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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0: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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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우리들의 사명
본문: 행20: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19세기 말엽 미국에는 제임스라는 성을 가진 두 가문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혀 다른 가문의 출신들이었으나 19세기의 미국 사회에서 유명했었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한 가문의 제임스 형제의 이름은 제시와 프랭크였습니다. 종종 그들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보듯이 그들은 금고 털이, 열차 털이 강도로 유명한 총잡이였습니다. 이들 형제가 처음부터 사회의 반항아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남북전쟁에 대한 환멸과 남군의 패배로 인한 사회적 소산이었습니다. 정치적 좌절은 사람으로 하여금 시대의 낙오자가 되게 하든지. 아니면 반항자가 되게 합니다.
또 다른 제임스 형제의 이름은 월리암과 헨리였습니다. 이들은 하버드 대학의 철학 교수로. 또 소설가고 미국인의 가슴속에 지금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지성인들입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었으나 아버지의 유훈만은 잊지 않고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죽더라도 내가 못다 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너희를 보내셨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라.”
그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유훈대로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일처럼 여기며 임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교육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일해야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신앙으로 살아갑니다.(롬 8:28). 그런 사람들은 어떤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희망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롬15:13).
사람은 무엇을 중심으로 사느냐에 따라 4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익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편리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쾌락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사명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명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일평생 살면서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영어로 사명을 'calling'(부름)이나 'mission'(보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심부름에는 심부름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있고, 보낸 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심부름의 목적과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21세기에 한국이란 땅에 심부름하러 보내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이 한국 땅에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라고 보내신 것을 믿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 가장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의 사명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스위스의 사상가 칼 힐티는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날이 언제입니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날입니까? 원하던 대학에 합격한 날입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날입니까? 고시에 합격한 날입니까? 최고의 날은 사명을 자각한 날입니다. 아프리카에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리빙스턴은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실현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거기에 집념이 있고 열의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는 요지부동한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생애를 보세요. 세상에서 큰 봉사를 한 사람들의 일생을 보세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큰일을 하게 했습니까? 그들이 큰 업적을 남긴 비결이 무엇입니까? 불타는 사명감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사람과 사명감 없이 하는 사람의 일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벽돌을 한참 쌓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 교회의 목사님이 공사 현장을 돌보기 위해서 나갔다가 벽돌을 쌓고 있는 기술자에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더운 날씨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랬더니 벽돌 쌓는 기사가 하는 말이 "배운 기술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할 수 있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볼멘 대답을 했습니다. 한참 가다가 저 모퉁이에서 똑같이 벽돌 쌓는 일을 하는 기사에게 "더운 날씨에 수고가 많으십니다"라고 인사했더니 조용한 말로 대답했습니다. "벽돌 쌓는 기술 배웠다가 이렇게 내 손으로 예배당 짓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똑같이 벽돌 쌓는 일을 하지만, 한 사람은 사명감에서 일하고 다른 사람은 사명감 없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벽돌 쌓는 기사뿐만이 아닙니다. 가령 공장에서 일하는 기사들도 그렇습니다. 어떤 기사는 '나는 한국의 산업을 건설하는 사명이 있다. 내가 만든 상품이 세계 시장으로 나가게 되는데 세계에서 제일가는 상품으로 만들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입니다. 사명감으로 일하는 기사입니다. 그러나 사명감이 없이 일하는 기사는 일은 같은 일을 하지만, 할 수 없이 일하고 월급날만 기다리고 퇴근 시간만 기다립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보람도 없습니다.
관청에서 일하는 공무원도 그렇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나는 대한민국을 옳게 봉사하겠다. 내 나라가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고, 친절하고, 질서 있고, 명랑한 나라가 되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사명감이 없이 일하는 공무원은 삯을 위해서 일합니다. 민원서류가 들어와도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가 돈 얼마라도 주어야 결재 서류를 돌리는, 이런 공무원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일을 어떻게 해서든지 되게 하려 하지 않고, 무엇 무엇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일을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쉽습니다. 그러나 안 하려는 공무원이 많으면 그 나라 살림은 말이 아닙니다.
