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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8:3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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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9.26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세상은 우리더러 답이 뭐냐고 묻지만
막8:34-38
하루에 5명이 자살을 합니다. 1년 동안 1만6천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지난주에도 저축은행장이 건물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버렸습니다. 기독교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보니까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성경구절이라면서, 이런 구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막 8:36-37).
얼른 보기에 적절한 구절을 선택한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누군가 자살에 대한 설교를 한다면 이 구절을 설교 본문으로 택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다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제 목숨을 잃으면 그 모든 게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며, 이미 유대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말입니다(시 49:6-8).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의 끝부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오죠.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예수의 말이 바로 이런 구절들과 같은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가 제자들과 무리에게 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을 보면, 예수가 장차 수난받게 될 것을 처음 말했을 때,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항의하기까지 하면서 그가 말하려고 한 것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이례적으로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갑자기 목숨의 소중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을 했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은 분명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겠어요?
그 말씀 바로 앞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이것은 본래 로마군 전투 사령관이 부하들을 격려할 때 사용한 말입니다. 로마군 사령관은, 용감한 자는 승리를 거두어 목숨도 보존하고 명성도 얻게 되지만, 겁이 나서 도망하는 자는 흔히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군 사령관은 자기는 뒤에 서 있으면서 부하들을 앞으로 진격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지만, 예수는 자신이 앞장서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면서 남은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지요. 로마군 사령관이 부하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용감히 싸워 적을 무찌르라는 것이지만, 예수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사랑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로마군 사령관은 생존의 전략을 가르쳐주고 있지만, 예수는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생명의 길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는 짧은 구절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에는 이 부분에 ‘복음’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아마도 원래적 형태는 “나를 위하여”일 것입니다. 이는 초대교회 사람들이 무엇을 삶의 목표로 삼았는지 보여주는 것이죠.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이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들만을 위하여, 그저 생존을 위하여 살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 개인의 부귀영화라든지, 출세, 그런 것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건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진정한 삶은, 자기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생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누구를 위해 사느냐가 중요하던 때입니다.
바로 이 구절 다음에,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구절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죠? 예수는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 그들에게 선포한 다음에, 이런 삶을 살지 못한다면, 이 세상의 부와 권력을 다 얻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목숨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지만, 어떻게든 생존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진정한 삶을 누리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초대교회는, 그들이 “예수를 위하여” 살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어떤 부귀영화를 누려도 그것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를 위하여”라는 구절을 쉽게 “교회를 위하여”로 해석해버립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라고 몰래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본래의 의미는 퇴색됩니다. 본래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난 그 사랑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목숨이 붙어 있어도 잃은 것임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목숨의 개념, 사는 것의 개념이 새롭게 바뀌죠.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숨을 쉬거나 맥박이 뛰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위하여”, 조금 더 확대해석한다면, “누군가를 위하여” 살고 있는가가 ‘살았는지’ 또는 ‘죽었는지’의 판단 기준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구절은 자살을 막는 데 도움이 됩니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흔히 생각하듯이, 목숨이 소중하니까 자살해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구절이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새롭고도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몰라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삶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임을 알고, 자기도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천하를 얻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로 치는 것이니까요. 그런 말씀입니다.
엔도오 슈우사쿠(遠藤周作)의 책 『나의 예수』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2차 대전 당시 한 폴란드인 신부는 일본에서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기부금을 얻으러 고국에 들어갔다가 나치에게 붙잡혀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거의 굶다시피 하면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탈출자가 속출했는데, 수용소 당국은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탈출자가 잡히면 그 수만큼 한 방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는 방법까지 사용했습니다. 어느 날 점호시간에 나치 장교가 탈출하다 잡힌 사람들을 세워놓고 사형을 선고하고 있었습니다. 사형 방법은 감방에 가두어놓고 굶겨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잡혀온 사람 가운데는 비교적 나이가 젊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바로 그때 뒷줄에 서 있던 폴란드 신부가 한발 성큼 나서면서 나치 장교에게 청하였습니다.
“내가 그 사람 대신에 죽었으면 합니다. 나는 카톨릭 신부이기 때문에 처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죽더라도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퍼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아내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 대신 죽는 게 낫겠습니다.”
짐승 같은 나치 장교도 할 말을 잃은 듯했고, 잠시 후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젊은 사람은 살고 신부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는 오래오래 장수를 누리는 복은 얻지 못했지만, 예수가 말한 바, 온 세상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그 소중한 목숨을 얻었다 할 것입니다. 그를 사형 집행한 나치 장교는 그 후로 오래오래 살았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짐승의 삶이지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근거하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런 삶의 방식과 가치를 받아들여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신부의 희생의 대가로 살아나게 된 그 젊은이 입니다. 그는 그 후로 아내도 만나고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이미 그 자신의 것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평생 그 신부의 희생과 사랑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에게서 진정한 삶은, 그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 신부처럼 자기도 또 그 누군가를 위해 자기 삶을 바치는 것이 되지 않았겠어요? 만약 그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것입니다. 그에게 아무리 큰 슬픔이나 고난이 닥쳐온다 해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은 그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은 것이며, 또 다시 누군가를 위해서 바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살을 할 수 없다’고 말들 합니다. 그 이유는 지옥에 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타인을 설득하기엔 부족한 답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경우, 내 삶이 이미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진 나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사나 죽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의 사정이야 얼마나 절박하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 사정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살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일제치하나 6.25전쟁 직후에도 지금같이 자살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선진국일수록 자살률이 더 높습니다. 그것은 꼭 가난이나 고통의 문제는 아닙니다. 삶의 의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사랑과 희생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임을, 내 삶은 또 다른 그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삶의 의미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저 폴란드 신부처럼 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 의해서 살아난 그 젊은이의 자리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이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많은 이 세상이, 지금 우리에게 ‘왜 사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뭐가 진정한 삶이냐고 묻고 있는데, 죽지 말고 살아야 되는 이유가 뭐냐고 묻고 있는데, 그걸 좀 가르쳐 달라고 하고 있는데, 기독교는 그 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겨우 하는 말은 ‘그러면 지옥에 가기 때문’이라는 옹색한 답만 내고 있습니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답인 것을 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왜 죽지 말고 살아야 하는지’ 기독교인 스스로도 알지 못합니다.
왜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너무 먼 곳에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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