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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2:3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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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11.13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다른 교회에는 없으나’ [우리 교회에는 있는 것]
마12:38-42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들이 하지 않는 것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남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는 몇 가지에 관한 문제만은 아닙니다. 좀 더 신중하게 말하면, 예수님과 성서의 말씀을 해석하는 차이에서 오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다른 교회는 하고 있지만 우리 교회는 하지 않는 것의 몇 가지는 금요 철야, 헌신 예배, 수능 기도회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우리는 다 안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해야 할 것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남들은 하지만 우리교회가 안 하는 것을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소홀이 여기는 그것을 우리는 믿음과 삶의 우선원칙으로 하고 있음을 짚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등장하여 예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표적(semeion)이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놀라운 기적을 말합니다. 예수는 그들을“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비판하시고서, 그들에게 보여줄 것이라고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고 하시죠.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그들을 회개하게 한 것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신 것을 미리 보여주는 표적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는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았으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거부한 것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지요. 그래서 이방 백성인 니느웨 백성들이 심판 날에“이 세대”즉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솔로몬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방 여왕이 그를 존경하여 찾아오기까지 했으나, 심판 날에는 이방 여왕이 솔로몬의 후예인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요나와 솔로몬을 내세우셨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오히려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서론에 불과합니다. 본론은 41절과 42절의 맨 끝에 나옵니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표적을 구하던 그들은 예수의 입에서 예언자 요나와 솔로몬 왕의 이름이 나와서 안심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는 폭탄선언과도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이런 말씀에서 신성모독과 같은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시골 출신의 청년에 불과한 예수를 어떻게 감히 예언자 요나나 솔로몬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들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요 4:12에는, 수가성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가 나오죠.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했을 때, 그 여인은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 여인은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물 좀 달라고 하는 예수가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들에게 율법을 준 모세와, 요나와 같은 예언자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 같은 훌륭한 왕들을 존경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권위의 상징인 성전을 가장 높이 떠받들었습니다.
이런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당연히 여기는 상식과 같아서 초대교회에서도 이런 전통을 일부 수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의 처음에 예수의 족보가 나오는 것은 예수님이 다윗과 솔로몬의 후손이라는 점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오리라고 믿었는데,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주“다윗의 자손”으로 불립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를 모세와 비슷하게 그리려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예수도 모세처럼 왕의 유아 살해 분위기에서 살아났고, 모세처럼 이집트로 들어갔다가 탈출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모세처럼 예수도 산 위에서 가르치시며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십니다.
만약 초대교회가 여기에서 멈추었다면 그들은 유대교의 아류로 전락하고 기독교는 탄생하지 않았겠죠.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잘 나타나듯이, 초대 기독교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요나가 위대하다 하여도,“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아무리 솔로몬이 위대하다 하여도,“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 그들은 크게 외쳤습니다.
아무리 모세가 위대해도 예수는 모세보다 더 큰 이십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6개의 반제들을 보면,“옛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하는 말씀으로 모세가 말한 율법을 새로운 권위로 재해석하십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유대교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장 맨 앞에 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일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이 벌어지죠. 예수는 다윗과 일행이 굶주렸을 때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빵을 먹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 12:6)
이 말은“다윗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는 뜻도 함축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새로운 의식이 복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도 아니고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고 갈릴리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의식, 신앙 인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다들 모세와 예언자, 다윗과 솔로몬만을 높이고, 성전만을 떠받들면서 살아가는데, 그 성전 지배 체제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떠받들면서 그들 앞에 납작 엎드리고 살아가는데, 시골 출신의 작은 무리들이,“모세보다 큰 이”,“요나보다 큰 이”,“솔로몬보다 큰 이”,“다윗보다 큰 이”,“성전보다 큰 이가 여기 있다!”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위대한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많이 배우죠. 예전에는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세종대왕 ... 대개 장군들과 왕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스티븐 잡스, 안철수, 박경철 뭐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작은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이름을 내는,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꼴찌보다는 1등이 좋다’입니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가 표적만을 구하면서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만을 바라보듯이, 오늘날 크리스천들도 말은 주님을 높이지만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늘 솔로몬 같은 지혜를 달라고 하고, 다윗과 같은 믿음을 달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런 왕과 같은 권력과 부귀를 누리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도사리고 있는 거죠. 그러는 한, 아무리 입으로 주님을 외쳐도, 절대로 예수는 다윗보다 큰 이가 되지 못하고 솔로몬보다 큰 이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들에 핀 백합화 하나를 보고 솔로몬의 화려함은 저 들꽃 하나만도 못하다고 크게 외치신 예수님은 우리와 상관없는 분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게 됩니다. 수능이 가까워지면서 절간이건 교회건 [수능 100일 기도]를 합니다. 그 속셈은 뭐죠?
