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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5: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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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아브라함 |
15장 1절-14절.
1절-14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아브라함이 소돔전쟁을 이기고 돌아와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낮잠을 잤나, 기도를 했나, 예배를 드렸나? 1절에 뭐라고 그랬지요? 두려워했다! 아브라함이 두려워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요.
두려워한 이유가 4대 연합군이 또 다시 쳐들어올까 싶어서 두려워했을까? 4대 연합군은 다 죽었으니까 그건 아니지요. 아브라함이 일을 하고 난 뒤에 자신의 행동에 있어서, 전쟁에 나간 일에 대해서,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혹시 잘못된 게 없는가를 염려를 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 앞에 혹시 잘못된 게 없을까? 하나님 앞에 바로 됐을까?’ 하고서!
사람들이 보통은 큰일을 이루고 난 뒤에는 어떻지요? 어딘지 모르게 상 받기를 바라는 그런 게 있을 수 있고, 우쭐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칭찬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누가 안 알아주나’ 하는 그런 마음이 있을 수 있지요. 교회에서도 무슨 큰 봉사를 하고 난 뒤에 칭찬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큰 전쟁을 치르고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혹시 잘못된 게 없을까’ 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그 말이지요.
만약의 경우에 아브라함이 이방사람을 두려워했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이 신앙을 팔아먹은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방사람을 두려워한 건 아니란 말이요. ‘모든 것을 다 잘했지만 혹시 내가 하나님 앞에 뭔가 잘못된 게 없나’ 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모르실리가 없지요.
아브라함이 생명을 내대고 전쟁을 했지요. 그렇지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갔었고, 승리하고 돌아와서는 칭찬을 기다리기보다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일이 없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갖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이 된다 그 말이지요.
아브라함이 최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고, 하나님께서 이에 감동을 받으셨는데 하나님께서 가만 계시겠느냐? 하나님께서 무슨 대책을 세워주시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상급을 주었단 말이요. 큰 상급을 주었어.
무슨 상급이지요? 1절에 보니 하나님 자신을 준다고 그랬지요? ‘나는 너의 큰 상급이라!’ 이보다 더 큰 상급은 있을 수가 없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으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뜨거웠으면! 이게 뭐요? 아브라함이 누구를 독점했다는 증거지요? 하나님을 독점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독점하려고 기도한 일이 있습니까? 기도한 일은 없지요. 다만 종과 횡으로 행한 것뿐입니다.
솔로몬 궁궐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다 잘났다고 그러지요. 그런데 그 중에 제일 인물 없고 못난 여자가 누구였지요? 흑인여자! 술람미 여자! 이 술람이 여자를 데리고 솔로몬이 어디로 들어갔지요? 밀실로 들어갔단 말이요. 그 술람미 여자가 솔로몬을 독차지했어요. 독점이란 말이요.
롯은 지상저축 소유주의로 나가다가 망한 거나 다름이 없지요. 다 빼앗겨 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천국저축 소유주의로 종과 횡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살았단 말이요. 종과 횡으로 그렇게 걸어가다 보니, 그렇게 살다보니 롯뿐만 아니라 소돔성의 백성들도 해방을 맞게 해 주었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또 상급을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이 혈육적 자식은 아니지만 엘리에셀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계대를 이어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비록 내 자식이 아니라도 그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계대를 잇게 해달라는 이거 참 대단한 거 아니요?
아브라함 속에서 ‘누구든 좋으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계대만은 이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는 이건 누구를 위한 거지요? 하나님을 위한 거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 더 뜨거워서 호주머니 것을 다 준단 말이요.
아들이 아버지의 호주머니에 있는 것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지요? 얻어맞지! 얻어맞고 한 개 얻어먹고, 또 달라고 하면 두 대 얻어맞고 또 한 개 얻어먹지? 우리는 달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이 될 것을 찾아서 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루만지면서 한 개가 아니고 한 통을 다 준단 말이요. 하나님 당신도 인간처럼 희로애락도 있고 감동도 있고 감정도 있고 복수도 있고 은혜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가만 보니까 하나님이 감동받을 짓만 하지요? 아브라함이 자기 혈육이 아닌 한 사람을 요청했는데 하나님은 그 말을 듣고 혈육의 아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후손까지 준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감동되게 살아야 되겠다 그 말이요.
