10:20), ‘회중’(시 68:26), ‘큰 회중’(시 35:18) 등으로 번역하고, 2회만 ‘대회’로 번역하고 있다(느 5:7; 사 1:13).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축제일’(레 23:36), ‘모임’(민 29:35), ‘성회’(왕하 10:20), ‘회의’(느 5:7), ‘예배 모임’(시 35:18), ‘축제의 마감일’(사 1:13)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대회’ 용어가 개역개정판에는 사용되지 않고 개역성경에만 사용되고 있는 경우는 4회(시 22:25; 40:9, 10; 습 3:18)인데, 이를 개역개정판에서는 ‘큰 회중’(시 22:25), ‘많은 회중’(시 40:9, 10), ‘절기’(습 3:18)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15. 도구(道具) ‘도구’ 용어는 ‘도(道)를 이루는데 사용되는 용구(用具)’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수행자가 수행하는 데 필요로 하는 용구를 일컫는 말이다. 불교 수행자가 소지해야 하는 여섯 가지 도구로 삼의(三衣), 발우, 좌구(坐具), 녹수낭(漉水囊, 물을 길어서 물속의 벌레를 걸러내는 주머니)이 있다. 일반 사회에서 ‘도구’ 용어는 (1) 어떤 일을 할 때 쓰이는 연장(예. 목공도구), (2) 생활 속에 쓰이는 물품(예. 가재도구), (3)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과 방법(예. 선전도구) 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도구’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개역개정판에서 3회 사용하고 있다(창 49:5; 삼하 24:22; 시 7:13). 창세기 49:5의 ‘도구’는 무기의 일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히브리어 명사 ‘메케라’의 ‘여성 복수-3인칭 남성 복수 접미’ 형태인 ‘메케로테헴’을 번역한 것이다. 이를 개역성경에서는 ‘기계’로, 새번역에서는 ‘무기’로 번역하고 있다. 사무엘하 24:22의 ‘마당질하는 도구’는 ‘타작기구’를 일컫는 히브리어 명사 ‘모락’의 ‘관사-남성 복수’형인 ‘함모릭김’을 번역한 것이다. 이를 개역성경에서는 ‘마당질하는 제구(諸具)’로, 새번역에서는 ‘타작기의 판자’로, 공동번역에서는 ‘탈곡기’로 번역하고 있다. 시편 7:13의 ‘죽일 도구’는 히브리어 ‘케레 마웨트’를 번역한 것이다. ‘케레’는 ‘물품’, ‘기구’, ‘용기’ 등을 뜻하는 히브리어 명사 ‘케리’의 ‘남성 복수 연계형’이고, ‘마웨트’는 ‘죽다’는 뜻의 동사 ‘무트’에서 온 남성 단수 명사로서 ‘죽음’을 뜻한다. ‘케레 마웨트’를 개역성경에서는 ‘죽일 기계’로, 새번역에서는 ‘살상 무기’로, 공동번역에서는 ‘죽음의 칼’로 번역하고 있다. 16. 지옥(地獄) ‘지옥’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 ‘나라카’(naraka)를 의역한 것으로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는 사용되지 않던 말이다. 그리고 ‘나라카’를 음역한 것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극한 상황’의 뜻으로 사용되는 ‘나락’(奈落)이다(定方晟, [불교의 우주관] p. 47). 불교의 육도윤회설에서는 생물이 그 행위(업)에 따라 천(天), 인(人),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여섯 세계를 윤회한다고 말한다. 이 윤회하는 여섯 세계 가운데 가장 아래층에 있는 것이 지옥이다. 불교 경전에 따라 지옥의 종류와 형태가 조금씩 다르게 설명되고 있는데, 대체로 장아함경의 설명이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다(오형근, [불교의 영혼과 윤회관] 200). 장아함경에서는 8종류의 대지옥(大地獄)이 있고, 각 대지옥에는 다시 16종류의 소지옥(小地獄)이 있다고 설명한다. 팔대지옥은 죄의 무게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최초의 지옥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죄에 해당되고, 죄가 무거울수록 그 다음의 지옥에 가서 태어나게 되며, 가장 극악한 죄를 지으면 무간지옥에 가서 태어난다고 말한다. 팔대지옥의 기본적인 성격은 다음과 같다(오형근, pp. 201-235). (1) 상지옥(想地獄) 등활지옥(等活地獄)이라고도 하며, 쇠칼처럼 날카로운 손톱으로 서로의 살점을 뜯어내며 죽을 때까지 싸우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찬바람이 휙 불어오면 몸이 처음 상태로 돌아가고 다시 싸우는 것을 반복하게 되는 곳이다. (2) 흑승지옥(黑繩地獄) 뜨겁게 달구어진 철판 위에 죄인의 몸을 펼쳐놓고 묶은 다음 묶인 곳을 따라 몸을 절단하며 고문하는 벌이 반복되는 곳이다. (3) 퇴압지옥(堆壓地獄) 중합지옥(衆合地獄)이라고도 하며, 두 개의 큰 돌로 된 산 가운데 죄인을 놓고 양쪽의 산이 합해지면서 압사 시키는 벌이 반복되는 곳이다. (4) 규환지옥(叫喚地獄) 호규지옥(號叫地獄)이라고도 하며, 쇠로 만든 큰 가마솥에 죄인을 넣어 열탕에 삶고, 또 달구어진 가마솥에 볶는 벌이 반복되는 곳이다. (5) 대규환지옥(大叫喚地獄) 대규지옥(大叫地獄)이라고도 하며, 죄인을 쇠로 만든 큰 가마솥의 열탕에 삶은 다음 쇠로 만든 커다란 독에 넣어 다시 열탕에 삶아내고, 또 다시 작은 가마솥에 삶아내는 벌이 반복되는 곳이다. (6) 소적지옥(燒炙地獄) 염열지옥(炎熱地獄) 또는 (초열지옥(焦熱地獄)이라고도 하며, 죄인을 철(鐵)로 된 성(城) 가운데에 두고 불을 질러 살과 뼈를 태우고, 그 다음에는 차례로 철로 만든 방, 철로 만든 다락, 철로 만든 독, 철로 만든 큰 냄비 등에 가두고 불을 질러 살과 뼈를 태우고 골수까지 태우는 벌이 반복되는 곳이다. (7) 대소적지옥(大燒炙地獄) 대열지옥(大熱地獄) 또는 대초열지옥(大焦熱地獄)이라고도 하며, 소적지옥보다 더욱 강한 화염에 휩싸여 고통을 당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소적지옥의 벌도 받고, 그 외에 대화산(大火山)의 이글거리는 화염 가운데 죄인을 철장에 끼워 올려놓는 벌도 받는다. (8) 무간지옥(無間地獄)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하며, 가장 극악한 죄인이 가는 곳이다. 