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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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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연재선 목사 |
참고 : | 2009년8월9일 새생명교회 http://nlc1.cafe4.com/ |
교회
출애굽기는 애굽을 떠나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하필 이 시점에 떠나게 하시는 것인가? 좀 일찍 떠날 수도 있고, 좀 늦게 떠날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었는가? 기왕 떠나게 하실 것이면 애굽에 들어와서 자리 잡기 전에 떠나게 하시면 좋지 않았겠는가? 그동안 약 400년 동안을 별 탈 없이 살아왔다. 그렇다면 좀 참다 보면 또 좋은 날이 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세계 경제만 해도 그렇다. 어떤 때는 몹시 어려운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시기를 지나면 또 경제가 회복되곤 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좀 어렵다고 떠날 것이 아니라 좀 더 참고 기다리며 살아가노라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시점에 애굽을 떠나게 하셨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야 하는 근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8)이처럼 애굽을 떠나는 그 근거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것’과 떠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8-39)
이 말씀을 볼 때,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베풀어진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출애굽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로부터 떠나는 ‘구별’인 것이다. 이것을 사도행전에서는 광야교회라고 했다. 이렇게 구별된 자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애굽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세계와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면 애굽이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애굽이란 힘을 중시하는 나라이다.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9)
힘을 중시하는 애굽이란 나라의 왕 바로는 이스라엘이 자기들보다 힘이 강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강성해지지 못하도록 강제노동을 시켜 자기들의 힘을 비축할 국고성을 짓게 했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또한 바로는 산파들에게 명령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를 낳을 때 남자면 죽이고 여자는 살려두도록 했다. 여자는 살려둔다 할지라도 노예나 첩으로 삼으면 금방 애굽 문화에 동화될 수 있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힘으로 유지되는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는 사회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자들의 모임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애굽에서 나올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애굽 사람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눌러 살면 훨씬 편했을 것이다. 광야 같은 어려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나일강의 기름진 땅을 두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 역시 동일하다. 교회의 존재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채 힘을 추구하는 자들로부터의 구별인 것이다.
교회의 타락이란 교회가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인의 수, 교회당의 규모, 헌금의 액수 등으로 교회를 평가하는 것이 곧 애굽적 사고방식인 것이다. 교회는 힘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는 곳이다. 언젠가 있게 될 종말의 약속을 바라보며,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공동체인 것이다. 예수님이 언제 힘으로 결판을 내려고 한 적이 있으셨는가? 오직 십자가의 희생으로서 우리를 세워주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교회는 마땅히 이런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회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17)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21)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약속은 어떠한 장애와 힘에 의해서 중도에 포기되어질 수 없다. 신자가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무지(無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더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이 힘을 중시하다 보니까 비신자(非信者)들은 교회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여 더 힘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약삭빠르게 대처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약속을 중시하시는 하나님’을 ‘힘을 중시하시는 하나님’으로 대치(代置)시켜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교회에서 세상의 힘을 갖게 된 자들이 소위 ‘간증’이란 명목으로 사람들의 힘의 논리로 설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힘이 아닌 십자가를 중심으로 일하신다. 영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 미련을 둘 것이 아니라 그 영원을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안목으로 볼 때, 얼마나 하나님이 힘이 없었으면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 박혀 죽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그런 나약한 신을 믿는다고 하여 세상에 살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 주먹을 믿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지는 않는 것이다. 또한 힘을 중시하는 교인들은 하나님을 세상의 힘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바꾸어 섬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종교생활’을 하지 말고 ‘신앙생활’을 하라. 종교생활은 지배나 과시 등의 힘을 추구하나, 활은 약속을 추구하기에 십자가의 희생으로 그 삶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 2:8-10)
끝없는 족보와 신화 등의 자기 자랑으로 교회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한다. 여자들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교회를 분리시킬 것이 아니라 선행이 있어야 한다. 이 선행이란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증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세상적으로 잘난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당신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시고 인도하시는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은 당신의 그 능력으로 참된 교회로 하여금 약속의 나라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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