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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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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홍문수 목사 |
참고 : | 2010.05.02 신반포교회 http://www.sbpch.com/ |
요게벳의 눈물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출2:1~10)
한번은 길을 가다가 어느 젊은 엄마가 아들하고 휴대폰으로 통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겉보기에 멀쩡하게 생겼는데, 얼마나 말이 거칠던지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아들이 아마 중학생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속이 상하고 약이 올랐던지 전화기 폴더를 탁 덮으면서 주변 사람들도 의식하지 않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이구~ 자식이 아니고 웬수야, 웬수!”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한참 지켜보았습니다.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큰 축복입니다. 동시에 책임입니다. 때로는 나 자신의 목숨과 바꿀 정도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자식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모 자식 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양쪽에 다 문제가 있습니다. 부모도 부족한 죄인이고, 자식도 부족한 죄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음은 잘 하고 싶은 데 잘 안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부모가 되려면 우리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겸손히 배워야 합니다.
5월은 가정의 달, 특히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 자녀와 후손들을 위해 기도하면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녀들을 위해 진정 좋은 부모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은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요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런 인물이 된 것은 첫째는 물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둘째는 부모의 헌신 때문이었습니다. 성경 본문에 모세의 부모 이야기가 짧게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먼저 성경의 배경을 잠시 말씀드리죠. 연대는 대략 주전 1,500년경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3,500년 전이죠. 그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이민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이민 간 것은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팔려갔다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애굽의 총리가 된 이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 덕분에 고센 땅을 얻어 편히 살면서 민족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달라집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요셉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을 경계하는 왕들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모세를 통해 출애굽 해방을 허락하십니다.
이게 바로 출애굽기의 기록인데, 그 가운데 1장을 보면 모세가 태어난 시대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히브리 민족이 자꾸 번성하는 것은 경계한 바로 왕이 히브리인 말살정책을 펼치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강제 부역에 동원하며 학대합니다.(출1:11~14) 그런데도 계속 번성하자, 이제는 ‘남아산아제한법’을 만듭니다(출1:15~
21). 산파들에게 명령해서 아이를 받을 때 여자아이면 낳게 하고, 남자 아이면 슬그머니 죽이도록 한 겁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의 믿음과 지혜로 남자아이들이 계속 출생합니다. 약이 오른 바로 왕이 이번에는 아예 ‘남아학살법’을 발효합니다. 출1:22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죽이라는 겁니다. 이 명령 앞에 부모도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못하다 온 가족이 몰살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한 상황 가운데 모세가 태어난 겁니다. 그 부모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요? 그런 그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모세를 살려냅니다. 그리고 위대한 영웅을 키웠습니다. 물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그 가운데 분명한 역할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역할이 두드러집니다.
요게벳은 성경에 나오는 여인들 중에 가장 슬픈 어머니입니다. 숱한 세월을 눈물로 보낸 여인입니다. 몰래 아이를 낳고, 탄로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왕 공주의 양자로 보내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 후에도 평생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그 눈물은 그녀의 간절한 소원이었고, 기도제목이었고, 헌신이었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해서 살펴봅니다.
[1] 자식의 생명을 위한 눈물
요게벳의 눈물은 자식의 생명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당시 상황은 모세뿐 아니라, 온 가족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극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그 부모가 어떻게 했습니까? 1절~2절.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아므람)이 가서 레위 여자(오게벳)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남자 아이를 낳고 차마 죽일 없어 숨겨서 키웁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남자 아이라 울음소리도 커졌을 테고,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갑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 부모가 얼마나 애를 태우면 기도했을지! 특히 요게벳이 얼마나 눈물을 흘리면 기도했을지! “하나님! 제발 이 아이를 살려주세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3절~4절 보시죠.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나일 강은 애굽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강인데, 애굽의 고위층 여인들이 목욕하는 곳이 있음을 기억한 것입니다. 당시 애굽 여인들은 나일 강에서 목욕을 하면 건강과 다산의 복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혹시 그 아들이 살 수 있다면 애굽인 고위층 인사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갈대 상자(파피루스로 만든 상자)를 만들어 역청(코울타르-방수제)을 칠하고 강가 갈대 사이에 둡니다. 그리고 딸 미리암을 시켜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 동태를 살피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바로의 공주가 나타난 겁니다. 그리고 그 갈대상자를 발견했습니다. 5절~6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당시 애굽은 전국적으로 토목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바로 왕 공주가 그 지역을 시찰했던 것 같습니다. 아침에 나일 강가에 가서 목욕하면서 태양신에게 기도했을지 모르죠. 특별히 그 공주는 불임증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자 아이를 본 겁니다. 히브리 아이였지만 어쩐지 측은하고 마음이 끌립니다. 공주는 치외법권입니다.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남아학살법을 어기고 살릴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누이 미리암이 공주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제안합니다. “공주님! 유모 구해드릴까요?” 아무리 공주라도 아이를 낳지 않았으니 젖을 줄 수 없죠. 요즘처럼 분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 분유가 없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은혜입니다. 만일 공주가 “됐다~
분유나 먹이련다.” 하면 역사가 달라졌겠죠. 공주는 마리암의 제안에 너무 기뻤습니다. 그 순간 그 아이를 양자 삼으리라 결심합니다. 9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월급까지 구겠다고 말하며 요게벳에게 맡긴 겁니다. 요게벳은 자기 아들 젖 주면서 월급 받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의 생명을 구합니다.