공무원뿐이겠습니까? 가정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가정주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 관리를 내게 맡겨주셨는데, 가족의 건강을 내가 책임지는데, 어떻게 해야 영양에 좋은 음식을 맛있게 해서 잘 먹게 하지?' 하고 늘 생각하고, 빨래를 해도 '우리 식구가 어디 가도 빠지지 않게 깨끗하게 입혀야지' 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하고, 다림질도 성의를 다합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나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 마음에 대견할 수가 없습니다. 식구들이 밖에 나갔을 때 집안 정돈 다 해놓고 기다리다가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맞아들일 때 얼마나 흐뭇합니까? 그런데 사명감이 없는 주부는 일을 하기는 하면서도 기쁨도, 만족도, 행복도 없습니다. 집에서 밥하는 게 귀찮습니다. 그래서 정성 없이 불평, 불만 속에 하다보니까 밥 태우기가 일쑤고 밥한다는 게 죽을 쑤기 쉽습니다. 딴 생각하며 일하다 보니까 찬을 만들면서 칼로 손가락 베기가 쉽습니다. 밥하기가 귀찮다고 밖에 나가 사먹자 하고, 집에서 짜장면 배달해 먹자고 합니다. 세탁기가 있어도 빨래하는 거 싫다고 세탁소에 맡깁니다. 그러니까 이런 주부는 내가 손질한 옷을 식구들이 입을 때 오는 흐뭇한 마음을 알지도 못합니다. 방 청소는 하지 않아 밖에서 돌아오는 식구들이 짜증을 냅니다.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과외활동 한다고 늘 밖에 나가 있어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며 엄마를 찾아도 없으니까 허전해서 밖으로 나갑니다. 집안이 말이 아닙니다. 사명감이 없이 가정생활 하면 가정에 행복이 없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정치인이 사명감을 가지고 정치하면 국민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사명감이 없으면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국민은 도탄 가운데 빠집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사명을 위해 살고 사명을 다하는 데서 보람을 느끼고 사명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사명을 깨달은 사람이 인생의 큰일을 이루고 사명을 깨달은 민족이 놀라운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인생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70년 살고 강건하면 80을 삽니다. 그러다가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갈 때는 이 세상에 살아왔던 보람을 남기고 가야 합니다. 나라를 일으키거나 인류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큰 일이 아니더라도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무엇인가 남기고 가야 합니다. 어떤 이는 훌륭한 생애를 남겨두고 갑니다. 어떤 이는 위대한 인격과 정신을 남겨 놓고 갑니다. 어떤 이는 불후의 명작을 남겨 놓습니다. 어떤 이는 착한 자녀를 남겨 놓습니다. 70년 80년 살다가면서 아무 것도 남겨 놓지 못하고 가면 그것은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개인적인 사명도 중요하지만 민족적인 사명은 더욱 중요합니다. 역사 속에 살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민족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계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민족적인 사명의식을 가지고 늠름하게 살아가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사명감이 투철할 때 약한 사람이 강해지고,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해지고, 거짓된 사람이 성실해지고, 무책임한 사람이 책임 있게 살게 됩니다. 인간은 사명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사명을 자각하고 역사와 민족 앞에 늠름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입니다. 인간은 조국을 선택하는 자유가 없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과거에 사는 민족과 미래에 사는 민족을 구별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사는 민족이 아니고 미래에 사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민족의 자랑을 과거에서 찾지 말고 미래에 창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러운 영광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자주하는 나라, 부강한 사회, 정의로운 국가로 만드는 것이 우리 앞에 놓여진 공동의 책임이요, 과제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자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 각자가 그러한 민족적 사명을 자각하고 공명정대하게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민족의 꿈입니다. 세계화를 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나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요, 우리가 우리 민족을 가장 훌륭한 민족으로 만드는 것이 세계화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새로운 한국인이 됩시다. 희생과 사랑의 봉사를 합시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읍시다.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충성을 다해 일합시다.
한국교회 초기에 전도부인이 있었습니다. 전도부인은 크고 묵직한 가방을 늘 들고 다닙니다. 심방을 하고 난 후 장로님이나 권사님 집에 가선 다짜고짜 쌀독을 열어봅니다. 쌀독에 쌀이 차 있으면 “얼마나 주실래요?”라고 묻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그 큰 가방에 쌀을 채워 넣습니다. 다음은 가난하고 아픈 사람이 있는 집을 심방합니다. 쌀독부터 열어 봅니다. 텅 비어 있으면 심방가방에 채워 온 쌀을 넣어 드립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손수 불을 지펴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식사를 하도록 돌봐 주었습니다. 젊은이에겐 친정어머니처럼, 어르신들에게는 딸처럼 그렇게 온종일 천사처럼 섬깁니다.
또 전도부인은 새벽기도 땐 심방을 다니면서 가슴에 담아 온 기도제목으로 하나님 앞에 눈물로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전도부인의 기도는 이른 새벽부터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어깨를 들썩이며 계속됩니다. 그래서 사랑과 능력을 갖춘 여종으로 성도들의 영성과 돌봄을 사명으로 알고 헌신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충분한 사례를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 당시 목사님들도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전도부인까지 넉넉한 사례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본인은 끼니를 거르고 굶을 때도 많습니다. 흰 저고리에 검은색 치마, 머리는 동백기름을 발라 반듯하게 빗어 비녀를 꽂고, 양을 돌보던 그 전도부인이 지금 있다면 심방을 거부할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사명이 있습니다. 기도할 사명이 있습니다.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하여 우리의 사명을 완수해야 하겠습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9-10)
얼마 전 한 권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통증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런 고백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신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가는 것 같아 죄송할 뿐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사명을 세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첫째, 달려갈 길입니다. 둘째, 주 예수께 받은 것입니다. 셋째는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똑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 전파’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사명이 다른 것 같지만 목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보다 거룩이란 말을 더 좋아하고, 재미보다 사명이라는 말에 더 흥분합니다. 가족이 사명이며, 직장이 사명이고, 교회가 사명입니다. 그곳에 은혜의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달려가고 또 달려갑시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9:16, 17)
우리 모두 사도 바울과 같이 불타는 사명감으로 살아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사명 그리고 각자의 사명을 바로 감당합시다.
* 기도: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삼으신 하나님, 우리가 맛 잃은 소금이 되지 않게 하시고 불꺼진 등잔이 되지 않게 성령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나의 맡은 달란트가 많거나 적거나 간에 성실하게 봉사함으로써 더욱 많은 이윤을 남겨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칭찬받을 수 있는 주의 종이 되게 하소서. 부지런하며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으며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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