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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레23:3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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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2.11.18주일 http://dabia.net/xe/623946 |
정용섭 목사
안식과 초막의 삶
레위기 23:33-44, 창조절 열둘째(추수감사절) 주일, 2012년 11월18일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35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36 이레 동안에 너희는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37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열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번제와 소제와 희생제물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드릴지니
38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제물 외에 또 너희의 모든 자원제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
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4 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초막절 이야기
세상의 모든 민족은 각각 고유한 명절을 지킵니다. 우리도 옛날에는 많은 명절을 지켰습니다. 설, 대보름, 단오, 추석 등이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키는 삼대 명절은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과 직접 연관됩니다. 출애굽 당시에 죽음의 천사가 애굽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장자와 집짐승의 맏배를 죽였지만 유대 사람들의 집은 그냥 통과했다(pass over)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유월절은 무교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출애굽 당시에 유대인들이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은 사건에서 유래됩니다. 유월절은 오늘의 태양력으로 대략 4월에 해당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출애굽이라는 정치적 사건만이 아니라 실제로는 농사 절기와도 연관됩니다. 씨를 뿌리는 절기입니다. 기독교와 유월절은 관계가 깊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오셨다가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두 번째로 칠칠절은 유월절로부터 일곱 주간이 지난 다음 날을 가리킵니다. 계산해보면 유월절 후 50일째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밀을 추수하는 절기라고 해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태양력으로 6월경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다고 믿습니다.
세 번째 절기는 초막절입니다. 오늘 제3독서인 요한복음 7장에도 초막절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이런 절기를 지키셨습니다. 초막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오늘 제1독서인 레위기 23:33-44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3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칠일의 축제일 중에서 첫째 날은 성회로, 즉 거룩한 전체 모임으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칠일 동안 제사를 드리고 여덟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기간 중에 화제, 번제, 소제, 희생제물, 전제 등등, 여러 종류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 39-44절에 초막절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전승이 언급됩니다. 3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여기서도 칠일동안 절기를 지키라는 말은 똑같습니다. 다른 점은 앞의 이야기가 주로 제사에 초점이 있다면 뒤의 이야기는 초막절의 역사적 전통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 역사적 전통이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하나는 초막절은 가을 추수가 끝나고 행하는 절기라는 겁니다. 유대력으로 일곱째 달은 태양력으로 9-10월에 해당됩니다. 가을 추수 때입니다. 유월절은 봄 농사와 관계되고, 칠칠절은 여름 추수와, 그리고 초막절은 가을 추수와 관계됩니다. 다른 하나는 조상들이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살았던 40년 광야생활에 근거합니다.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이런 생활을 기억하면서 칠일 동안 초막에 기거해야만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 초막절 절기는 그들과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안식-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초막절의 시작과 끝은 성회입니다. 모두 모여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동을 멈추는 것입니다.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35절과 36절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초막절에 대한 두 번째 전승에 속하는 39절은 그 날에 안식하라고 말합니다. 노동하지 말라는 말이나 안식하라는 말은 똑같은 뜻입니다. 일하지 말고 놀면서 즐거워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게 모든 축제의 본질입니다. 노동하지 말라. 안식하라.
이 명령이 유대인들의 안식일 개념에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이 계명을 주일을 지키라는 말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십계명이 말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곧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것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 곧 주일을 지키라는 명령의 핵심은 말 그대로 안식에 있습니다. 십계명이 형성되던 2천5백 년 전 고대사회에서는 민중들이 매일 생존 투쟁하듯이 살아야만 했습니다. 노동하지 않으면 생존이 위험했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이 더 위험했습니다. 평생 뼈 빠지게 노동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놀랍고도 혁명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라고 한다면 일주일에 하루는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였습니다. 출 20:1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안식을 모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아들과 딸들도 안식일이 없이 매일 노동합니다. 공부가 그들에게는 노동입니다.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가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제일 많습니다. 쉬지 않고 일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그런 것을 부추깁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이 세계에서 가장 분주할 겁니다. 학교를 다녀와서 온갖 종류의 공부를 하러 다니고, 소위 잘나가는 학군에 사는 아이들은 선행학습까지 합니다. 이런 식으로 밀어붙여서 시험 점수를 높일 수는 있겠지만 삶의 질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듭니다. 안식이 없는 사회는 속으로 병들어갈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세상이 다 그렇게 돌아가는데 어쩌란 말이냐, 하고 불편하게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현대 사회 시스템이 무한 경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한 두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인 의지만으로 이 모순을 뚫고 나가기는 어렵습니다. 자기 자식만 공부를 덜 시키고 놀게 할 수 없습니다. 사회 제도와 구조가 달라져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경제적인 수준을 낮춰 잡아야 합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상태에서 잘 사는 나라보다는 모두가 공평하게 조금씩 못사는 나라의 국민들이 더 행복합니다. 폭력적으로 그런 사회를 시도했던 정치제도가 공산주의입니다. 공산주의는 20세기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전 세계가 경쟁 중심의 신자유주의로 치닫고 있습니다. 연봉은 많아졌지만 그게 언제 떨어질지 몰라서 불안해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높아진 연봉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안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 속담에 있듯이 호랑이 등에 올라탔기에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올 수 없는 오늘의 이 사회구조에서 우리 기독교인들만이라도 깨어있는 영성으로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쉼이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하십시오. 성회로 모이고 노동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추수감사절의 예배는 바로 그 사실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먹을거리를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노동을 멈추고 그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거기서만 참된 안식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된 삶에 길들여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초막절을 지키면서 ‘노동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서 생명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동하지 말라는 명령은 결국 생명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를 뚫어보라는 강력한 도전입니다. 고강도의 노동으로 생산성을 높여도 생명 충만감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노동과 생산을 멈추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거기서만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본질적으로 중요한지, 무엇이 허상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주어집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분별력이 점점 깊어집니까? 그런 데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십니까?
