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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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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영식 목사 |
참고 : | 2002. 7. 14 비엔나 감리교회 http://www.viennachurch.org |
출1:12-22, 히11:23-29
이스라엘, 모세 그리고 우리
요즘처럼 세계 각지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올라가는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목회하시는 선배 목사님과 통화를 할 기회가 있어서 그쪽의 반응을 여쭤봤더니, 정말 한국인으로서 요즘처럼 기분좋은 때는 없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어디가도 한국인이라고 밝히면 "코리아 최고"라고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응원구호인 "대∼한민국"을 얼마나 정확히 잘 하는지 너무 기분이 좋으시다는 거예요. 그리고 히딩크는 완전히 동화 속의 주인공이 돼서 네덜란드에서는 지금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또 독일과의 4강전에서 우리나라가 졌을 때는 98년 월드컵 때 자기나라가 졌을 때보다 더 슬퍼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 뿐 아니라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 사람을 환대하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이태리, 포르투갈, 스페인만 빼고요.
지난 주 수련회를 다녀오면서 헝가리 국경을 통과했었는데, 국경초소의 군인이 우리 여권을 보더니 또 "코리아! 굿" 그러면서 아주 반갑게 맞아주더라구요. 우리 앞차는 한참이나 걸렸는데 우리 차는 제대로 검사도 안 하고 그냥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참 기분이 좋더라구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고통과 번영의 싸이클은 반복됩니다. 물론 번영의 기간이 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계속적으로 번영을 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 때 몽고는 징기스칸 때 여기 이웃나라 헝가리까지 쳐들어 왔다고 하는데, 지금 세계에서 몽고라는 나라를 주목하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98년도에 IMF 구제금융 사태를 당했을 때, 세계는 물론이고 우리자신조차도 이 세월을 언제 벗어날는지 암울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우리는 IMF를 졸업하고 올해는 월드컵까지 훌륭히 치러냈습니다. 언제까지나 번영이 계속될 수 없고 또한 언제까지나 고통 속에 살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역시 고통의 세월이 있는가 하면 번영의 세월이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역시 고통과 번영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까요? 또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번영을 허락하실까요? 그리고 그 번영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와 모세라는 한 지도자를 선택하셔서 우리 인생들이 최종적으로 가야 할 목적지를 보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야 할 곳과 모세의 할 일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모세는 그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대하고 있는 우리들은, 3,500년 전에 되어진 일들을 지금상황에서 재조명하고 지금의 이스라엘과 지금의 모세가 되어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모세는 사상 최대의 인물이었습니다. 그것은 모세 당시에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는 노예였던 자기백성을 탈출시킨 훌륭한 지도자였고, 하나님만을 믿었던 백절불굴의 신앙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세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께 우리가 어떻게 인도함을 받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도함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지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믿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튼 원치않튼,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흐르는 대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나에 대해서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이 사실은 천지가 개벽해도 붙잡고 늘어져야 할 사실입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습니다. 학자들은 모세의 생애를 크게 세 시대로 나눕니다. 처음 40년, 중간40년, 마지막 40년, 이렇게 구분을 하는데, 첫번째는 애굽생활의 시대, 두번째는 미디안 광야생활 시대, 세번째는 출애굽생활 시대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모세의 이 세 시대를 아주 재미있게 정리를 했습니다.
처음 40년은 바로의 궁중에서 자랐지요? 당시 애굽, 이집트는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그 애굽의 관습과 교육을 받으면서 왕족으로서 아무 부족할 것이 없는 시기였습니다. 이때 모세 자신은 자기를 어떻게 인식했냐하면 "나는 굉장히 잘 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는 겁니다.
두 번째 40년은 미디안 광야 시절인데, 애굽 사람을 죽인 게 들통이 나서 혼자 도망을 가서 이름없는 여인과 결혼해 양을 치고 있던 그 40년입니다. 이때의 자기인식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라고 했을 거라는 겁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영웅으로 살았던 마지막 40년 동안 모세는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그때는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자기를 인식했을 거라는 겁니다.
처음에 모세는 자기가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가 결국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지는 자신을 주님 앞에 겸손히 드렸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 다 늙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구원의 도구로 쓰셨던 것입니다. 사실 무디의 견해가 아니더라도 신앙의 길에 접어든 사람은 누구나 이런 세 단계를 거쳐서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과 모세가 겪었던 각 단계마다의 과정을 자세히 살펴봐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쳐야만 할 길이고, 그 모습을 살피면서 우리는 적어도 이스라엘이나 모세보다는 더 훌륭하게 가야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반복도 더 낳은 모습이어야지 후퇴한 반복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먼저, 어느 민족 누구에게든 번영의 시대가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살던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들자, 요셉의 권고로 그 가족은 모두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몇 명이지요? 가나안에서 떠난 66명과 애굽에 있던 요셉의 가족을 합해 모두 70명이었습니다. 이 70명이 애굽에서 430년을 살면서 엄청난 번영을 이룹니다. 당시 고센 땅에 살던 이스라엘의 인구가 얼마였냐 하면 장정만 60만이라고 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 숫자를 뺀, 남자들만 60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한 가족당 4명 정도만 쳐도 이스라엘의 전체 인구는 250만이나 되었다는 겁니다.
