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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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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10.23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예수가 마음에 새겨진 사람
막14:3-9
성서가 말해주는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고 싶어 하는 분이십니다.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이스라엘을 구해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자신이 우리에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계시해 주시면서,“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고 하셨어요(출 3:15). 전도서 기자는, 인간이 하는 모든 일들이 부질없는 일들이라고 말한 다음에, 이렇게 말하죠.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부서지고, 샘에서 물 뜨는 물동이가 깨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전 12:1-7).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면서,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하셨지요(눅 22:19). 이것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성만찬 제정사 에서도 나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고전 11:24-25). <개역>성서에서는“기념하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기념이라고 하면 기념비나 기념품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기억나게 하는 물건을 뜻합니다. 그러나 고전 11장 본문에서 사용된 anamesis라는 단어는 기념보다는 기억에 더 가깝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과거 일을 오늘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삶을 지금 내가 기억하면서 그 삶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우들은 예수의 말씀과 그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후서 기자는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가 머지않았음을 알고서, 자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교우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기억하게 하려고 베드로후서를 쓴다고 했습니다(벧후 1:15). 그는 예언서의 말씀과,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주신 계명들을 교우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려고 한다는 거십니다(벧후 3:2). 유다서 기자도 자신이 유다서를 쓰는 목적은 출애굽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을 기억하게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유 1:15-17).
교회, 예수믿음, 신앙, 직분, 성령 충만, 기적 들은 이 두 가지 사실을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는 ‘예수를 기억’하라는 것과, 예수님은 사람들이 '예수를 기억해 주는 것'을 가장 바란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기억하지 않는 것은 모두 예수 밖에 있는 것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은 에수를 잘 기억하므로 칭찬이 되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이란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자신의 마음에 새긴 사람으로 이 여인을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막 14:9).
예수를 잘 기억하고 있는 한 여인을 모범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노동자 열 달 품삯에 해당하는 비싼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와서,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여인이 왜 그렇게 했는지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장례를 예비하여 그 여인이 그렇게 했다고 설명했는데(9절),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설명이 그 여인을 방어해 주려고 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본래 그 여자의 뜻은 다른 데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여자는 본문에서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로 되어 있습니다(요 12:3). 누가복음에서는 조금 다른 배경이긴 하지만 옥합을 가져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여인을 동네에서 알려진 죄 많은 여인―아마도 창녀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눅 7:37-38). 이런 구절들을 근거로 하여 이 여인을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 마리아로 보기도 합니다(찬송가 346장,“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또 그가 죄인이든 아니든 간에, 그 여인은 예수를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그를 위하여 뭔가 멋진 일을 해 드리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께서 곧 고난당하실 것을 알고서, 아직 살아 계실 때에 그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하고 싶어서, 향유를 예수께 부은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화를 낸 것으로 봐서, 그런 행동은 상식적인 것이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그것은 어떤‘이벤트’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몇 백만 원이 나가는 값비싼 향유를 한 번에 써버리는, 주위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함으로써, 예수를 가장 영화롭게 하고 가장 극적으로 높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그 여자가 공연한 낭비를 했다고 화를 낸 것은, 그 여자의 그런 뜻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예수는 그 여자의 그런 마음을 알기에, 그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고 하고,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칭찬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어서 가장 큰 축복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그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가 값비싼 향유를 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에게 그 여인은 기억되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이와 같은 큰 칭찬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가 기억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유명한 여자도 아니고, 오히려 죄인일 수 있고, 쓸데없는 낭비를 하고 있는 여자가, 복음과 함께 기억이 되리라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가장 큰 축복의 말씀은 그 사람이 오래도록 기억이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기억되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새긴 게 아니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가장 무서운 벌이 뭔지 아세요? 잊혀 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어느 거리에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욥 18:17, 24:20; 신 7:24, 29:20, 32:26).
“의인은 칭찬을 받으며 기억되지만, 악인은 그 이름마저 기억에서 사라진다”(잠 10:7).
“주께서 그들을 벌하시어 멸망시키시고, 그들을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게 하셨으니, 죽은 그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사망한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사 26:14).
마지막 구절에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그들을 기억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납니다. 예수를 기억하고 순간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부활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에 대한 기억이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예수께 옥합을 깨뜨린 그 아름다운 일은, 오늘날 그 여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 그 여인이 기억되는 곳에서는, 오늘 우리들의 이름도 기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어디에 기억되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어디에 기억해야 하는 걸까요? 머리 즉 [뇌]일까요?
현대의학에서는 기억이란 오관을 통하여 받아들인 정보가 뇌의 어느 일정한 부위에 저장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부위가 손상을 입으면 기억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이것을 국소 이론(localization theory)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스텐퍼드대학의 신경외과 의사 칼 프리브람(Karl Pribram)은 15년간이나 기억의 문제를 연구한 결과, 뇌생리학에서 흔히 알려져 있는 기억을 담당하는 대뇌피질의 측두엽과 해마가 90%나 손상되어도 기억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따라서 기억이란 뇌의 어느 부위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기억이란 일종의 의식체이며 이 의식체는 다양한 파동(wave)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이터베이스(database)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양자의학에서 기억의 저장소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 누군가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존재이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예수를 기억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향유를 부은 여인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야말로 나를 기억하고 사는 사람의 예표다. 이 여인을 기억할 때마다, 너희들도 아름다운 기억의 주인공이 되어라. 그래서 너희의 무의식과 유전자 속에 내가 기록되고 내가 주는 행복이 새겨지게 하여라.”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 진 것은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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