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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2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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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성희 목사 |
참고 : | 2002년 03월 10일 연동교회 http://www.ydpc.org |
출2장23-25, 약5장1-4
고통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anthropomorphism)이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람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노하심, 하나님의 기뻐하심 등이 이런 유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어떤 몸을 생각해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권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행위가 신인동형론적 표현입니다.
모세를 죽이려던 왕이 죽었습니다. 왕이 죽은 후에 애굽에 거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고통은 더욱 심해집니다. 그 왕이 죽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끝나기는커녕 고역이 더 심해진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첩첩산중입니다. 원래 악은 절대 쇠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해집니다.
그저께 모 일간신문에 난 충격적 기사입니다. 미국의 무신론자가 지난 10년새 2배나 급증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9.11사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왔지만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필요한 사람들이 점점 더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전체 인구의 약 14%를 차지하던 무신론자가 지난 90년의 8%에 비해 6%포인트 늘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간의 타임(Time) 잡지의 표제는 "우리가 다음 9.11을 멈출 수 있는가?(Can We Stop the Next 9/11?)"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악은 점점 포학해지고 멈출 수 없이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내리막을 치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세에 대한 증언 가운데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 3:13)라고 합니다.
이런 모든 정황의 변화에서 우리는 모세의 소명의 배경을 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끝까지 연단하십니다. 불로 쇠를 연단할 때 조금 뜨겁다고 끄집어내면 아무 것도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연단이 될 때까지 두고 보십니다. 못들은 척 하십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찰 때까지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힘 아래서 고역을 당합니다. 때가 찰 때까지는 하나님이 그냥 두고 보시기만 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습니다.
'부르짖다'는 말은 히브리말의 자아크라는 말입니다. 막다른 상황에서 부딪쳐 외치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하나님은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왠지 아십니까? 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역을 인하여 부르짖었다는 것은 이 전에는 부르짖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비로소 우상적 외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는데 40년이 걸렸다. 왜 이전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습니까?. 조금 힘들 때는 자기 힘으로 극복하고 참아보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인전할 때에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렘 33:3)라고 하셨고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출 22:23)라고 응답을 확인하십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들어주심에 대해 간증합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우리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이다"(민 20:16).
사사기는 온통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습니다. 그들은 이방 왕에게 고통을 당합니다. 그들의 회개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시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과 백성들의 숨바꼭질이 계속됩니다.
불레셋은 이스라엘에게 항상 고통의 대상이었습니다. 불레셋이 그들을 괴롭힐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사무엘상 7:8에도 이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시편에는 "저희가 주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라는 말씀이 수없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은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여호와의 귀에 들립니다(약 5:4).
지금도 억울한 울음소리, 고통 당하는 신음을 하나님은 다 들으십니다. 우리의 고통 당하는 자의 소리, 억울한 울음소리, 눌린 자의 신음소리에 대하여 민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소리에 유난히 귀가 밝으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십니다.
'들으시고'란 말은 솨마입니다. 이 말은 '주의 깊게 경청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음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계십니다.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세상에는 상달되지 않는 소리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다가 마는 소리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테레사 수녀의 '아름다운 선물'이란 책에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다른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침묵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들으십니다. 침묵 안에서 그분은 우리 영혼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침묵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특혜를 지닙니다"라고 합니다.
경주(race)라는 말은 헬라어 아곤(agon)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에서 고통(agony)이라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달리기는 가벼운 조깅이 아니라 녹초가 되도록 힘들며 때로는 심한 고통이 따르는 경주입니다.
고난은 힘들어 보이지만 유익한 것입니다. 시편 119:71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고난 당하는 것만큼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한센병환자는 신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 병의 특수한 비극입니다. 사실상 한센병환자의 신체적 기형은 그들이 고통 느끼지 못하기 때문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내(patience)라는 말은 '고통 당하다'는 뜻인 'patior'라는 고어에서 나왔다. 인내를 배운다는 것은 어떤 고생에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헨리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긍휼이란 헬라어의 스프랭크니조마이(splanchnizomai)에서 나온 말입니다. 의학에서 내장학(splanchnology)이란 이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의 고통을 창자로부터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계십니다.