조선초기에 우리나라의 인구는 수백만을 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6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인구는 겨우 10배정도 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인구는 400년 만에 30,000배가 넘게 증가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출애굽기 1:7에 보면 이스라엘의 인구증가를 표현하면서 '번식'이라는 말을 썼는데 번식이라는 말은 원래 곤충이나 동물에게 쓰는 말입니다.
제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원어를 찾아 봤더니 잘못된 번역이 아니라 정확한 번역이었습니다. 번식은 히브리 원어로 '샤라츠'라는 말인데 그것은 개구리나 물고기가 알을 낳아서 번식하는 상황을 묘사할 때 쓰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개구리나 물고기가 한 번 알을 낳을 때 얼마나 많이 낳습니까? 이스라엘은 마치 물고기나 개구리가 번식하듯 그렇게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번영이었습니다.
단지 인구수만 가지고 번영이랄 수 있느냐 물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고대사회의 힘은 어떤 강력한 무기나 고난도의 제조술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만큼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한 나라의 힘은 다름아닌 인구수에 있었습니다. 아직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였기 때문에 평균수명이 50을 넘지 못했던 때입니다. 그러한 때에 인구가 는다는 것은 그만큼 잘 먹고 의술이 발달하고 사회제도가 잘 되어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인구수는 곧 국력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 땅이 아닌 외국 땅에서 그렇게 번영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번영을 허락하신 이유는 뭘까요? 첫째는 그 동안 당했던 고통의 보상입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무대를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하나님의 일가는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아갑니다. 흉년 때문에 온 경제적 고통 뿐 아니라 이러저리 얽힌 인간관계로도 엄청난 고통을 겪습니다. 특히 야곱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들이었습니다. 자식들은 모두 패륜아요, 살인자로서 구제불능의 인간들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형들을 찾아 나섰다가 행방불명이 됩니다. 도저이 살 의욕이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은 그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시고, 그 가족은 요셉 때문에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계속 고통만 받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고통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 고통 속에 뜻이 있기 때문에 고통은 통과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고통은 피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이 고통을 선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야곱의 그 끔찍했던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자 하나님은 야곱과 그 백성들에게 그 고통을 보상하셨습니다. 번영이 찾아 온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 우리가 흘린 눈물을 아십니다. 우리의 괴로웠던 가슴을 아십니다. 어두운 고독의 터널을 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 고통을 선으로 보상하시는 것입니다.
번영을 허락하신 두번째 이유는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하라고 번영을 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번영을 허락하시지만 또 그 개인들을 묶어서 공동체로 만드시고 거기에서 무엇인가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 공동체에 번영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겐 할 일이 있었지요? 옛 이스라엘 민족을 강한 민족으로 키워서 다시 역사의 무대에 내 세우려는 뜻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인류를 위해 할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번영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때 번영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뭘 해야 할까요? 먹고, 즐기고, 놀아야 할까요? 그게 아니라 그 번영의 기간은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 뭔가 준비시키시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과 힘과 도구와 번영으로 어떻게 그것을 쓸 것인가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준비를 하지 않고 그 번영을 누리기만 한다면 그 시간은 오히려 쇠할 준비를 하는 기간으로 변할 지도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이 번영하고 있다면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들어 쓰실 수 있도록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순간에 우리가 준비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번영의 기간에 긴장을 풀지 말고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고, 물질을 아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나설 수 있도록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모세 역시 처음 40년 동안은 번영을 누렸습니다. 애굽공주의 아들로 살면서 애굽의 모든 좋은 것들을 누렸습니다. 당시 사료에 의하면, 애굽왕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공주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뭘까요? 모세는 왕가에서 실제 왕이 되는 훈련을 밟고 있었다는 겁니다. 모세 주변의 모든 게 최고였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누리는 것,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다 최고였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자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친부모님들께 히브리인으로서의 교육 역시 다 받은 것입니다. 자기의 겉은 애굽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내면은 여전히 히브리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처음 40년에 히브리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에게든, 개인에게든 번영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간 너무도 잘 살아오고 있었는데 어느 때에 이르자 상황이 돌변합니다. 요셉을 모르는 왕이 애굽의 새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니까 너무 위협적인 거예요. 그 당시 전쟁이 많았는데 만약 저 민족이 적과 내통해서 자기들의 배후를 친다면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닌 겁니다.
