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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23-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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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이곤 교수 |
참고 : | http://www.cpes.or.kr |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 야훼
I. 본문의 상황과 내용(김이곤 교수, 한신대)
도입 : 우리의 본문(출 2:23-3:10)은 야훼 하나님의 출애굽 구원역사(출 1:1-15:21)의 긴 신학적 서론(출 1:1-4:23)의 한 부분이다. 야훼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원역사는, 역사비평학적으로 볼 때는, 홍해사건의 경험을 그 핵(核)으로 하여 그와 유사한 단편적인 여러 구원경험들을 모아 거대한 하나의 "구원사 드라마"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거대한 구원사 드라마는 "신학적 서론"의 오리엔테이션이 없이 단순하게 역사적 사실을 사실보도(寫實報道)하는 형식으로만 기술(記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성서 경전문학의 기본현실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항상 역사의 사건들 안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보고 그 행위의 신학적 의미를 증언하는 성격을 띄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학이 성서의 역사문학 일부를 가리켜 "설화"(이야기)라는 장르로 명명하여 분류할 때 "이야기"(story) 또는 "설화"(narrative)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만 말하는 것일 뿐, 결코 성서의 역사기술을 그 무슨 "픽션"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우리의 본문도, 분명, 그 문학현실로 미루어 볼 때, 출애굽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역사로 증언하려는 신학적 의도의 한 산물일 뿐으로서, "이러한 신학적 의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채용한 하나의 설화(이야기)문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우리의 과제는 이중적이다. 즉 그 하나는 우리 본문의 역사적 상황을 관찰하되, 그 담고 있는 문학현실을 고려하면서 관찰하는 것이고 그 다른 하나는 그러한 문학을 빌려서 증언하려는 성서기자의 케리그마적 의도와 신학적 의도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본문의 역사적 상황
우리의 본문(출 2:23-3:10) 직전에는 이스라엘이 애굽땅에서 이유없는 억압을 받는 고난의 상황(출 1:1-2:10)과 모세가 그의 민족애적 울분과 의분심의 충동을 받아 "힘의 논리"로 이스라엘 구원(해방)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상황(출 2:11-15), 그리고 모세가 그의 실패를 자인하고 미디안으로 피신(퇴수[退修])한 상황(2:16-22)이 배열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 본문의 역사적 줄거리이다.
이러한 상황 증언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문제는 모세가 이 시점에서 왜 미디안에 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해방(구원)을 위한 첫 시도에서 실패하고 좌절하여 "물러난"(retreat) 곳이 미디안 광야(함미드발 미디얀) 였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미디안의 만남, 이스라엘 종교와 미디안 종교의 만남, 더 나아가서는 모세의 야훼 종교의 미디안적 기원(起源)을 강력히 암시해 준다. 즉 이 사건은 민족사적, 종교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중 민족사적 의미는, 구약 전체의 현실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미디안"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에게는 위협적인 원수의 나라였고 팔레스틴 농경지를 마구 짓밟는 침략적인 낙타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모세의 임시 도피지역으로서는 매우 부적당하다. 왜냐하면, 미디안은 "엘아카바"만(灣)의 동쪽 북서 아라비아에 위치하고 있어서 애굽으로부터는 그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여기서 "애굽"은 미약한 이스라엘 유민(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啓示)하실 장소로서는 매우 부적하다는 것과, 단지 문화종교와 힘의 논리가 지배하지 않는 "광야"(미드발)만이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가장 적절한 장소(출 5:3 ; 3:18 참조)였다는 구약의 증언을 들을 뿐이다. 여기에, 미디안 광야에 있는 무명의 "하나님의 산"(출 3:1 ; 4:27)에 관한 전승이 성서기자의 모세전승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그리고 출애굽 전승과 시내산 전승 사이의 긴밀한 연결에 관한 전통의 강력한 영향을 덧붙여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인들을 광야를 통하여 가나안으로 이끌어가시는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의 정당성은 반(反)문화지역인 "미디안 광야"의 하나님의 산 호렙(=시내)에서 경험한 야훼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을 때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증언을 듣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문학현실에 나타난 출애굽 구원사 신학
우리의 본문(출 2:23-3:10)은 경전 설화문학의 옷을 입고 초기 이스라엘의 형성역사를 구원사 신학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본문 앞에 나오는 세 개의 단편자료(a. 출 1:1-2:10 ; b. 출 2:11-15 ; c. 출 2:16-22)에도 뚜렷히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였다.