옛날 진나라의 환공이 삼협을 배타고 갔습니다. 그의 하인 한 사람이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배를 탔습니다. 이 원숭이 새끼의 어미는 이를 알고 뱃길을 따라 백리길을 울부짖으며 뒤쫓아 왔다고 합니다. 그 어미 원숭이는 끝내 뱃전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배를 갈라보았더니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고통을 아버지 하나님은 단장의 아픔으로 보고 듣고 동참하고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백성을 권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언약에 따라 은혜를 베푸시고, 그 언약을 충실히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8). 이삭에게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창 26:24). 야곱에게 언약을 세우십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3).
언약은 베리트란 단어입니다. '자르다' 또는 '먹는다'는 뜻입니다. 언약을 세울 때 희생동물을 잘라 두 줄로 두고 그 사이를 언약자가 지나가는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언약을 어기면 짐승처럼 자름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언약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와 더불어 맺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약은 파기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은 새 언약에서 완성됩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만찬 때에 "너희를 위한 언약의 피"라고 하신 것입니다.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만 사람들은 잊어버립니다. 노아시대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창 9:15). 하나님은 애굽에서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 6:5).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십니다(시 106:45). 그리고 사람들은 언약을 잊기 쉽기 때문에 잊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열왕기하 17:38에는 "또 내가 너희와 세운 언약을 잊지 말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잊고 사는 백성을 싫어하십니다. 언약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시고 권념하셨습니다. 권념이란 야다라는 말로서 '알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이미 깊이 알고 계신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그들을 용납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는 시대입니다(God for us).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때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시대입니다(God with us). 그리고 성령시대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시대입니다(God in us).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음을 아시고 고통하는 백성들을 위하십니다.
결론
폴 브랜드 박사(Dr. Paul Brand)는 한센병에 대한 권위자로 상당히 이름난 사람입니다. 그는 루이지애나 주의 카빌(Carvill)에 있는 한센병환자 재활원의 원장으로, 다음과 같은 체험으로 놀란 일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출장 차 미국을 떠나 브랜드 박사는 영국에 갔습니다. 그는 영국의 몇 군데에서 일을 본 후에 여러 시간의 기차여행 끝에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그 날 밤 그는 호텔에서 잠자리에 들려고 신발을 벗고 양말 한 짝을 벗었는데, 발뒤꿈치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일이 별것 아니겠으나, 인도에서 수많은 한센병환자를 수술한 경험이 있는 세계적인 권위의 한센병전문가에게는 순간적으로 심각한 의심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는 기계적으로 일어나서 핀을 찾았습니다. 자리에 앉은 브랜드 박사는 핀으로 발의 복숭아 뼈 밑부분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감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핀을 더 깊이 찔렀습니다. 이제 찔린 부분에서는 피가 솟아났지만 그래도 감각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한센병에 감염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밤이 새도록 브랜드 박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센병환자로 살아가야 할 자기의 두려운 인생을 머리에 그려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버림받은 자기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의료진으로부터 백안시되는 입장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고통의 밤이 지나고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아침과 같은 희망이 이제 자기 인생에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핀으로 어제 찔렀던 복숭아 뼈 밑 부분을 꼭 눌러서 쑤셨습니다.
순간 그는 기절할 듯이 아파서 고함을 쳤습니다. 그 아픔, 그 고통은 정말로 축복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그가 깨달은 것은, 어제 장시간의 기차 여행으로 앉아 있는 동안에, 신경의 한 부분이 눌려서 발이 마비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후로 브랜드 박사는 실수로 손가락을 칼에 베었을 때도 그 고통에 감사를 했다고 합니다. 발을 잘못 디뎌서 발목이 아파 펄쩍펄쩍 뛰면서도 그 아픔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버섯을 잘못 먹고 온 몸을 뒤틀면서 토하는 심한 고통을 당할 때도, 그는 "하나님, 나의 고통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지금 어떤 고통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듣지 않으시는 듯 보입니까? 하나님은 듣고 계십니다. 내가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고통을 당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권념하시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고통들이 하나님이 들으시고 만나는 교량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통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고통은 감사의 조건입니다. 고통은 축복의 가면입니다.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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