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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7: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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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구원에 이르는 감사
눅17:11-19
‘감사’를 말할 때마다 늘 듣고, 읽던 말씀이지요.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를 만나서 병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치유 명령이나 선언을 하는 대신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합니다. 당시 나병 환자는 마을과 가족으로부터 격리되었고,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치고 다녀야(레 13:45-46장)했습니다. 만약 나병이 나았다는 사람이 있으면 제사장은 마을 밖에서 진찰한 다음에 아주 복잡하고 긴 정결 예식과 속죄 예식을 거쳐서 마을로 들어와 살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절차를 밟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로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께 되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서 ‘감사’같은 점잖은 태도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17-18절)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이외에도 이스라엘 사람과 대조하여 사마리아 사람 또는 이방 사람을 칭찬하는 곳이 많죠.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아주 대표적이죠. 또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고쳐 준 이야기에서도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직접 오실 필요 없이 명령만 내려주시라고 하자, 예수는“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눅 7:9)고 하시면서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 사람을 대조시키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는 말은 나머지 아홉이 이스라엘 사람들임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던 길을 가고 이방 사람만 되돌아 온 것인가요? 이것은 당시대의 종교인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심이 극도로 이기주의적인 욕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빙자한 거만함과 욕심이었습니다.
반대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어떤 욕심도 가질 수 없는 사회적인 신분의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민족은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등의 일종의 추수감사절 의식이 있었습니다. 신라의 가배(嘉俳)는 오늘날 8월 한가위와 시기도 먹는 음식이나 풍습도 비슷합니다. 고난과 가난을 헤쳐 온 우리 민족이 이런 축제를 벌인 것은 그들의 가난하고 낮은 마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명절이라고 지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다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정월의 설날과 대보름, 삼월 삼짇날, 오월 단오, 유월 유두, 칠월 칠석, 팔월 한가위, 구월 중구, 시월 상달제, 동짓달 동지, 섣달 그믐 …… 거의 매달 이런 저런 일들로 감사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감사를 드리는 이유가 얼마나 소박한지 모릅니다. 새해가 시작되었다고 감사하는가 하면, 그믐이라고‘해지킴’한다고 하면서 잠도 안 자고 재미나게 이야기를 합니다. 보름달이 떠도 감사를 하고, 홀수가 두 번 겹치는 날도 복이 들어오는 날이라고 하여 감사를 했습니다. 삼짇날(3월 3일), 단오(5월 5일), 칠석(7월 7일), 중구절(9월 9일)이 다 홀수가 겹치는 날들입니다. 가난하고 낮은데 마음을 두었기 때문에 이런 풍습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슬픈 사람이든 기쁜 사람이든 거둔 게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누구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감사가 이렇게 삶 속에 녹아 있고 달력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이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저 모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가난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감사절도 이런 역사적인 연장선의 한 부분입니다.
대개 11월 셋째 주를 감사절로 지키는데, 이는 미국의 풍습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그들의 청교도 선조들이 처음에 농사를 짓지 못해 많이 죽고 고생했지만 인디언의 도움을 받아 첫 수확을 얻게 되어 그들을 초청하여 감사의 축제를 연 것이 기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크리스마스 때 거위를 잡는 풍습이 있는데 미국에선 감사절에 더 큰 칠면조를 잡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런 유래를 보면 본래 미국에서도 그들이 가장 가난하고 겸허한 처지에 있었을 때 감사절을 지키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미국은 너무 강하고 부유해졌으며, 이미 인디언들을 거의 모두 몰아내거나 보호구역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겸허하고 낮아지는 마음 없이, 그저 크리스마스 시즌의 시작으로, 본격적인 미식축구 시즌으로 즐기면서, 자기들끼리 칠면조 잡아서 파티를 한다면 그것은 미국사람들의 축제일 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감사절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미국식 감사절을 받아들이더라도, 처음 그들 선조들의 겸허한 감사절을 받아들여야지, 자기들만의 축제가 된 거만한 미국의 감사절을 받아들여선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이 한 행동을 유심히 살펴봅시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하나는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눅 17:15-16).
