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출2:11-25 |
---|---|
설교자 : | 김흥규 목사 |
참고 : | 2008-02-11 내리교회[기감] http://naeri.org |
이상에서 현실로
본문은 모세가 그의 인생 제1단계에서 2단계로 넘어가는 전환 과정을 보여줍니다. 11절에 보면 세월이 많이 흘러 모세가 어른이 되었습니다. 40년의 세월이 흘러 어엿한 중년이 되었습니다. 아니, 120세의 나이로 볼 때에는 아직 청년기에 불과했겠지요. 애굽의 왕자로서 로얄 패밀리 안에 자랐던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지요. 놀랍게도 그의 정체성 인식은 정의실현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로 드러납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궁중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정의를 기반으로 하는 윤리도덕이 주요 과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국에서 말하는 정의는 어디까지나 힘에 근거한 정의였습니다. 힘센 놈이 정의롭다는 힘이 논리가 애굽식 윤리도덕의 핵심이었습니다.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 혹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논리가 판을 쳤던 것이지요.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은 서로 다른 세 그룹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자기 동포를 때리는 애굽인, 서로 싸우는 히브리 동족들, 그리고 미디안 사람들과의 만남입니다. 이 세 그룹은 모두 부당한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이 세 그룹이 직면한 정의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세가 그의 인생 제1단계로부터 2단계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1. 히브리 동포를 괴롭히는 애굽인을 쳐죽이다(11-12절)
11-12절을 보세요.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장성한 모세가 어느 날 왕궁 바깥에 나가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히브리 동포들을 보았습니다. 그 때 그의 눈에 동포 한 사람이 애굽인에게 매를 맞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애굽인을 모세가 죽였다는 사실로 볼 때 죽을 지경으로 아주 심한 구타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인 울분을 참지 못한 모세가 그 애굽인을 때려죽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슴 가득 민족의식을 품은 모세의 모습을 봅니다. 뿐만 아니라 정의감이 충만한 모습도 봅니다. 불의한 현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의혈 청년 모세를 만나는 것이지요! 애굽에서 받은 제국 최고의 교육이 행동으로 나타난 순간입니다. 분명히 모세는 불의를 좌시하거나 묵과하지 않는 위대한 정의감과 결연한 용기가 있었습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핍박해서 안 된다는 올곧은 의식이 있었습니다. 자기 동족이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개하는 민족의식이 철철 넘쳤습니다. 그 결과 불의에 맞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즉각적인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이상주의적 목적은 좋았으나 그 방법은 옳지 못했습니다. 자기 주먹의 힘만 믿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설사 그것이 자기 동족에게 가해진 만큼의 고통에 상응하는 동해보복적인 차원이라고 할지라도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입법자로서의 모세가 규정해놓은 율법, 즉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출 21: 12)는 조항에 직결되는 중대범죄였습니다. 물론 모세도 자기의 수단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12절에 보면 그 애굽인을 떳떳하게 죽이지 못합니다. 좌우를 살펴서 엿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비밀리에 처단했습니다. 그런 뒤 시신을 유기할 때에도 아주 조심스럽게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에 살인이 옳지 못하다는 마음의 법을 새겨주셨기 때문에 모세 역시 성급한 혈기로 사람을 죽였지만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모세가 정의감을 가진 것은 좋습니다. 민족의식에 불타 고난받는 동족을 돕겠다는 정신도 위대합니다. 그러나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과 수단이 정의롭지 못합니다. 정의실현이라는 목적이 폭력행사라는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힘의 논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가 모방한 힘의 논리를 이 경우 그대로 적용했던 것뿐입니다. 그러나 자기 힘과 실력만 믿고 날뛰는 이상주의는 냉엄한 현실 앞에 참담히 실패합니다. 그를 기다리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배척과 추방입니다. 어떤 이데올로기나 이상주의는 인간이 자기의 힘과 실력만 믿을 때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2. 싸우는 동족들을 뜯어말리다(13-15절)
애굽인을 죽인 모세는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서로 다투는 히브리 동족들이었습니다. 13-14절을 보세요.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남의 나라에서 동족끼리 싸우는 것이 못마땅해서 잘못한 사람을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그 동포의 반응은 뜻밖의 협박이었습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모세가 그토록 용의주도하게 비밀리에 살인을 벌이고 은폐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애굽인을 죽이듯이 나까지 죽이려고 하냐며 대들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누가 모세를 히브리인들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냐며 따집니다. 정의감과 민족의식에 불탔던 모세의 이상이 차가운 현실 앞에 묵사발이 되는 현장이지요!
모세는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처치했을 때 은근히 칭찬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포들은 칭찬은커녕 모세를 살인자로 몰아 배척합니다. 힘의 논리에 기초해서 정의를 실현하려던 모세의 시도는 여지없이 실패했습니다. 살인극이 탄로 나는 것을 두려워서 도주해야만 했습니다. 과연 살인 소식은 바로의 귀에까지 들어가 전국에 지명수배가 내려졌습니다. 이리하여 모세 인생의 제1기는 끝나고 미디안 망명이라는 인생 2기가 시작됩니다. 바로와 히브리 동포 양측 모두가 모세를 배척했습니다. 모세의 이상이 현실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지요!