즉시 조치를 취하지요. 목축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과 신전을 짓는데 노예로 삼습니다. 하루 종일 벽돌을 굽고 성을 쌓는 일을 시킵니다. 백성들은 고통과 핍박의 회오리를 만나게 됩니다. 여태까지의 번영은 온데 간데 없고 고통의 시간이 돌아 온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무서운 음모를 꾸밉니다. 산파들을 시켜서 여자아이를 낳거든 그냥 두고 사내아이면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한 산파들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자 그 다음 단계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기를 여자아이는 살려 주겠지만 남자아이를 낳았을 때는 즉시 강물에 버리라고 명령을 합니다. 정말 더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돌아 온 겁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고통이 오지요? 어느 날부터 다가 온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을 때가 있지요?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실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통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계속 번영을 누리고 살았다면 그들은 약속의 땅이요, 자기들이 가야할 땅 가나안은 영영 잊었을 겁니다.
그러나 고통을 받으니까 무슨 생각이 납니까? 조상들이 대대로 유언했던 "너희는 언젠가는 젖과 꿀이 흐르는 우리들의 본토로 돌아가야 해" 말했던 유언을 기억하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시온의 땅에서 다시 한 번 우리를 놀라운 백성으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지' 그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 낸 겁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없고 번영의 세월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우리는 과연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래도 천국에 대한 소망이 간절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지금이 너무 좋은데 가긴 어딜 갑니까? 지금이 더없이 편한데 이곳보다 더 편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통을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은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바로의 궁중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쫓겨 나가게 되지요? 지금도 제가 잊지 못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십계"라는 영화 가운데 주인공인 모세로 분(扮)한 챨톤 헤스톤이 광야에서 양들을 풀어놓고 멍청하게 초점도 없이 어딘가를 보는 모습입니다. 영화의 초입에 신전쌓는 일을 감독하던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없어지고, 거기엔 아주 힘없고 야심도 다 잃은 한 노인이 앉아있엇습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한 노인, 그게 고통 속의 모세의 모습이었습니다.
모세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자기 힘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사는 것도 처가살이를 하면서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더 괴로운 것은 자꾸만 영화(榮華)를 누렸던 바로궁중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이 생각나는 겁니다. 지금의 삶을 보면서 '이건 아니야!' 하면서 고개를 흔들었을 겁니다. 게다가 더 괴로운 건,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던 대로 여호와 하나님이 이제쯤은 나타나셔야 하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계시는 겁니다.
모세의 이 고통이 비단 모세의 것만입니까? 아니지요? 바로 우리들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견뎌야만 합니다. 모세 역시 그 암담한 기간을 견뎌 냈습니다. 일 년, 이 년도 아니고, 십 년 이십 년도 아니고 무려 40년을 기다렸습니다. 지금 고통스러우십니까? 그것은 또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그제서야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면서 그 백성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이 됩니다. 고통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지요? 모난 곳을 깎아 버리지요? 그리고 남을 이해하게 되지요? 그래서 고통은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르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은 절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고통과 번영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번영의 시간은 극히 짧았고, 고통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이 좋았던 시간, 고통의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저처럼 번영은 짧고, 고통은 긴, 그런 세월을 보내셨거나 지금 보내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스라엘과 모세의 이야기로 많은 얘기를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결론은 소박하게 지으려고 합니다. 우리도 모세의 세번째 단계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겁없이 애굽을 탈출해야 합니다. 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고개를 푹 꺾고 맥없이 있는 모세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거기엔 아무도 없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조차도 없습니다. 온 세상 천지에 자기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때까지 모세는 기다렸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기다림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힘이 듭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실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란 말이야? 그때까지의 고통은 어떻하라구? 말은 쉽지만 기약없이 어떻게 버티라구?"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구약 전체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고통과 모든 번영을 다 뭉뚱그려서, 일마다 순간마다 시대마다 하나님 뜻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 8:28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마지막은 반드시 선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두시지 않습니다. 고통을 한없이 겪도록 두시지 않습니다. 번영과 고통의 역사 속에서 결국은 우리들을 선한 데로 이끄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다 잊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만 영원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이 여름에 여러분과 저는, 모세와 이스라엘 그리고 우리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놀라운 일을 다 체험하실 수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들은 눈과 귀를 가지고도 때로는 귀멀고 눈멀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고통과 번영의 시간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괴로워 하거나 그저 희희낙락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 가운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을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좋은 환경이나 재물이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줄 알게 도와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설교에 참고한 자료>
* 두란노 성경 : 하용조
* 성경전서 독일성서공회판 : 대한 기독교서회
* 성서대백과 : 기독지혜사
* 아가페 성경사전 : 아가페
* 위즈덤 종합강해 (2권 출애굽기) : 기독지혜사
* 바클레이 주석 (히브리서) : 바클레이
* 국어 대사전 (성안당) : 남영신
* 성경연구 씨리즈 출애굽기 : 도서출판 바울
* 출애굽기 강해(상) 출애굽의 아침 : 이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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