이제 성경은 무한한 계시성이니까 생각하는 면을 좀 다른 각도로 해 봅시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구약은 어느 나라 말이지요?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 이렇게 성경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문자로 기록이 됐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러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당신이 사용하는 용어와 문자로 기록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 말이지요.
하늘나라에서 사용하는 문자가 어떻게 생겼지? 문자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통하지요? 방언으로? 천국엔 방언도 필요 없잖아? 천국에 올라간 사람은 워낙 영리해서 어느 지방이나 어느 나라 말로 해도 다 통하는 건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면 어떤 분위기가 천국과 같은 그런 걸 느낄 수도 있잖아요? 특히 명절 때 오래간만에 만나놓으면 밤새도록 잠도 안 자고 웃어가면서 얘기를 하지. 그 때의 그 느낌을 말한다면 아마 그게 천국일 거야. 밤새도록 얘기를 해도 지루하지 않고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성경은 인간의 용어로 문자로 기록이 됐는데 하나님의 말씀이다. 각 나라 말로 번역이 되어 있어서 초등학생도 성경을 보고 읽지. 그렇다면 성경이 정말 그렇게 쉬운 거냐, 아니면 어려운 거냐? 읽기는 쉽지만 깨닫기는 어렵지요.
‘나도 성경을 안다’ ‘뭘 아느냐’ ‘1장에는 뭐가 있고, 2 장에는 뭐가 있고, 3장에는 뭐가 있고’ 하는 그 내용 면을 아는 이게 성경을 아는 게 아니지요. 우리가 성경을 죽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죽 나가면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고 시초가 돼서 퍼져나가기 시작을 하는데 이런 내용을 액면적으로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기록된 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끝 절까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외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따로 있습니까? 따로 있지요.
성경은 인간의 활동이나 생활이 기록돼 있지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을 계시관으로 보지 않거나 계시성으로 보지 않으면 성경구절을 줄줄 외운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성경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고, 성경이 뭔지 알지도 못하고 일생을 끝마칠 수가 있지요. 이러면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계시성과는 먼 것이고, 계시성을 모르고서는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보게 되는 겁니다.
성경 어느 부분을 각 사람이 다르게 깨닫거나 여러 사람이 똑같이 깨달을 수가 있지만 사실 계시성은 무한하기 때문에 더 깨달을 계시는 또 있다 그 말이요. 계시성의 무한성!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건인데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를 뭘 옮겨달라고?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힐 것도 분명히 아셨고 못박혀 죽으려고 오셨고 또 못을 박으면 얼마나 아플 것이라는 것도 다 알지요. 그런데 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 말씀을 했을까?
세상에서도 보면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굉장해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적군에 뛰어 드는 사람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을 그런 사람보다도 더 못한 비굴자로 많이 만들어 놓지요? 십자가를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라는 식으로! 그리고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한 인생이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했다는 식으로 말을 하기도 하지요.
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치신 것도 있는데 평소에는 ‘나의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왜 거기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말을 했느냐 그 말이요. 이걸 보통은 ‘얼마나 아팠으면 그런 소리를 했겠느냐’ 이렇게 갖다 붙이거든.
그러면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런 기도를 하신 것이며, 아픔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런 말씀을 한 것이냐? 그건 아니지요. 우리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종합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의 그 기도는 십자가를 지기 싫은 소리가 아니며, 그 부르짖음은 기쁨의 절정에서 나오는 찬송의 소리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에 그것이 인성의 소리라면 성경은 성령의 영감의 감화를 받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거지요. 그렇잖아요? 그리고 성경을 그렇게 본다면야 믿지 않는 사학가나 문학박사나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더 잘 깨달을 수도 있는 거지.
성경은 분명히 인간들이 기록했고 인간들이 쓰는 용어로 기록을 했지만, 또 인간이 걸어간 사건을 기록했지만 이 성경은 성령의 영감의 감화로 기록되어 있고, 인간의 걸음걸이나 모든 생활 활동들도 성령의 활동의 감화에 의해서 계시에 등용성들이다. 그러니 역시 깨닫는 것도 성령의 영감의 감화로서만 깨닫게 되는 겁니다.
창13:에 보면 롯이 삼촌의 요단평야를 욕심내어 가졌었고,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걸 주느냐 마느냐, 롯에게 양보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그 차원에서 롯에게 준 거요? 딴 뜻이 있지요. 그런데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롯에게 양보를 한 것처럼 보여진다 그 말이지요. 창13:에서 우리가 깨달을 것은 천국저축 소유주의!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나의 물질 시간 정력 목숨 모두 다 드리겠습니다’ 하는 아브라함의 결심입니다.