그 첫 번째의 경우에서는(출 1:1-2:10), 바로 왕의 힘의 논리에 의하여 자멸위기에 처하였던 이스라엘이 오히려 억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더욱 번성하여(출 1:12), 마침내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원수의 딸(바로의 딸)의 손을 빌려 가장 안전하게 이스라엘의 미래가 보전되는(출 2:5-10) 야훼 하나님의 역설적(逆說的) 구원섭리가 마치 "십자가의 지혜"(고전 1:18-25)의 능력처럼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두 번째(출 2:11-15)와 세 번째(출 2:16-22)의 상황에서도, 참 구원(해방)행위는 폭력대 폭력의 방법(출 2:11-15)이 아니라 비(非) 폭력적 구원의 방법(출 2:16-22)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
마침내 우리의 본문(출 2:23-3:10)은 야훼 하나님의 구원(해방)의 길이 지닌 그 본질적 성격이 무엇인지를 계시(啓示)하려는 신학적 의도를 빈틈없는 문학구조에 맞추어 소개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우리의 본문은 또한 이 구원사를 주도하실 야훼 하나님의 본질(아이덴티티)도 또한 뚜렷하게 밝히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구약성서의 핵심적 신학을 읽게 된다.
(1) 야훼 하나님은 타지 않는 불꽃 떨기 안에 현존하신다 : "떨기"를 표시하는 히브리어 "스네"는 이곳(출 3장)과 신명기 33:16 이외의 구약성서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용어이다(신약에서는 행 7:30에 한 번 기록됨). 여기서의 문제는 이 "떨기" 사건을 상징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현대 성서학자들의 경우, 지금까지 대체로는 부정적 입장을 취하여 왔다. 즉 떨기에 대한 상징적 의미는 대체로 알레고리적 해석 또는 영해로 간주하여 배척하는 경향을 띄어 왔다. 그리하여, 떨기나무의 존재가 아직, 역사적으로 미확인 되었다는 점을 기초로 하여, 불꽃 떨기의 의미는 주로 "신 현현"(theophany)의 전조(前兆)로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서(위의 "1.본문의 역사적 현실" 참조) 열왕기 상 19:11-14의 경우와 같은 "신 현현의 전조(前兆)"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불꽃떨기"의 의미를 고난받는 애굽 땅 이스라엘의 역사적 고난상황에 대한 상징(용광로 : fiery furnace of affliction)으로서 읽고, 반면에, 떨기를 태우지 않고 지키는 신비, 놀라움, "큰 광경"(함마르에·학가돌 ; 출 3:3)의 의미는 고난받는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최대의 위로"에 대한 상징 또는 야훼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는 입장은 유대교 문필가, 초대교부, 필로(Philo) 등등으로부터 몇몇 현대 성서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다.
무엇보다, 불꽃떨기 안에 야훼께서 현존하신다는 성서보도의 신학적 의미를 "야훼의 역사참여", "성전이나 제의(祭儀) 영역이 아닌 곳에 임재하시는 야훼 현현장소의 세속화"(창 28:10-22 참조),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특히, T.E. Fretheim), "민중의 고난속에 참여하심" 등등에서 찾는 학자들의 견해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떨기 속의 하나님 야훼는 모세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시다 ; 불꽃떨기 속에서 모세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이 증언의 의미는 모세의 하나님과 그의 조상의 하나님의 역사적 연속성(요한계시록 1:8과 비교)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은 과거와 단절된 분은 아니시다. 그러므로, 야훼의 출애굽 구원(해방)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구원약속의 성취라는 역사신학적 의미도 동시에 가지게 되는 것이며(출 2:24) 야훼의 신실하심은 비로소 역사적 구체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출 3:5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는 말씀의 의미를 과거와 단절하는 결단을 요청하는 의미의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된다(동양적 "존경의 표현" 이상으로 확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은 결코 역사 초월의 신(神)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역사의 신(神)이시며 인격적 신(=사회적 신)이신 것이다.
