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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2: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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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10.5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나는.....하기 위해서 왔다.
막 2:15-17
율법학자들은 일반인들이 가까이 하기 싫은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만 서면 누구나 오므라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데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분 앞에만 서면 편안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커지게 만듭니다. 바로 그런 두 부류의 인간군, 사람을 왜소하게 하는 집단의 대표와, 어떤 사람이던지, 그가 설령 종교적으로 비난을 받던지, 윤리적으로 돌 맞아 죽을 사람일지라도 그 앞에만 서면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쳐다보게 하는 두 편의 사람들이 벌인 논쟁인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15절).
우리는 흔히 이 구절에서 음식을 먹은 사실 자체를 너무 강조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일의 의미를 그저 밥 한 끼 같이 먹은 것 정도로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 같이 음식이 흔하고 식당에서 식탁에 마주앉아 밥 한 끼 먹는 일이 흔한 세상에서는 그것은 더욱더 예수께서 하신 일의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그저 밥 한 끼 같이 먹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라고 번역된 ‘카타케이마이’(katakeimai)는 본래 ‘비스듬히 눕는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그런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이 단어는 ‘식사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음식을 먹는다는 뜻으로는 ‘에스티오’(esthio)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카타케이마이’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 거죠. 그것은 그저 밥만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기대면서 얘기도 나누는 아주 친밀한 친교를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한 자리에 있었다”라고 번역된 ‘쉬나나케이마이’(synanakeimai)도, ‘카타케이마이’와 같이 ‘케이마이’(keimai=기댄다)를 어원으로 하는 단어이며, 식사를 하기 위해서 함께 기대고 앉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본래는 이렇게 서로 ‘기댄다’는 의미가 중요했는데, 나중에는 이 의미는 빠져버리고 ‘먹는다’는 의미만 남은 것이죠.
노숙자에게 무료 급식을 하는 사람이 식판에 밥을 퍼서 그들에게 주기는 쉽겠지만 그들과 식탁에 마주앉아 먹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과 서로 기대고 누워서 얘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이 아니겠습니까? 먹는 것과 기대는 것의 차이는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주어로 하고 있는 ‘카타케이마이’와는 달리 ‘쉬나나케이마이’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주어로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따라왔다”는 말이 따라 나옵니다. 이것은 그 자리에 세리와 죄인들이 그저 수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흔히 우리는 세리와 죄인들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율법학자들의 눈치만 보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집은 문맥상으로 보면 세리 레위의 집으로 되어 있죠. 세리의 집에 세리들이 왔으니 그렇게 풀이 죽을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를 보려고 나무 위에까지 올라가는 적극성을 보였겠어요. 마찬가지로 이 집에 모인 세리들도,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자기들을 편견 없이 대해주는 예수를 만나고 싶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을 수도 있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그 자리에 나온 것일까요?. 그저 밥 한 끼 먹으려고 그랬겠어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잘 났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사람 취급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말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만나면 빈정대고 깔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빈정대기는커녕 그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고 높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그들인데도 예수님은 그들 더러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예수를 만나려고 나온 것입니다. 밥 한 끼 얻어먹으려고 나온 게 아닙니다. 와서 하소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하고, 좀 기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라는 구절이 갖는 뉘앙스도 달라지죠.
