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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3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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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달력만 바꾸지 말고
눅12:35-40
우리는 오늘로 2011년을 마감하고 2012년을 살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면 재무부는 교회의 살림살이를 위해서 한 해 동안 교우들이 낸 헌금을 합산하게 될 것이고, 2012년의 생활계획표를 작성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계획안에는 제정적인 것과 아울러 신앙 성숙을 위한 각양의 노력들도 준비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맘 때가 되면 새해 달력을 준비합니다. 금년에도 여러분에게 드릴 달력 걱정을 하다가 불연 듯 “해마다 달력을 바꿔야 하나? 올 해는 달력을 만들지 말아 볼까?” 하는 생각 끝에 성서 본문이 떠올랐고, 달력만 바꾸지 말고 이제는 내게 주어지는 남아 있는 시간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이 [달력만 바꾸지 말고 새로운 시간관을 가지세요]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시간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35절 상반 절에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있어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집안에서는 허리에 띠를 띠지 않고 느슨하게 옷을 입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밖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의미이죠. 이는 마치 군대에서 5분대기조가 출동을 할 복장을 하고 잠이 드는 것처럼, 어떤 활동이나 봉사를 할 준비를 하고 대기 중인 상태를 말합니다.
35절 하반 절에는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합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릴 때는 불을 켜두죠. 이것은 도착하는 사람에게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와 환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36절에서,“너희는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 합니다. 여기서는 주인의 이미지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런 이미지는 요한계시록에도 나오죠.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36절이 오늘 우리가 보려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주인의 이미지는 주님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바꿔줍니다. 우리는 종말에 구름을 타고 우주적으로 심판을 하는 인자 상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주님은 밤늦게 집의 문을 두드리고 있으며, 안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밖에서 고생을 할 수도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주님 또는 주인관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문을 열면 그제 서야 그가 들어와서 우리와 함께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교우들이 생각하는 주님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당직 장교의 이미지입니다. 흔히 ‘도적처럼 오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37절에서 나타나는 주인의 이미지를 한 번 보세요. 매우 파격적입니다. 놀랍게도 그 주인은문을 열어 줘야 들어올 수 있으며, 그렇게 들어오셔서는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을 해 보세요. 이 장면이 바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장면이고, 오셔서 하시는 일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종들이 주인을 기다리느라 수고를 했다고 하더라도 주인이 종들에게 시중을 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이것은 상식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 신앙으로 사는 신자에게 주어질 파격적인 은총의 선물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금방 종말이 올 것처럼 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느니 보다 안 하는 게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보다 30여 년이 늦은 시점에 있는 누가 기자는 종말이 지연된 상황에서 성도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그는 종말의 때는 하나님만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되, 그것에 얽매여 안절부절 불안하게 살지 말고, 일상의 삶이 주는 은총으로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다보면 그분이 오셔서 문을 두드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때 나가서 문을 열어 드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변화된 예수 재림의 장면입니까? 도적같이 올까봐 대책도 없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나오는 장면이, 들어오셔서 야단치고 꾸짖고 나무라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우리의 시중을 들어주시는 다정하고 고마운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신학이 바뀐 것입니다. 오지 않는 미래에 붙들려 불안해 떨지 말고 현재를 복되게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당직사관이나 감사원 직원처럼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적같이 오시는 분이 아니라 오셔서 문을 두드리는 분이고, 내가 열어 드리면 그제 서야 들어오시는 분이고, 그런 다음에는 이것저것 물어서 혼 내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식탁에서 내가 밥 먹는 것을 시중드는 그런 분’이라는 겁니다. 이게 종말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어야 하고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들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변화된 시간관 아닙니까? ‘도적 같이 와서 혼 내주는 하나님’이라면 늘 두려움과 죄의식 속에 살아야 합니다. 실수를 하거나 피곤해서 졸았을 때에 언제 들켜서 처벌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죠. 이건 두려움의 신학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기다림은 지루함이며 종말은 공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는 부모가 무서워서 깨어있기보다는, 부모를 사랑해서, 부모를 기쁘게 해주려고 잠을 참으면서 깨어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와서 문을 열면 부모는 들어와서 가져온 선물을 주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 기자가 생각한 성도들에게 임하는 현재적 종말이요, 새로운 시간관입니다.
이제 2012년이 시작됩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쓸쓸한 마음이 되기도 하고, 자신이 시간에 의해 어디론가 밀려가고 있는 것 같은 공포를 맛보기도 하면서 우울해지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감상주의에 젖을 것이 아니라 누가 기자의 새로운 시간관과 현재적 종말신앙으로 새해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자기에게서 벗어나서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을 주셨고 지구를 벗어나서 지구를 보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가 바뀌는 때에 우리는 또한 우리가 선 자리로부터 벗어나서 나를 한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주비행사 러스티 슈바이커르트는 1969년 우주비행 중 밧줄을 몸에 매고 우주선 밖으로 나가 우주의 고요함 속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누렸습니다. 그는 새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보석처럼 빛나는 지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이 보석 안에 그가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 그의 가정, 친구, 음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치 산모가 갓난아기에게 하듯이 이 보석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는 폭격기 조종사였습니다. 그때까지 줄곧 군인으로 살아온 그가 처음으로 영혼에 모성과 연민을 느꼈습니다. 그가 우주공간에서 이런 깨달음을 얻는 데는 대략 4천만 달러(400억 원)의 비용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내려다보고, 우리 공동체를 내려다보고, 이 지구를 내려다보는 데는 그렇게 큰돈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해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고 저리 돌다가,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해 아래 새 것이란 없다”(전 1:3-9).
전도서 기자의 이런 말은 허무주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집착을 하는 일들로부터 떠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되지 않으니까,‘헛되고 헛되다’는 역설(Paradox)로 충격요법을 쓰는 것입니다.“헛되고 헛되다”“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선언은, 알량한 우리의 자랑과 우리 자신의 아집과 편견과 어리석음과 죄와 무지몽매함을 아무런 이유도 변명도 필요 없이 부정하는 것입니다.
시간관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성서적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밤늦도록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신앙이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하는 사람도 없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햇볕을 쬐며 행복해 하듯, 햇볕이 모두에게 골고루 날마다 내리쬐듯, 그렇게 매순간 주님에게 문을 열고 내 삶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내 삶에 들어오셔서 내가 사는 모든 것을 수발들어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용한데 가서 물어보는 것보다 만 배나 확실한 답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해 또는 시간들은 그저 뭔가를 기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생각, 의식,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 문을 열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문들을 두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어 달라고, 내가 들어가서 네 삶을 수발들어 줄 테니 열어 달라고 말입니다.
새해는 달력을 바꾸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내 삶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예수님에게 기쁘게 나가서 문을 열어 드리고 얼싸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 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행복합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마지막 날이 될 텐데 그 때도 주님이 슬그머니 오시지 않고, 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니 걱정하지 말고 하루하루를 햇볕처럼 쏟아져 내리는 은총으로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새로운 시간관이며, 그리스도 재림론의 21세기적 변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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