초막생활
그런 분별력이 그냥 주어지는 않습니다. 어떤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초막절도 그런 훈련입니다. 초막절에 유대인들은 일주일 동안 초막에서 지내야했습니다. 마치 군인들이 한겨울에 밖에 나가 천막을 치고 혹한기 훈련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축제를 여는 동안 이들은 자기 집이 아니라 야외에서 나무와 잎으로 임시 처소를 마련하고 지내야만 했습니다. 축제 때는 더 쾌적한 곳에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초막절 축제는 그것과 달랐습니다. 오히려 더 불편하게 지냈습니다. 초막생활을 하면서 조상들의 40년 광야생활을 기억하고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불편하게 지낸다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리킵니다.
초막 생활은 사람들로 하여금 문명의 옷을 벗고 자연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낮에는 덮고 밤에는 춥습니다. 아무리 나뭇잎으로 가려도 낮에는 햇빛이 들어오고 잠에는 이슬이나 서리를 피할 수 없습니다. 곤충을 막을 수도 없고, 때로는 짐승의 피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모든 짐승들은 다 이렇게 삽니다. 사람만 특별한 방식으로 집을 짓고 삽니다. 지금도 원시림에서 사는 사람들은 초막에서 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안전한 집을 짓고 삽니다. 대한민국에는 아파트가 특히 많습니다. 제가 잠시 머물렀던 베를린에는 아파트가 별로 없습니다. 독일의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고, 유럽의 대다수 나라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이 좁기도 하지만 아파트의 편리성을 특히 좋아하는 탓에 아파트가 많은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파트의 삶은 일반 주택보다 훨씬 더 자연과 단절된 됩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점점 초막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초막생활에 대한 명령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초막절은 가을 추수를 마치고 축제를 여는 절기입니다. 먹을 것이 지천입니다. 술과 떡도 많습니다. 이럴 때는 아무 생각도 없이 먹고 마시면서 즐기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초막생활을 명령하셨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풍족할수록 더 원초적인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억지로라도 초막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풍요와 쾌락의 달콤함에 취해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초막절에 노동하지 말고 안식하다는 말은 그냥 놀고먹으라는, 그냥 게으름을 피워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초막이 가리키는 원초적 생명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것에 대한 경험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곧 원초적 생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은 모두 초막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늙고 죽습니다. 무덤에 묻히든지 불에 화장됩니다. 우리가 포근하게 생각했던 편리한 집과 문화시설로부터 완전히 단절되고 맙니다. 모든 맛난 것들, 우리를 황홀하게 했던 것들, 강남 스타일의 ‘말춤’도 모두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집니다. 더 근본적으로 보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삶 자체가 초막입니다. 임시 거처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땅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히 13:14). 바울도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진다고 말했습니다(고후 5:1). 평소에는 이런 것을 망각하고 삽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이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 전에, 아직 축제의 삶을 살고 있는 중에 우리는 초막으로 돌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초막으로 돌아가는 훈련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우리가 고대 유대인들처럼 실제로 초막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캠핑을 떠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초막은 원초적 생명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디서 가능할까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은 원초적 생명 사건입니다. 그 사건 앞에서 다른 것들은 모두 물러나야 합니다. 목사라는 직책, 교수와 선생이라는 지위, 젊음과 건강이라는 것도 모두 제외됩니다. 우리가 자랑거리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도 제외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업적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빌 3:8). 초막절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 사실을 실제로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에 좀더 집중하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은 참된 안식과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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