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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8:1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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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임덕순 목사 |
참고 : | 2007-07-15 한가람교회 http://www.hankaram.or.kr/ |
판결 흉패
여성들은 남의 옷이나 헤어스타일에 관심이 매우 깊습니다. 옷을 자주 바꾸어 입고 헤어스타일도 바꿉니다. 그리고는 남편한테 “나 달라진 것 없어?”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남자들은 백이면 거의 99명은 몰라봅니다. “응 글쎄 모르겠는데?” 하면 그때부터 남편이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고 짜증냅니다. 아내들이여, 제발 남편들 고문 그만좀 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들은 저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무슨 옷을 입었는가 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아내가 무슨 옷을 입고 머리를 어떻게 했기 때문에 예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내이기에 예쁜 것일 뿐입니다. 다만 자기 아내의 옷이 아니라 마음이 아름답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배우는 부분은 제사장의 복식에 관한 내용인데, 무슨 색 무슨 색 실로 어떻게 꼬아서 무슨 수를 놓고 띠는 어떻게 만들고 어디에 무엇을 받쳐 입고 하는 내용들로서 남자들에게는 정말 시시콜콜하게 느껴지고 불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입히라고 명령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세세하게 명령을 하셨다면, 이 복장은 사회적인 신분이나 계급을 알리는 의미보다 다른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는 매우 중요한 옷입니다.
지난 주일에 생각했던 에봇이라는 겉옷을 복습해 봅시다. 그것은 앞치마와 같은 조끼인데, 앞치마라고도 하기도 어렵고 조끼라고도 하기 어려우니까 ‘에봇’이라고 그냥 원문으로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봇에서 중요한 것은 에봇의 어깨받이입니다. 에봇의 어깨받이에는 호마노라는 보석을 박아서 견장을 달았는데, 거기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각 어깨에 여섯 명씩 도장을 새기듯 새겨 넣게 하셨고,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마다 그 에봇을 입고 나아가도록 하시어, 그들의 이름을 메고 가게 하셨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지요?
첫째는, 죄 지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얹혀 가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영원하신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얹혀서, 그의 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려고 그 어깨 받이를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그 열 두 지파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모든 사람의 이름을 자기 어깨에 메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들만 메고 갔습니다. 그리스도는 열 두 명의 제자들을 기초로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주님이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당신의 어깨에 메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실 것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아닙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께 죄를 맡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되는 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육정도 혈통도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속하는 방법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존재 의미가 있고, 그의 어깨에 있을 때에만 보석같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열두 지파 안에도 들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길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택하신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된 것은 우리가 새로운 열두지파인 교회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지, 우리 개인의 공로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속할 때에만 존귀한 존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귀히 여기고 내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에 단단히 붙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그 에봇의 앞가슴에는 주머니 같은 것을 하나 붙이게 하셨는데, 그것의 이름은 판결흉패입니다. 오늘은 이 판결흉패를 배우겠습니다. 이 판결흉패는 가로 세로가 한 뼘쯤 되는 것인데, 거기에는 열 두 개의 보석을 한 줄에 세 개씩 네 줄로 열 두 개를 물리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12개의 보석이 금 사슬에 매여 대제사장의 가슴에 붙어있습니다. 그것도 아무 보석이나 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보석을 정해진 위치에 달고, 거기에 열두 지파의 이름을 각각 새겨 넣게 하셨습니다.
첫째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인데 스블론, 잇사갈, 유다지파를 새겼고,
둘째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인데 갓, 시므온, 르우벤을 새겼습니다.
세째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인데 베냐민, 므낫세, 에브라임을 새겼고,
네째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입니다. 납달리, 아셀, 단 지파를 새겼습니다.
보석의 이름들이 생소해서 요즈음에는 보석으로 치지 않는 것들로 생각되지만, 홍보석은 루비를 말하고, 홍마노는 다이아몬드이고, 녹주옥은 붉은색 수정입니다. 모두가 진귀한 것으로 당시에 최고의 보석들이었습니다.