그는 먼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여기서‘영광을 돌리다’(doxazon)는 말의 뜻은 ‘찬양하다’와 같은 뜻입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이런 표현이 아주 자주 나옵니다. 그들은 입버릇처럼, 조금만 감사할 일이 있어도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눅 1:46,64,68; 2:13,20,28; 7:16; 19:37; 23:47; 24:53; 행2:47; 3:8-9; 4:21; 10:46; 11:18; 13:48; 21:20). 성전 미문 앞의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되었을 때,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죠(행 3:8). 초대교회 성도의 삶을 묘사할 때도, 그들은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합니다(행 2:46-47). 조금만 기쁜 일이 있어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도 늘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 자체가 늘 찬양하는 삶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사마리아 사람도 제일 먼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돌아섰습니다(hypostrepsen).
여기서 ‘돌아섰다’는 말은 앞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행동한 ‘찬양하면서’(doxazon: 현재분사)와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분께 감사드리는 것이요, 그것은 동시에 그분께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본래 회개한다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가던 길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가 매우 무거운 분위기에서 일어나는 참회 같은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본래 단어의 의미는 되돌아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흔히 고개 숙이고 눈물 흘리는 데서 회개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되돌아섬, 즉 회개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회개, 되돌아섬, 삶의 방향 전환(turn),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모든 일을 우리는 하나로 표현할 때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일어나는 여러 장면이 바로 ‘감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감사’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입니다. 순간이 아니라 영속적입니다. 여하간 감사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그런 형식이 아니라 크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게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였습니다.
열 명이 길을 가다가 자기들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 다들 어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들의 욕망입니다. 그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정과 사회로 복귀해야 했고,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것은 그저 일상이고, 모든 사람이 바라고 원하는 세상의 삶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되려면 사마리아 사람처럼, 큰 소리로 주님을 부르면서 되돌아와야 합니다. 몸이야 다시 아플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지만, 주님께 돌아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에게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홉 사람들은 병은 고쳤지만, 믿음에도 구원에도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인의 감사는 단지 마음이나 행위로 했던 고마운 표시가 아니라, 예수님께로 돌아옴이었기 때문에 구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감사’는 ‘돌아옴’이고 그것은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감사는 여러분 자신에게 ‘구원’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도 예수 믿으면서 치유나 기적도 경험할 수 있고 놀라운 성공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제사장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간혹 사마리아 사라처럼 성공이나 축복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환호하면서 예수께로 돌아서는 일이 있기는 합니다만 드물기 그지없는 시대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은 집으로 돌아간 아홉에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멀찍이 있던 자신을 움직여 예수님과의 거리를 좁힌 것입니다. 이야기 시작 부분에서 나병환자 열 사람은“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나병환자들이 건강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허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은 예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멀리서 불렀던 그 에피스타타를 찾아와 발 앞에 엎드렸다고 합니다. ‘감사’는 뻣뻣하게 건너는 악수 같은 인사가 아닙니다. 거리를 좁혀 착, 발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의 발 앞에 나온 것 자체가 아름다운 감사이며,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열 사람이 똑같이 병 고침을 받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돌아와 예수 앞에 엎드림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 하나님을 찬양하고-가던 길을 되돌아서서-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림으로-구원을 받는 이 일련의 과정이 하나의 [감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를 이름하여 우리는 완전한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을 고치고 집으로 돌아간 아홉 사람처럼 부분적인 감사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 따로, 구원 따로 분리됩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 완전한 감사에서 비롯되는 구원이 바로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 장소는 교회 공간도 십자가 아래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의 발 앞, 되돌아와 엎드린 예수의 발 앞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곳이요, 찬양하는 곳이요, 예배하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의 은인이 누구인지 손으로 꼽으면서 늘 잊지 않고 감사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명절이 되면 그런 분을 찾아 가서 감사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찾아뵙지 못하는 것을 매우 죄송하게 생각하면서 지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온 존재를 바쳐서 가서 엎드리고 감사해야 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주님께 감히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찍이서 에피스타타 하고 부르던 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도 그런 간절한 마음, 그런 낮은 마음, 그런 가난한 마음으로 가던 길을 돌아서서 주 앞에 나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게 완전한 감사이고, 구원받는 감사입니다.
나는 우리교회 교우들이 구원받는 감사의 사람들, 가던 길을 되돌아서서 주님을 찬양하며 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그 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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