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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피와 구원의 능력

히브리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616 추천 수 0 2012.12.06 12:47:43
.........
성경본문 : 히9:11-1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11.5일 설교 http://dabia.net/xe/619620 

jys.jpg 정용섭 목사

그리스도의 피와 구원의 능력

히브리서 9:11-14, 창조절 열번째 주일, 2012년 11월4일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오늘 설교제목인 “그리스도의 피와 구원의 능력”이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들립니까? 각자 다르게 들릴 겁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감격이 밀려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런 생각이 간혹 왜곡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마술적인 힘이 있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거꾸로 저런 제목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반론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2천년 후의 오늘 대한민국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었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런 문제에 아예 관심이 없을 겁니다. 교회에서 그렇다고 말하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믿을 뿐이지 실제 살아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깁니다. 이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을 보십시오. 지금 대선정국에 들어선 대한민국을 보십시오.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외칩니다. 국민들도 서로 지지하는 후보가 다 다릅니다. 무력만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심정적으로는 서로 원수처럼 비난하기도 합니다. 노동현실, 교육현실도 비슷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그리스도의 피라는 말은 너무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그리스도의 피라는 가르침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마술적인 능력도 아니고, 고대인들의 미숙한 종교심도 아니고, 21세기 현대인의 세계관과 어긋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지켜온 진리입니다. 첨단 문명과 경쟁 만능의 거친 세상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진리입니다. 그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구약의 희생제사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히브리서는 그것을 구약의 희생제사와 연관해서 설명합니다. 12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오늘 설교는 이 한 구절에 대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종류의 피가 나옵니다. 하나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피’입니다. 전자는 짐승의 피고, 후자는 사람인 예수의 피입니다.

 

유대인들의 제사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바치는 품목에 따라서 구분되기도 하고, 제사의 목적에 따라서 구분되기도 합니다. 모든 제사행위의 기초는 희생제사, 또는 번제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리고, 살을 태워서 만든 재를 사람에게 뿌리기도 합니다. 피를 뿌리는 것은 죄에 대한 용서를 가리키고, 짐승의 살을 태우는 것은 그 연기가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뜻입니다. 출 29:20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그 숫양을 잡고 그것의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고...”

 

유대인들이 왜 짐승의 피를 용서의 증거로 삼았는지는 분명합니다. 피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피를 바친다는 것은 곧 생명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피를 대신해서 짐승을 피를 바친 겁니다. 이들의 이런 종교적 전통을 우습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 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인식이자 믿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생명을 생각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옳은 고백이자 통찰입니다. 우리는 생명 앞에서 무기력합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의 생명을 늘릴 수 없습니다. 건강식품과 첨단의 의료기술로도 조금의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부정하다는 인식이자 믿음입니다. 죄에 대한 깊은 통찰입니다. 죄는 생명을 파괴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부정을, 불의를, 즉 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독선적이고, 이기적인지를 생각하면 그들의 주장을 배척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불에 태우면서 자신들의 두 가지 사실을 표현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며, 인간은 피를 바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부패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들 희생제사가 이젠 끝장났다고 말합니다. 짐승을 통한 희생제사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그 종교의식은 매번 반복되어야만 했습니다. 반복해서 짐승의 피를 바쳐야만 했습니다. 거듭해서 속죄의식을 행해야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단번에 모든 희생제사를 끝장낸 희생제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사람의 피가 바쳐졌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차마 사람의 피를 바칠 수가 없어서 짐승의 피를 바친 것입니다. 이제 실제로 사람의 피가 바쳐졌습니다. 더 이상 짐승의 피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속죄를 완전히 끝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단번에’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루터는 ‘ein für alle mal’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모든 경우를 위한 하나’입니다. 유일회적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오직 한 번의 경우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서의 이런 표현이 낯설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의심도 들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이들의 죄를 용서하는 유일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 또는 그건 단순히 교리적인 것이지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요? 이렇게 질문하는 분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줄 수 있는 대답을 제가 안타깝게도 드릴 수 없습니다. 성서기자의 주장과 고백을 여러분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억지로 깨닫고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의 몫입니다. 설교자로서 약간의 보충설명만 하겠습니다.