오늘날 사람들은 저마다 다윗과 솔로몬이 되려고 하고, 자기가 더 큰 사람이라고 주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로 신자들이 자신들을“작은 사람들” 또는“지극히 작은 사람들”이라고 전문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 18:1 이하에서, 제자들은 예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시고서 그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며 또 그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지극히 작은 사람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존재와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또 마 25장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도 인자는 지극히 작은 사람들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요, 지극히 작은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면서, 지극히 작은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가장 크신 이가 하시는 일입니다. 그걸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믿음의 근거는 이것입니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에게서 가장 큰 사람은 모세나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뭔가 대단한 사람이죠. 그러나 예수에게서는 이 기준이 역전됩니다. 역사책에 나오는 그런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바로 내 곁에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즉 가장 작은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늘 솔로몬과 다윗왕의 영광을 내세우면서 작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정죄하였습니다. 로마의 외국 군대와 황제의 부하들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온갖 아부를 하고 협력을 하면서도, 약한 백성들에게는 군림을 하려고 하고, 입만 열면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을 말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그들에게서 어떠한 희망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들은 절대로 가장 큰 이도 아니었고 본받을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알았습니다, 가장 큰 이는 뜻밖에도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갈릴리 출신이라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던 사람, 늘 그들과 함께하신 예수가 바로 솔로몬보다 크고, 다윗보다 크고, 성전보다 큰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게 그들의 믿음의 출발이었고 토대였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참 얼굴입니다.
그리고 가장 크신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키시고, 가장 작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라고 추켜세워 주시고 기를 살려주시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끝까지 사랑해 주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앞에만 서면 자꾸만 자신이 작아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앞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 앞에서는 기가 살아났고 새로운 세상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비밀입니다. 가장 크신 분에게 돌아와 그를 찬양하고 높이는데, 어느새 내가 가장 귀한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보다 크고 성전보다 크신 분만을 바라보고 사는데 어느새 지극히 보잘 것 없는 내가“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솔로몬 같고 다윗 같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들어서 쓰시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일으켜 세우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교회는 없지만' [우리 교회엔 있는 것]입니다.
이 설교의 단초는 황희곤 학생이 내게 제공했습니다. 그는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됩니다. 그는 다른 학생들과 같이 자신의 미래에 근심과 기대가 큽니다. 지난여름, 나와 서 너 번 진로 상담을 했습니다. 가을 들어서 또 두 번 만났습니다. 희권이는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자의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작정하고 전문대학에서 대학을 그저 맛만 보고 사회복지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희곤이가 늘 내 마음에 들어와 있습니다. 또래와 같지 않은 허세 없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거기에는 황권사와 홍춘자 권사의 성실함도 한 몫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설교 하신 김선교사님이 교회 학생이나 청년들을 북경대학으로 유학 보내는 일에 대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저는 그 밤에 희곤이의 진로를 수정했고, 사회봉사하는 일은 조금 미뤄두고 희곤이를 북경 대학에 입학 하는 날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오해의 소지는 있습니다만, 저는 작은 것을 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큰 것을 얻게 되는가를 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수능을 위해 100일 기도회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사람, 작은 일, 작은 믿음을 통해 큰 것을 얻고자 합니다.
그게 성암교회의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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