이 흉패에 물린 네 줄의 12개 보석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한 지파씩을 상징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어깨에만 이스라엘의 이름들을 얹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도 제사장의 가슴에 안게 하셨습니다. 이 보석들은 구약시대의 열두지파이며, 신약 시대에는 열두 사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교회, 즉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름을 가슴에 안고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에게서 떨어질까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고전 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라고 하였고, 고후 7:1에는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권면하였습니다.
보석들은 흉패에 견고하게 물려 있습니다.
이 보석을 물린 판은 아주 값지고 정성들인 수공예품이며, 아주 견고하게 짜서 거기에 열 두 보석을 아주 견고하게 물렸습니다. 그러므로 보석이 쉽게 떨어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나가다가 길가에 있는 한 아이를 주워서 입양하듯이 그렇게 입양하여 자식을 삼아 주신 것이 아니라, 수 천년동안 예언하시면서 아주 정성스럽게 준비하시고, 당신의 아들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크나 큰 공을 들여 당신의 것을 삼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쉽게 떨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 보석들은 금으로 만든 좌대에 물려 아주 견고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금은 믿음의 상징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가슴에 붙어 있으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항상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우리가 항상 주님의 가슴 안에서 사는 비결입니다. 사람이 자기 혈통이나 공로나 지식으로는 하나님께 속하는 비결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죄인이 하나님께 속할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날마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석입니다.
대제사장의 가슴에 보석을 달고, 그 보석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들로 불리게 하신 것은, 당신이 택하신 이스라엘, 즉 선택받은 신자들을 당신의 보석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눈으로 보실 때 에야 음식 썩은 쓰레기보다도 더 냄새나고 추한 죄인이고, 우리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우리는 구제불능의 죄인이고 스스로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도 하나님은 그런 인생들을 보석처럼 귀하게 여겨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보배로 여겨주시는 하나님만 사랑하는 성도가 됩시다.
이 보석들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고 모두가 다릅니다. 색깔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빛도 다릅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의 가슴에 있는 열두 보석을 하나의 보석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열두개의 특색 있는 색깔과 모양과 빛이 합하여 제사장의 가슴을 빛나게 하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모두 각자의 특색을 지닌 채 아름답게 발전하여 당신의 보석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제각기 자기의 은사와 달란트를 발휘하여 하나님의 교회라는 흉패를 빛나게 하기를 바라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그렇게 귀한 존재로 여기시는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사43:4에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수 없도다.”
우리를 보배처럼 여기신다는 하나님의 표현을 우리는 감사함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원인을 두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공로의 결과입니다. 자기의 아들이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사랑하다가 그들을 위하여 죽은 존재들, 아들의 애틋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석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슴에 달린 보석입니다.
주님의 어깨에 여러분의 이름이 있거니와, 주님의 가슴에서 여러분이 빛나기를 하나님이 바라십니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자랑스러워하시며 대견해하시며, 기뻐하시며 내가 저들을 위해서 죽은 것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충성하는 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보석처럼 삶에서 빛을 발하시기 바랍니다.
왜 제사장의 가슴에 견고하게 달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철저하게 책임지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는 제사장의 가슴에 견고하게 달라고 하시는 것으로 암시할 뿐이지만, 다른 예언서에는 아주 확실하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자가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분명한 약속입니까?
사41:10에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라고 하셨고,
사46:3에는 “야곱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 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 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해주셨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가슴에 품은 것은 무엇입니까?
부모는 자식이 결혼하고 멀리 분가를 해서 나가도 아직도 그 자식이 가슴속에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자식생각 뿐이며,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춥거나 무슨 사고가 났다고 뉴스가 전해지거나 하는 어떤 경우에도 가장먼저 자식을 떠올리고 가슴 두근거리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기르기 위하여 수고의 세월을 살아온 분들이고, 지금도 자식에 대한 염려와 걱정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죽기 까지는 그 걱정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그렇게 당신의 가슴에 품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당신의 어깨에 메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으며, 지금도 그 죄인들을 가슴에 품고 계시며, 하나님의 보좌 바로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께 간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부모가 이 같이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주님은 세상의 부모보다 우리를 더 생각하시고 더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감격하여 그의 서신들마다에서 자기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주안에” “그 안에” 라는 말씀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는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라고 하여 자기 마음 안에도 빌립보교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자기를 품어 주시듯이 바울사도도 빌립보 교인들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여러분도 모든 불안 걱정 다 떨쳐 버리고, 늘 주님의 가슴 안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이웃들을 가슴에 품고, 사랑하는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판결 흉패는 우림과 둠밈을 두는 지갑이었습니다.