 

우리는 매월 첫 주일 예배에 성찬예식을 함께 나눕니다. 저는 빵이 예수님의 몸이며,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라고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은 그 말을 들을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제가 교회의식과 전통에 따라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포도주라는 질료는 그대로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래서 그 포도주를 마시는 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성만찬의 신비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이게 믿어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냐고 말입니다. 그것을 억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는 무미건조한 종교의식에 불과합니다. 영적으로 눈이 밝은 사람은 그 사실을 통찰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직 모른다고 해서 그 사실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운명

그리스도의 피가 무엇인지를 더 생각해보십시오. 성찬식 때문에 초기 기독교는 주변으로부터 사람의 피를 실제로 마신다는 오해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와 똑같은 피입니다. 그 피 자체가 무슨 마술적인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성만찬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실제 몸과 실제 피를 먹고 마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곧 그의 운명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아인 퓌어 알레 말) 구속받았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사건, 행위,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운명이 무엇인지는 복음서가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의 운명을 가리켜서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그의 오심, 고난, 십자가, 부활, 승천이 그것입니다. 핵심적으로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 구원의 길이 된다는 것은 말이 사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자체가 주술적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 십자가 죽음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죽고 싶지 않다고 토로하기까지 했습니다. 십자가로 죽은 사람은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에도 두 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고 복음서 기자들이 증언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악의 극단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그것으로 끝났다면 그는 위대한 선지자, 민중해방을 염원했던 극단적인 휴머니스트로 남았을 겁니다. 그 많은 십자가의 죽음 가운데서 유독 예수님의 죽음만이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유일한 사건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부활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따르면 궁극적인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는 손으로 만들어지거나 창조되지 않으신 몸(장막)을 통해서 궁극적인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우리와 똑같은 질료로 구성되었지만, 우리와 달리 피조되신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사도신경은 고대인들의 글쓰기 방식으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니케아 신조는 거기에 덧붙여 명시적으로 “창조되지 않고 나시며...”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곧 그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인류 구원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모든 인물들은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피조물입니다. 그들의 희생은 우리가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가치들이지 절대적인 구원의 길은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지는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부활의 현실성(reality)이십니다. 그분만이 생명의 근원이시고, 피조되지 않으신 분이시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이, 그의 피가 우리를 단번에 구속했다는 말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한다는 뜻입니다(14절).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전통과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짐승을 태운 재를 사람에게 뿌리면 깨끗해지는데, 그리스도의 피야 오죽하겠냐는 것입니다. 죽은 행실은 짐승을 잡아 바치는 희생제사에 속한 모든 것, 즉 종교적인 행위와 윤리 도덕적인,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의 노력들을 가리킵니다. 포악한 것만이 아니라 세련된 삶의 행위, 업적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서 노력을 기울이는 모든 것을 가리켜 히브리서는 ‘죽은 행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은 행실이라는 말은 그것의 결과가 결국 죽음, 또는 허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 죽은 행실은 우리의 양심을 괴롭힙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우리의 양심은 괴롭습니다. 참된 안식이 불가능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아도 괴롭습니다. 그런 인정을 통해서 양심이 만족스러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너, 예쁘게 생겼구나.”하는 동네사람의 말을 듣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사실 한 가지 의미입니다. 악한 행실에 머무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양심은 억압받습니다. 거기서 해방되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을 섬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가 전하는 복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피는, 즉 그의 운명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그의 피를 통해서 모든 죽은 행실, 즉 모든 인간적 업적으로부터 참된 해방을 얻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진리라고 믿습니다. 아멘.


댓글 '1'

니케

2014.10.02 14:09:07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를 속죄케하신 피라는 거지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속죄없이는 나갈 수 없으니깐요.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 죄있는 인간의 모습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속죄물이 필요했고 이것이 예수님의 피로써 우리가 속죄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되겠지요.



한가지 질문이 있는데요,예수님이 최후의 유월절 만찬 이후 '아버지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실 때까지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왜 교회에서는 이를 계속 기념하는 건가요?

그리고 여기서 새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고요?



마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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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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