3. 깡패 목자들에게 위협을 받는 미디안 제사장의 일곱 딸을 돕다(16-22절)
미디안 광야로 도피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 즉 이드로의 일곱 딸을 만나게 됩니다. 우물가에 앉아 있던 모세가 그 일곱 딸이 부당한 처사를 당하는 것을 봅니다. 물을 길어 구유에 부으며 양 떼에게 먹이려고 했을 때 일단의 목자들이 방해를 놓았습니다. 여인들을 내쫓고서는 자기 양떼에게 물을 먹였던 것이지요. 이들은 떠돌이 깡패 목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순간 모세의 마음속에 또 다시 의협심이 일었습니다. 목자들의 손에서 일곱 딸을 보호해주었으며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여주었습니다(17, 19절). 여기에서도 모세의 정의감은 여지없이 행동으로 직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인을 쳐죽였을 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 때에는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려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목자들을 그냥 쫓아버립니다. 말을 해서 쫓아냈는지 폭력을 통해서 쫓아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죽이지 않고 몰아낸 것만은 확실합니다. 모세가 정의라는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 상당히 완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약자인 이드로의 딸들을 밀어낸 강한 목자들을 말이든 행동이든 동일한 힘으로 몰아낸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애굽인이나 동족 히브리인들의 경우와 달리 미디안에서는 정의와 평화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이드로 일가에게 좋은 인상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 그 집안에 더부살이를 허락 받았을 뿐 아니라 그 딸 십보라를 아내로 맞게 됩니다. 데릴사위로서 미디안 광야의 제2기 인생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결론이 중요합니다. 22절을 보세요.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가 십보라를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게르솜, 즉 "낯 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의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입니다. 행 7: 29절 역시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살이를하며 아들 둘을 낳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사족(蛇足)같이 보이는 이 말을 굳이 왜 하고 있을까요?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합니다.
첫째, 게르솜이라는 이름이 모세의 쓸쓸한 처지를 대변합니다. 구중궁궐에서 왕자 노릇하던 모세가 낯선 땅 미디안에서 나그네, 즉 객(客)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나그네는 일체의 권리를 상실한 방외인의 처지를 말합니다. 어떤 특권이나 기득권을 다 상실하고 변방의 주변인으로 밀려난 신세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동시에 히브리인들이 애굽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국가 민족적인 운명으로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미디안이나 애굽은 본향이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떠도는 타관객지일 뿐입니다.
둘째, 모세가 아들을 둘씩이나 두고 미디안에서 나그네살이를 했다는 말은 원대한 이상을 버리고 평범한 소시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민족주의니 정의실현이니 하는 원대한 이념이나 주의주장, 이데올로기를 다 접어버리고 이름 없는 소시민으로서 머물렀다는 말이지요. 힘의 논리를 포기하고 인간의 무기력을 절감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4. 하나님의 때가 차다(23-25절)
여기에서 세월은 또 많이 흘러서 국면이 전환됩니다. 히브리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던 애굽 왕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통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본문에서 '울부짖다'(cry)는 의미의 말을 네 번씩이나 되풀이함으로서 히브리인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24-25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여기에서 중요한 말이 '들으시고'(heard), '기억하시고'(remembered), '돌보시고'(looked upon), '생각하셨다'(took notice of)는 말입니다. 개역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권념(眷念)하셨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그네 생활을 청산할 수 있는 탈출의 시기가 왔다는 말입니다.
5. 본문이 주는 영적 교훈
본문은 모세의 인생 2기를 집약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모세는 분명 애굽에서 위대한 교육을 전수 받았습니다. 그래서 원대한 이상을 품었습니다. 자유와 해방, 정의와 평화 등등에 대한 숭고한 가치관도 지녔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데올로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인권평등과 같은 이념과 주의주장을 가졌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부당하게 학대받는 동족을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의분을 느껴 용감하게 나섰습니다.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것이지요. 식민지 노예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동포끼리 다투는 히브리 사람들에게도 간섭했습니다. 나름대로의 확고한 애국애족 철학과 이상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모세의 숭고한 이상주의를 히 11: 24-2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바로의 왕자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의 낙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동족을 위하여 받는 고난과 수모를 애굽의 모든 부귀영화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념과 주의주장을 위하여 포기할 줄 아는 이상주의자 모세의 면모를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세의 이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패했습니다. 노동운동이나 인권운동 혹은 민주화나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상은 높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들어가면 이상만 가지고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이상이 현실 앞에 맥을 못 추고 타협하거나 변질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인류 역사는 보여줍니다.
모세 역시 인간 평등이나 정의 평화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애굽인들과 히브리인들로부터 모두 배척을 당했습니다. 처음 40년 동안 아주 '특별한 사람'(somebody)이었던 모세는 이제 자신의 무능을 절감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nobody)이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받은 제국주의 교육을 버릴 때가 왔습니다. 힘으로 힘을 제압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할 때가 왔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를 다 빼신 다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들어 쓰실 인생 제3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