흉패는 두 겹으로 짜서 만들었습니다.(16) 겉면에는 열두 보석을 물렸으나, 안감과 겉감 중간에 공간이 있어서 지갑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우림과 둠밈’ 이란 것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가슴의 보석 판을 판결흉패라고도 불렀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우림과 둠밈이 항상 그의 흉패 안에 들어있어야 했습니다(30). 레8:8에도 “흉패를 붙이고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고” 라고 하셨습니다.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은데, 금속이나 보석으로 만든 주사위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용도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일종의 제비뽑는 도구였습니다.
불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였을 때 사울왕은 답답해서 신접한 여인에게 물으러 갔는데, 그때 사울이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 하시므로” 라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삼상30:7절 이하에는 다윗이 하나님께 아말렉 족속을 추격해야 할지를 묻는 내용이 나오는데,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청컨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오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겠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삼상30:7,8) 다윗이 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져다가 하나님의 뜻을 물어달라고 했고 대답을 해 주셨다는 내용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으려고 오면, 자기 품에 있는 흉패에서 우림과 둠밈을 꺼내어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간단히 묻는 방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림과 둠밈이란 “빛과 완전”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두 개인지 하나인지는 모르겠는데, 백성이나 통치자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을 때 대제사장에게 가서 질문을 하면 하나님은 이 우림과 둠밈으로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것이 한 개인데 양면이 있어서 앞면이 나오면 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뒷면이 나오면 가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든지, 아니면 전면에서 어떤 빛이 나와서 분별하게 했든지, 아니면 그것이 두 개여서 우림이 나오면 가고, 둠밈이 나오면 가지 않았던지, 그런 식으로 분별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나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에 말씀이라는 대원칙이 있기는 했지만, 매일 매일의 구체적인 생활에 들어가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물어야 했는데 그것이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있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물었고, 그대로 하기만 하면 항상 안전했고 일이 잘 되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었다기보다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물어서 하는 그들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셔서 그들이 하는 일을 잘 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물어서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가장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생각대로 행동했을 때는 호된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당연히 제사장에게 물었고, 하나님께 묻고서 가는 길만이 빛이요 완전한 길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르는 일을 만날 때마다 제사장에게 와서 물었고, 제사장이 가르쳐주는 대로만 하면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직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물었을 때는 실패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을 때에는 반드시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꼭 물어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 물어서 순종하는 삶에만 빛과 완전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들과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악과 열매 자체가 선과 악을 알도록 지각을 일깨우는 열매가 아니라, 그 열매를 따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선한 사람인지, 거역하는 악한 사람인지를 구분했던 것처럼, 우림과 둠밈도 그것 자체의 마술이 아니라 하나님께 물으려고 제사장에게 와서 묻느냐 묻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빛과 완전한길로 갈 사람과, 인도를 받지 못하고 어둠과 실패의 길로 갈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새 시대를 예고하는 예언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된 모든 신자의 가슴 안에 우림과 둠밈과 같은 역할을 하실 성령을 파송하시어, 그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실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우림과 둠밈이 대제사장에게만 있었지만,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각 사람의 가슴에 내주하셔서 언제 어디서라도 주님의 뜻을 묻기만 하면 언제라도 가르치고 인도해 주실 것을 명확하게 예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빛과 완전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파송 받은 주님의 영이요 제 3위 하나님이십니다. 날마다 성령께 묻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신 요14:26의 말씀대로 날마다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셔서 날마다 빛과 완전한 길로 가게 하실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 주관과 세상의 습관대로 살지 말고 날마다 사건마다 주님께 묻고 성령이 가르치시는 말씀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가므로 빛과 완전한 길로 인도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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