본래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와’나 ‘과’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격을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여격은 본래 ‘……에게’라는 의미인데 문맥에 따라 ‘……와’(with)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같이 밥을 먹은 것을 강조하려면 후자를 선택해야겠지만, 기댔다는 것을 강조하려면 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함께 기대고 있었다’는 뜻이 되는 거죠? 우리는 이 구절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그저 예수와 밥 한 끼 같이 먹는 모습이 아니라 그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친교를 나누는 정겨운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본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하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그 말을 듣고 즉시 대답을 합니다. 여기서 참 어색한 것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논쟁은 율법학자들과 예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예수에게 직접 묻지 않고 제자들에게 묻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예수께 직접 말할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신분이 상당히 높았는데 사회적으로 이렇다 할 지위를 갖지 않았던 예수에게 그렇게 조심했을 리가 없었어요. 이런 식으로 서술한 곳은 이 곳 말고도 많습니다(막 2:6-9, 18-28 등등). 그것은 아마도 예수가 높임을 받은 초대교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높이니까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상황이 이렇게 예수를 높이는 상황이었음을 생각할 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에게 와서 기대고 몸을 부딪치면서 식사를 하는 장면을 그렇게 조금도 감추지 않고 보도한 것은 더욱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그 장면이 그 정도로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생애에서 중요한 일이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대답한다(17절).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주어로 해서 “나는 ……하기 위해서 왔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막 10:45 외에는 이 곳 밖에 없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을 불러서 그들과 함께 기대고 앉는 것, 그리고 더불어 먹는 것 이것이 예수의 중요한 사명이요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기댈 대가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나 기대라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는 곳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군대엘 가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신병 훈련소를 가기 전에 꼭 거쳐야 하는 ‘신검교육대’를 3년 동안 3번이나 갖다왔습니다. 한 번 가면 열흘씩은 있었지요. 거기서는 모두 ‘장정’이라고 부릅니다. 그 짧은 기간임에도 논산 훈련소, 신검대의 삶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남들은 3일 만에 훈련소로 나가는데, 몇 기가 들어왔다가 나가도록 신검대에 있어야 하는 내 처지는 불쌍했습니다. 제가 그곳에 있는 동안 서 너 번 주일을 지나야 했습니다. 처량하고, 자신이 측은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주일날 교회를 가면 뭔가 기댈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도 조금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가기를 자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줄을 맞추어서 신검대 안에 있는 훈련소 군인교회로 갔습니다. 예배가 어떠했는지 무슨 설교를 듣고 찬송을 불렀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난 다만 처음 경험하는 그 살벌한 위계질서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곳의 목사도 군인이겠지만 그래도 주님 안에서 같은 형제로서 뭔가를 느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예배는 상당히 형식적인 것이었고, 마치고는 다시 줄을 맞추어서 돌아오는 것뿐이었습니다. 나는 뭔가 기대감을 가지고, 친근한 감정으로 상병 계급장을 단 훈련 조교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난 그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에 친근감을 느끼면서 뭐라고 대답을 해 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내리깔고 날 힐끗 보더니 상대도 하지 않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는 상병이고 나는 그저 장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웬 정신 나간 녀석이 장군과 맞먹는다는 조교에게 함부로 말을 걸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때 난 그와 나는 같은 주님의 자녀나 형제가 아니라 계급이 다른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훈련 조교이고 난 계급도 없는 장정이고, 그는 말끔하게 군복을 입은 ‘정식 인간’이고 난 군대에 왔지만 계급도 없고, 군복도 아닌 사복을 입은 이상한 놈이었습니다. 그가 그저 내 이야기를 몇 초라도 들어주었거나, 나를 보고 한번 싱긋 웃어주었다면, 아니면 나를 한번 툭 쳐 주었다면, 난 그에게서 형제애를 느끼고 그곳이 하나님의 집임을 절실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에게서 내가 기댈 데라곤 없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크리스천은 어떠합니까? 누가 와서 기댈 만합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쉼과 안식과 위로를 기대하고 기대려고 합니까? 어쩌면 오늘날의 교회와 교우들은 세상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이기는 커녕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도가니라는 영화가 요즘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교회의 장로입니다. 그것을 방조하고 비호하는 세력이 목사와 교회입니다. 한마디로 사람 속에 썩은 정신을 집어넣어 사람의 삶을 썩게 만든 게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가니’라는 사건의 중심에 붉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살리는 십자가가 아니라 욕망과 탐욕의 십자가였습니다.
지난주에, 춘천 근교의 작은 교회에서 농사도 지으며 목회를 하는 후배 목사가 전화를 했습니다. 18년 된 자동차가 완전히 망가져서 버렸답니다. 차 없이 한 달을 살아 보았더니, 거의 원시인처럼 된다는 겁니다. 몇 명 안 되는 교우들과 60개월 할부로 봉고차를 구입하려고 계획을 했는데, 막상 차를 가져오려니 첫 회 보험료며 세금문제가 생기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부탁이지만 ‘허 목사님이 어떻게 조금 도와주시라’는 거였습니다. 그의 부인은 몇 년 전 엠마오에 와서야 1년 만에 따뜻한 물에 목욕을 했다고 하던 그분입니다.
지방도 같지 않고, 연배도 틀린 그가 내게 그런 부탁을 할 정도면, 오죽 기댈 대가 없으면 내게까지 그런 부탁을 하나 싶었습니다. 퍼뜩, ‘나는....하러 세상에 왔다’는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 ‘도가니’를 통해 마음이 허물어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말씀과 후배 목사의 청으로 인해 ‘내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새살처럼 돋아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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