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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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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창인 목사 |
참고 : |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오늘 출애굽기 1장 15절에서 22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20절 상반절에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산파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정관사가 중요합니다. 여기 은혜는 히브리 원문 성경에는 헷세드라고 하는데 은혜로 번역을 많이 하는 낱말입니다. 은총으로도 번역하기도 합니다. 또 히브리말 [헨]이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말은 헷세드도 아니고 헨도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야탑]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야탑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잘되게 하다. 혹은 좋게 만들어 주다의 뜻입니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데 은혜를 받으니 부부 사이가 좋아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쁜 관계를 좋은 관계로 만들어 준다는 뜻입니다. 은혜 받으면 부부 사이가 안 좋다가도 좋아지고 은혜를 받으면 아들 딸들이 말썽을 부리고 잘 안되다가도 아들 딸들이 잘되기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좋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쁘게 하다의 뜻도 있습니다. 은혜 받으면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은 산파들에게 은혜를 주어 잘 되게 하고 기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산파들은 어떤 사람인가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I. 남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은혜 (15-16)
모세는 태어나자 석달만에 나일강에 버려지는 운명이 됩니다. 당시는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고 강성해지므로 애굽 왕이 겁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겁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버릴 수가 없으니 갈대상자에 역청을 칠해서 나일강에 버렸습니다. 마침 공주가 나일강으로 목욕하러 나왔습니다. 자기 왕궁에 목욕통이 있을텐데 목욕하러 나온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모세를 발견하고 건져내어 자기 아들을 삼았습니다. 40년 동안 바로의 궁에서 배우고 성장합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 즉 자기 백성들이 고생하는 곳에 가보았더니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을 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을 죽이고 묻어 버렸습니다. 다음날 보니 자기 동족끼리 싸우고 있는지라 모세가 말렸더니 싸우던 사람중의 하나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고 한다며 소리를 지릅니다. 애굽 사람을 죽이고 묻어 버린 일이 들통이 났습니다. 세상에서 숨겨지는 일은 없는가 봅니다.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 해서 시나이반도 미디안 땅으로 도망을 갑니다. 시나이반도 끝에 가서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아가씨들이 양떼를 몰고 옵니다. 이드로라고 하는 제사장에게 아들은 없고, 딸만 일곱인데 딸들이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양떼를 제법 많이 몰고 오더니 물을 길어 이 구유 저 구유에 채우며 아가씨들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는데 남자 목동들이 오더니 아가씨들을 쫓아냅니다. 이를 지켜보던 모세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아가씨들을 도와 남자 목동들을 쫓아내었습니다. 남자 목동들이 자기 양떼들에게 물을 다 먹이고 난 뒤, 이드로의 딸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면 항상 늦게 집에 돌아오곤 하였는데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 왔습니다. 아버지 이드로가 어찌 될 일인지 물었습니다. 그 사연을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이드로가 그러면 집에 데리고 와서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를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모세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드로는 데리고 있으면서 모세를 사위로 삼았습니다. 억울하게 당하는 아가씨들을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장가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울한 사람, 어려움 당하는 사람, 고생하는 사람을 도와주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남은 억울하게 해서도 안되지만 억울한 약자는 반드시 도와주어야 합니다.