우리 부모들이 평소에는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많죠. 공부 잘 해라, 취직 잘 해라, 성공해라, 뭐해라, 뭐해라 ... 그래서 자녀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그런 문제로 다투기도 합니다. 부모로서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생명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녀가 아파보세죠! 그러면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제발 건강만 해라 ... 그럽니다. 대학 병원 소아 병동에 가 보세요! 그 부모들의 소원이 무엇인지! 조금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럽니다.
천안함 침몰 사고로 지난 한 달 내내 온 국민이 슬퍼했습니다. 며칠 전 46명의 희생자 장례식을 마쳤습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만감이 교차됐습니다. 나라를 많이 생각하는 기회도 됐고, 부모가 뭔지 자식이 뭔지 더욱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됐습니다. 처음에는 함미가 바다 밑에 있을 때 살아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사신이라도 찾으면 좋겠다는 소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시신 수색이 진행됐는데, 그 중 8명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 부모들이 얼마나 애를 태우던지! 시신을 한번만 보기만 해도 소원이 없겠다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나중에 2명이 추가 발견되고 끝내 6명은 산화자로 처리됐습니다. 추가 발견된 박보람 하사의 어머니의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발견되기 전 군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대장님, 우리 아들 함수 쪽에 있을 거예요. 아들 얼굴 한번만 보면 눈을 기증하라면 기증하겠습니다. 평생 귀머거리 장님으로 살아도 좋으니 아들이 돌아오게 기도해 주세요!” 다행히 아들이의 시신이 발견되자 얼싸안고 너무 좋아서 눈물 흘리는 모습이 너무 가여웠습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데, 아들의 유골을 묻으면서 혹은 머리칼 몇 가닥 묻으면서 부모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아까운 내 새끼, 제발 좋은 데 가라!” 이게 부모 심정입니다. 어쩔 수 없이 보내지만 좋은 데라도 가면 좋겠다는 소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너무 욕심을 많이 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이 더 중요한데, 생명이 더 중요한데,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육신이 생명보다 도 중요한 게 뭐예요? 영생이죠. 우리 자녀들이 나중에 좋은 데 가야죠! 좋은 데가 어딥니까? 천국! 천국 가는 길을 알려줘야 합니다. 이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직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다른 것들만 자식들에게 기대하고 요구합니다. 우선선위를 놓치면 안 됩니다. 정말 소중한 육신의 생명, 그리고 영혼의 생명을 위해 눈물 흘리는 부모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2] 자식의 행복을 위한 눈물
요게벳의 눈물은 자식의 행복을 위한 눈물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엄마 품에서 유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마침내 집을 떠나게 됩니다. 10절 보시죠.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요게벳은 궁궐로 가는 모세를 보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한편 다행이지만 자식을 떼어 보내는 어미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또 눈물을 흘립니다. 보낸 후 한시인들 어찌 모세를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는 애굽 궁궐에서 제발 행복하기를 기도했을 겁니다. 직접 챙겨주지는 못하지만, 눈물의 기도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나 모세를 직접 키웠는지 모르지만, 아이가 알아들든 못 알아듣든, 하나님의 말씀을 그 귀에 들려줬을 겁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애굽의 궁궐에 들어가도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라. 알았지?”
요게벳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부모로서 자식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라 :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모라도 항상 자녀들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능력과 시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시121:4~6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항상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자신 뿐 아니리 우리 자녀들을 지켜주시도록 기도하는 게 상책입니다. 기도보다 더 확실하게 자녀를 챙겨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② 부모가 먼저 의인의 삶을 살라 :
부모가 먼저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계속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부모가 자녀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도, 심지어 보지 않는 가운데도 그 영향이 전달된다는 겁니다. 시37:25~26 “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의인의 후손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자녀는 안 보는 것 같아도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해야 됩니다.