(3) 야훼 하나님은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신(神)이시다 : 야훼 하나님의 현현(顯現 : theophany)은 비교(秘敎)의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신비한 종교의식이거나 신비한 종교현상이거나 종교적 마술이 아니라 구원을 요청하는 인간의 부르짖음에 대한 야훼의 구원응답행위일 뿐이다(!!). 이 증언이 우리 본문의 신학적 결론이다. 야훼의 참 신(神)이심에 대한 증거는 그의 응답행위에서만 발견된다(왕상 18:24). 인간에게 요청되는 것은, 믿음에 기초한 "부르짖음"(outcry)일 뿐이다. 그가 자비와 긍휼의 신이시다는 증언(출 33:19-94:7)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야훼는 "구원의 하나님"이실 뿐이고 신앙인은 그를 향하여 부르짖는 자일 뿐이다(출 3:7-8, 9-10).
결론 : 모세의 호렙산 신경험과 광야로의 퇴수(退修 : retreat)가 이스라엘 구원사의 필수적 전단계라는 우리 본문의 주장은 이스라엘 구원 및 인류구원의 전권이 야훼의 긍휼과 은혜에게만 주어져 있다는 것과 그리고 야훼 하나님의 기본 본질은 전적으로 고난받는 자의 "부르짖음"에 언제나(!) 구원으로 "응답하시는 신(神)"이시라는 케리그마를 전달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실로, 야훼는 긍휼로 응답하시는 "긍휼의 신"(출 33:9 ; 34:6)이시다는 신앙을 가진 자만이 확신을 가지고 야훼를 향하여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이다. 즉 야훼를 향하여 진정으로 "부르짖을 수 있는 자"는, 그러므로, 야훼의 긍휼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응답하실 수 밖에 없는 본질임을 믿는 자이다.
2. 오늘의 상황과 본문 적용(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하나님은 시대마다 자신을 구원자로 계시하시기에 구약의 구원 역사의 대표적인 사건인 출애굽 구원 역사를 통해서도 그 분의 분명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러면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첫째로 그 분은 불꽃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다. 그 때 모세는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양을 치는 모세를 만났다. 일상 생활을 하고 있는 모세를 하나님은 찾아오신 것이다. 이것은 이방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자기 신을 만나기 위해서 특별한 열심과 비범한 경지에 들어가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현장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불러 주신다.
모세는 평상시에 양을 먹이던 곳에서 광야 서편까지 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했다. 그 때 그는 양떼를 몰고 가던 방향과 반대 방향에서 불이 붙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것은 이상한 불이었기 때문이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놀랍게도 나무가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불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자세히 보고자 하였다.
모세가 본 이 환상을 무엇을 상징하는가? 지금 이스라엘이 당하는 무서운 압제와 고난으로도 그들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것은 불같은 시험 가운데 있는 절박한 이스라엘의 모습과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로의 압제 가운데서도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모세가 본 당대의 이스라엘에 대한 진리가 아니다. 신구약 어느 시대거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많은 어려움과 시련이 있었다. 순간만 보면 그들은 종말을 맞이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에 타는 그 보잘것없는 모습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더 증거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수단이 된다. 모세를 되돌아가서 보도록 불러들인 것은 바로 이 불붙고 있는 보잘것없는 떨기나무였다.