본문 15절 16절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 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던 그는 살게 두라" 산파는 남을 도와주는 직업인입니다. 좋은 직업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애굽 왕이 불러 이스라엘 여자들이 아기를 낳을 때 아들을 낳거든 눌러 죽이고 딸을 낳거든 살려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남을 도와주는 직업을 갖고 사는 사람인지라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와주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사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또 산 파 라고 하여 모두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본문을 따라 남을 돕는 자만이 받는 것입니다. 그 산파들에게 베푸신 은혜는 집을 왕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다른 사람을 망치는 일에 가담하지 마시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시고 하나님께 왕성케 하시는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왕성해지고 자손이 왕성해지고 살림이 왕성해지는 히브리 산파들의 은혜가 여러분들의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II. 사람을 살리는 사람에게 은혜 (17-19)
블레셋 왕 아기스의 호의로 시글락 성읍을 근거지로 삼고 살아가던 다윗이 전장에 출진 했다가 돌아와 보니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시글락을 노략하고 사람은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포로로 잡아끌고 갔습니다. 울 기력이 없도록 울고 있던 다윗은 울고 있을 문제가 아니었기에 기도하였습니다. 응답을 받고 추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를 달려가는 중에 소년 하나가 길가에 쓰러져 죽어 가는 것을 발견하고 온갖 도움을 베풀어 살려주었습니다.
그 소년은 아말렉 사람의 종으로 애굽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이 전쟁에 끌고 다니면서 온갖 궂은 일을 다 시키다가 병에 걸려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되어 길가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죽으라고 내버린 주인의 처사는 결국 자기에게 불행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버림받아 죽게 된 소년은 다윗을 만나 삶을 얻었습니다. 다윗을 도와 아말렉 사람들의 진으로 인도하였기에 다윗은 급습하여 승리하고 모든 것을 되찾았습니다. 다윗이 죽을 사람을 살려주고 받은 은혜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이처럼 귀한 일입니다.
17절에서 19절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히브리 산파들은 애굽 왕에게 이스라엘 여자들이 아기를 낳을 때 남자이면 죽일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 산파들의 손에는 엄청난 권세가 있습니다. 죽이고 살리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산파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절대 사람을 줄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입장이 난처해지면서도 내가 죽으면 죽었지 남을 죽일 수는 없다는 겁니다. 애굽 왕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내가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을 때 사람을 살려주는 사람, 이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집을 왕성케 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내가 살려줄 수 있을 때 살려 준 사람들이 곧 히브리 산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은혜 (20- )
경외하다라는 말은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의 뜻입니다. "야레"라고 하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천하 만민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시고도 그 사랑이 남습니다. 우리는 나를 괴롭히는 한사람을 용서해 주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십니다. 가차없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시고 우리 대신에 심판을 받으셨기에 우리는 심판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살인 강도처럼 무서워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무서워 하다의 말은 같아도 개념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불치병에 걸릴가봐 무서워하고 사업하다 망하는 것을 무서워하고 죽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말은 암에 걸려도 사업을 하다가 망해도 죽게 되어도 무섭지 않다는 겁니다. 무섭다면 하나님밖에는 무서운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만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순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천하가 당하지 못합니다. 즉 이런 사람을 가리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경외하는 일이 이만큼 귀합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총칼보다 하나님이 더 무섭다는 겁니다. 총칼을 갖다 댄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을 거슬릴 수 없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애굽 왕의 명령을 거역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자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무서워하는 자는 하나님을 무서워 아니 합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까닭에 순교까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집을 왕성케 하셨습니다.
20절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하나님이 그 집을 왕성케하며 그 집 남편의 믿음 아들 딸들의 믿음이 잘되고 왕성해집니다. 하나님이 그 사업에 은혜를 주시면 그 사업이 왕성합니다. 그 아들 딸들에게 은혜를 주시면 아들 딸들이 왕성해집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무데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고 사람이 알까? 무서워하고 사람이 들을까? 무서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이 안 보이면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사람이 안 보고 모르고 못 듣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아시고 사람이 못 보아도 하나님은 다 보시고 사람이 못 들어도 하나님은 다 듣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을 모르고 사람만 무서워하는 사람은 교회에 10년을 나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왕성케 해 주시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그 집을 왕성케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히브리 산파들입니다. 그들은 남을 도와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힘이 있을 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남을 돕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을 사람을 살려 주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은 복 받을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목숨걸고 순종합니다. 이런 사람의 집을 왕성케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히브리 산파들처럼 믿고 살고 충성해서 왕성케 하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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