죄인이 이곳에 도착하면 즉시 살가죽을 모두 벗겨서 이것으로 죄인을 묶는다. 그리고 화차(火車)의 바퀴에 매달아 불로 뜨겁게 달구어진 땅 위로 끌고 다닌다. 그 다음에는 화염에 휩싸인 철로 된 성에 집어넣고 타죽는 고통을 겪게 한다. 또한 무간지옥의 죄인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먹고, 몸으로 접촉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다 악한 것이 되어 고통을 야기한다. 한글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에서 ‘지옥’ 용어는 신약성서에만 13회 사용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12회는 헬라어 명사 ‘게엔나’에서 온 것이다(마 5:22, 29, 30; 10:28; 18:9; 23:15, 33; 막 9:43, 45, 47; 눅 12:5; 약 3:6). ‘게엔나’는 히브리어 ‘게 힌놈’(힌놈의 골짜기, 느 11:30)에서 나온 아람어 ‘게 힌남’을 음역한 것이다.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골짜기인데, 여기서 몰렉에게 희생제물로 어린아이를 불태워 바친 극악한 범죄가 행해지므로(왕하 23:10; 대하 28:3; 33:6) 죄와 공포의 대표적인 곳이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예루살렘 성의 폐기물을 소각하였기 때문에 힌놈의 골짜기는 언제나 불이 타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말미암아 ‘힌놈의 골짜기’(게 힌놈)는 신약 시대에 ‘게엔나’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 ‘게엔나’의 표상은 요한계시록의 ‘유황불 붙는 못’(19:20), ‘불못’(20:14, 15)처럼 불길이 치솟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개역개정판에서 ‘지옥’ 용어가 사용된 나머지 한 곳인 베드로후서 2:4의 “지옥에 던져”는 저주 받은 자들의 거주지 명칭인 헬라어 ‘탈타로스’에서 유래한 동사 ‘탈타로오’의 ‘분사/제1단순과거/능동태/주격/단수/남성’ 형태인 ‘탈타로사스’를 번역한 것이다. 한편, 공동번역에서 ‘지옥’으로 번역된 것들 가운데 19회의 경우 개역개정판의 구약에서는 ‘스올’(민 16:30, 33; 시 86:13; 잠 5:5; 7:27; 15:11, 24; 27:20; 30:16)로, 신약에서는 ‘음부’(마 11:23; 눅 10:15; 계 1:18; 6:8; 20:13, 14), ‘무저갱’(눅 8:31; 계 9:1, 2, 11)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나오는 말 지금까지 ‘한글 성경전서 개역개정판(1998)에 사용된 불교적 용어들’ 가운데 16개 용어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개역개정판 성경은 번역에 있어서 부적합한 면을 적지 않게 드러내고 있다. 몇 개의 불교적 용어를 살펴보았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사용되지 않아도 될 불교적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는 경우, 즉 불교적 용어가 아닌 우리말로 바꾸어 번역해도 성경 본문의 뜻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공양하”다(마 25:44)→‘보살피다’(돌아보다), 금생(딤전 4:8), 현세(막 10:30 등)→‘이 세상’, 내생(딤전 4:8), 내세(막 10:30 등)→‘다음 세상’(오는 세상), “논의”하다(마 16:7, 8) →‘수군거리다’ 등. 이는 개역성경을 일부 수정한 개역개정판의 태생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 용어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드러난 개역개정판의 번역상의 또 다른 문제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 일관성이 유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야하롬’을 번역하면서, 서로 다른 종류의 보석을 가리키는 금강석(겔 28:13)과 홍마노(출 28:18; 39:11)를 섞어 쓰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루어진 부분이 개역개정판 성경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드러난 문제점들 역시 아마도 개역개정판이 지니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개역개정판이 지니고 있는 문제들은 해결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수정 작업이 쉬운 것도 아니고, 또 일부를 수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 현 시대에 맞게 전면적으로 성경을 다시 번역해야 하는 대규모의 작업을 필요로 한다. 개역개정판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 번역을 위해서만 일하는 전문번역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대학에 재직 중인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기존의 번역위원회(혹은 개정위원회) 체제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신학대 교수들에게 성경을 권 별로 분배하여 번역 작업을 하게 한 다음, 종합적인 감수 과정을 거치는 체제에서는 번역의 일관성, 통일성 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문번역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문성과 집중성을 가지고 번역 일에만 전념하게 할 때 보다 훌륭한 한글 성경이 나타날 것이다. (크리스챤신문. 2005.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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