하나님은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 가운데 함께 계시는 분이다. 성경의 하나님, 오늘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그 백성의 고난받는 현장에 동거하시는 하나님이다. 자기 백성을 향한 그의 긍휼과 자비는 영원하다. 당장 숨막힐 것 같은 난관 속에 처한 사람일지라도 이 하나님을 묵상한다면 위로를 얻을 것을 설교자는 선포해야 한다.
또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구원약속을 성취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4절에서 6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다. 모세는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불붙는 떨기나무는 모세의 사역이 긴박함을 또한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를 필요로 하는 자들의 긴급한 처지를 보아야 한다.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처럼 처절한 상황 가운데 있는 동족의 어려움을 목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의 필요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같은 시험 가운데서 소리치는 동료인간의 소리를 듣는 것이 필요하다.
구체적이고 인격적으로 모세를 두 번 부르신 다음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거룩을 가르친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지금 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은 지금까지 그가 밟고 다녔던 곳과는 다른 곳이다. 물론 그 곳이 원래부터 거룩한 곳이라고는 생각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나타나심으로 거룩한 곳이 되었다.
하나님은 먼저 모세에게 자신이 다른 신과 모세 자신으로부터 구별하셨다.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방의 다른 신과 같이 생각하였다. 하나님을 이방의 다른 신과 꼭 같이 생각할 때 무서운 타락이 왔다. 반면에 교회의 참된 부흥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다시금 발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떤 신들과도 다르시며 우리 인생과도 다른 분이다. 하나님의 종 모세라도 그 앞에 신을 벗을 수밖에 없다.
교회가 가장 부흥했을 때는 온 회중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두려워 떨 때이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셨을 때 나타나는 특징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 야곱은 "두렵도다 이곳이여"라고 소리쳤다. 하나님의 거룩을 접한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느낀 것은 거룩한 두려움이었다. 교회가 세속화 될 때는 말이 많아지나 거룩하면 할수록 하나님 말씀 앞에 잠잠해 진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을 실현하는데 모세를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계획이 모세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완성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이고 아직도 미래의 일이다. 다만 모세를 통해서는 한 구체적인 모습을 역사 속에서 실현할 뿐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모세가 수종들 출애굽 구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구원언약의 성취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모세를 통한 출애굽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구체화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와 무관한 신이 아니라 인간 역사 속에서, 그리고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며 역사 속에서 자신을 알리시는 인격적인 신이시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역사 속에 구원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분이시다.
마지막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인간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은 신비한 종교의식이나 종교현상이나 종교적 마술이 아니라 구원을 요청하는 인간의 부르짖음에 대한 구원응답의 행위일 뿐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의 형편은 어떠했는가? 과거에 모세가 그들을 도우려고 나섰을 때와 비교해서 외적인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이스라엘의 부르짖는 소리는 하나님께 상달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소리를 듣고 계셨다(출 2:24; 3:7, 9).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소리가 너무 커지니까 비로소 옛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비로소 그 옛 언약을 실현할 때가 될 만큼 그들의 마음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긴 침묵은 이스라엘의 고집 때문이었다. 그들이 좀 더 일찍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졌더라면 더 일찍 개입하셨을 것이다. 그들은 한 평생 내내 노예생활을 해야 비로소 겸비해질 정도로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이 없었다면 구원받을 기회가 없었을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고 이제 그 언약을 따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개입한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본질상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나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열심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을 세우시고 거기에 따라 엄청난 인내로 우리를 참으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가 오늘 여기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를 나아오게 하는 방법의 하나가 고난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사람들이 힘들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에 기초해서 지금 당면한 고난과 고통을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고민을 아시는 분이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바로 그 때 모세에게 나타나신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선포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다. 신앙 인은 단지 그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자이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고통받는 인생 가운데 계시는 분이다. 역사를 통해서 구원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다.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다. 고난받는 자의 부르짖음에 언제나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확신을 가지고 부르짖는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수밖에 없는 분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 인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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