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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3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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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http://www.john316.or.kr |
출애굽기(100) 하나님에 대한 3대 정의
(출 34:1-9)
처음의 돌판은 하나님이 친히 만드셨지만 둘째 돌판은 모세가 직접 다듬어 만들어야 했습니다(1절). 그래서 둘째 돌판은 첫째 돌판보다 신적인 권위는 덜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처음 판에 있던 말’인 십계명을 다시 써주려고 둘째 돌판을 만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은 둘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둘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란 믿음이 굳건하면 위기 중에도 반드시 반전의 기회는 옵니다.
어느 날, 한 아내의 남편이 실직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자녀들은 퇴학당해 여기저기 떠돌며 불량소년으로 자라났습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동반자살을 결심하고 아이들이 자는 틈에 가스 밸브를 열어 놓았습니다. 집안이 가스로 가득 차고 정신이 희미해질 때 바로 옆집의 열린 문틈으로 찬송이 들려왔습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그 찬송을 들으면서 갑자기 그녀의 눈이 달라졌습니다. 근심과 고통만 보였던 그녀의 눈에 하나님이 보이고 미래의 희망과 비전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언뜻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근심을 맡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혼탁한 공기를 몰아냈습니다. 며칠 후 그녀는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유명한 여류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인생도 끝장 난 인생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둘째 기회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입니다.
2.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처럼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4절).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이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했습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6절).” 이 말씀에 나오는 자비, 은혜, 인내, 인자, 진실은 하나님의 대표적인 5대 속성을 잘 보여줍니다.
살면서 어떤 성공을 해도 결코 마음이 높아지지 마십시오. 그 성공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인내와 인자와 진실을 바탕으로 이뤄진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여기저기 다니며 축복 간증을 하는 사람 중에 은근히 자기의 신앙과 믿음을 자랑하는 꼴사나운 간증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는 축복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기적적인 축복을 받거든 대뜸 떠올려야 할 것은 자신의 믿음과 의가 아니라 자신의 죄악된 모습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그런 부작용이 없는 겸손한 신앙 경지로 들어가십시오. 자세히 보면 고난 앞에서도 신앙수준이 갈리지만 축복 앞에서는 신앙수준이 더욱 갈립니다. 축복받고 “내가 잘했으니까.”라고 하면 축복은 곧 안개처럼 사라지지만 그때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라고 하면 그 축복은 견고해집니다.
3.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모세는 하나님이 은혜 주시겠다는 약속에 근거해서 죄 사함과 축복의 중보기도를 했습니다(9절). 그런 약속에 근거한 의인의 기도는 그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약 5:16). 그래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실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불변하지만 하나님의 뜻까지 불변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눈물과 아픔과 기도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자녀가 등을 돌리면 상심하시고 자녀가 뜻을 따르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지만 인간사에 초연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묘사합니다. 질투란 우월한 사람을 시기하고 증오하는 감정인데 하나님보다 우월한 존재가 어디에 있습니까? 결국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만큼 자녀를 사랑한다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에 의해 얼마든지 뜻을 돌이키실 수 있습니다.
초지일관이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길을 초지일관으로 고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때로는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초지일관으로 어떤 뜻만 밀어붙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뜻하셨다가도 회개하면 뜻을 돌이키십니다. 반대로 축복을 약속했어도 불순종하면 약속했던 복을 거두십니다. 중요한 문제는 “선택된 존재냐?”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하는 존재냐?”의 문제입니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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