한번은 신문에서 이런 황당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50대 남자가 모텔에 방을 잡아놓고 모텔에 출입하는 불륜 남녀들의 사진을 찍어 들이대면서 돈을 뜯어냈습니다. 경찰에 붙잡혀 취조를 받는데, 수사관이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딸이 유학 갔는데, 학비를 벌려고 그랬다는 겁니다. 얼마나 한심한지! 그렇게 강도짓 해서 돈을 부쳐주면 공부 잘 할까요? 인생이 잘 풀릴까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어찌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보든 안 보든, 부모가 살아가는 모습이 그대로 전달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③ 하나님 뜻대로 사는 법을 가르치라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있는데, 자녀 스스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법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신앙의 홀로서기를 가르치는 겁니다. 나의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게 해야 됩니다. 다윗은 일찍이 홀로서기가 된 사람입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 세상에 염려할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6:31~
33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 자녀들이 이런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세상에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헬리콥터 맘’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헬리콥터처럼 자녀 주위를 맴돌며 모든 것을 다 챙겨주는 엄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얼마나 챙기는지, 대학생이 된 후에도 리포트 작성에서 성적 관리까지 챙겨줍니다. 졸업 후에 취직하는 것, 그 외에 월급 관리에서 재정 관리까지 일일이 간섭합니다. 언제까지 어디까지 챙기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과연 자녀의 인생이 행복할까 의문입니다. 아무쪼록 신앙의 홀로서기를 가르쳐줌으로 정말 행복한 자녀가 되도록 눈물로 기도하며 가르치는 부모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자식의 사명을 위한 눈물
요게벳의 눈물은 자식의 사명을 위한 눈물입니다. 인생은 잘 먹고 잘 사는 게 그 목적이 아닙니다. 물질, 권세, 명예 등 모든 소유도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니까, 성취하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좌절하고, 성취하면 하는 대로 허무해지는 겁니다. 소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Next), 그리고 ‘무엇을 위해?’(For what?)입니다. 소유를 얻은 후에 그것을 갖고 무엇을 하는가? 왜 공부하나? 왜 출세하나? 왜 성공하나? 이게 중요합니다. 인생의 지향하는 목적이 중요합니다. 이게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이 있을 때 인생에 의미와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아이를 낳으면서 이미 그 사명을 보았습니다. 애굽에서 학대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자가 혹시 이 아이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기도한 겁니다. 히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he was no ordinary child-NIV)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요게벳은 아이를 품에 안고 이런 꿈을 심어줬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 기도했습니다. 그 아이가 알아듣든지 알아듣지 못하든지 ... 그 간절한 눈물의 기도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신앙을 넣어주셨고, 사명을 넣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히11:24~26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애굽 궁궐의 호화로운 생활을 넘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민족과 역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상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모세의 인생이 존귀해진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존귀한 인생은 행복한 인생(Happy Life)의 목표를 넘어서야 합니다. 의미있는 인생(Meaningful Life)의 목적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히틀러(1889~1945)와 아이젠하워(1890~1969)입니다. 히틀러는 역사의 대역 죄인입니다.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한 인간입니다. 가정교육이 틀렸습니다. 아버지는 성미가 급하고 과격하여 상처를 많이 주었고, 어머니는 사교 생활에만 미쳐 돌아다녔습니다. 어머니가 유대인 남자와 바람난 것 보고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가 독일의 총통이 되지만, 그게 오히려 흉기가 되어 세계를 어지럽혔습니다. 1945년 패전하면서 지하 방공호에서 자살하고 맙니다. 반면 아이젠하워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훈을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모범적인 군인의 길을 걸었고, 후일 역사에 남는 대통령으로 살다가 80세가 되어 평화롭게 천국에 들어갑니다. 두 사람의 인생 사이에 과연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한 마디로 교육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저 내 자식 인생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겁니까? 남은 어떻게 되는지 상관이 없습니까? 아니죠.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육 때문입니다. 모순도 많은 나라지만 그래도 세계를 이끌어가는 이유는 교육의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웃과 역사를 섬기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 의 사립 명문으로 알려진 필립스 아카데미는 대통령을 비롯해서 각계각층의 지도자를 다수 배출한 학교로 유명합니다. 그 건학 이념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하여”(Not for Self)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공부하라는 겁니다. 이기적인 인생이 아니라 이타적인 인생의 목적을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적 교육 사상아 아닙니까?
이와 같은 교육을 통해 세상과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교육은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세상을 바꾼다.” 좋은 교육은 돈만 많이 들이는 교육이 아닙니다. 점수 따서 좋은 대학 가고, 취직 잘해서 잘 먹고 잘 살라고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공부 잘 해서 섬기는 사람이 되고, 그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교육이 참 교육입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성경서 가장 슬픈 어머니였던 요게벳, 그러나 가장 훌륭했던 어머니였던 요게벳! 그녀의 눈물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눈물과 기도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영생을 얻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면 정말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명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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