또 표면적으로는 그 사건이 롯을 위해 일어난 것 같지만 이면적으로 보면 그 사건을 일어나게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렇게 하신 이유는 깨달은 진리를 써먹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사건을 주지 않으면 그걸 못 써먹습니다. 써먹지를 못해요. 그러면 ‘이 진리를 써먹을 수 있는 사건을 주십시오’ 하면 하나님이 사건을 주시느냐? 자기의 기도소리를 듣고 주는 건 아니지요. 하나님 당신이 보시고 주권적으로 주든지 말든지 이렇게 돼 있지요.
또 아브라함의 천국저축 소유주의를 볼 때에 표면적으로는 꼭 아브라함이 빼앗기는 것 같아요. 그런 사건으로 보여요. 그러나 이면적으로 보면 사건을 주는 것은 천국에다 저축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건을 표면으로 보면 뺏기는 사건이지만 이면으로 보면 빼앗는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사건이 오는 게 좋습니까, 안 오는 게 좋습니까? 오는 게 좋습니까? 그렇게 느껴져요?
아브라함이 롯을 인간적인 면으로 볼 때 굉장히 괘씸하게 보일 거예요. 그러나 롯을 통한 사건이 왔을 때에 ‘너는 나에게 심부름으로 왔구나.’ 무슨 심부름? ‘너를 통해서 하늘나라에 투자하라고 왔구나.’ 반면에 롯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하나님께서 왜 롯을 보냈지요? 너는 아브라함에게 가서 뭐 하라고? 심부름 잘 하라고 보냈단 말이요.
이렇게 깨닫고 보면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모두 다 누구의 일을 돕고 있는 거지요? 아브라함 자기를 돕는 거요, 하나님의 일을 돕는 거요? 아브라함 자기 일을 돕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런 눈으로 봐집니까? 우리가 두 눈을 뜨고 껌뻑거리면서 왜 그 면을 못 볼까?
‘모든 존재는 모든 활동은 나의 일을 돕고 있구나, 그렇다면 나는 나의 일을 해야지’ 하고 아브라함이 깨달았다면 전쟁이 온 것도 ‘날 위해 왔구나’ 할 것이니 이 전쟁에 싸우러 나가야 돼요, 안 나가야 돼요? 그런데 보통은 그런 전쟁이 났다고 하면 가재처럼 바위 밑으로 들어갈 거란 말이요.
보니까 하나님 당신이 아브라함을 영웅으로 만들어 주려고 그 사건을 일으켰고 사건을 줬고 또 하나님을 독점하게 하려고 그 사건을 일으켰고. 그렇지요?
전쟁에서는 어느 진리를 써먹는다고요? 종과 횡이란 말이요. 밟는 것마다 다 준다. 종과 횡으로 행해봐라! 대신관계를 바로 가진 상태에서 대인관계를 행해봐라, 그러면 밟는 것마다 다 주겠다. 그 멋있잖아요? 안 그래요?
여러분들, 지금 이게 우리가 종과 횡으로 써먹을 때입니다. 알겠어요? 물론 바보천치 멍텅구리는 지금이 기독교 타락이라는 것을 모를 거고, 일반적으로 믿는 사람은 예배당 건물이 막 올라가고 믿는 사람이 많아지고 여의도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와와’ 하니까 ‘천당이 오려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 바람에 거기 가서 자기도 덩달아서 ‘와와’ 할 거고, 그 다음에 눈이 조금 뜨인 사람들은 ‘아, 이게 기독교 타락이구나’ 할 거고, 더 눈이 뜨인 사람은 ‘아, 이게 전쟁이구나.’ 무슨 전쟁? 기독교가 이방사상적 기독교로 돌아갈 때는 이건 영적 진리사상과는 정 반대이니까, 육은 영과는 정 반대이고 영의 소욕과 육의 소욕은 정 반대이니까 원수가 된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타락된 기독교는 세상과 세상 것을 위해 부르짖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영적 신령한 것을 구하니까 서로 대립이 되는 거지요. 이건 벌써 전쟁이 아니냐 그 말이요. 그들의 배후를 보면 악령의 운동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잖아요.
귀신의 영을 받아서 입으로부터 나오는 그들의 말은 전부 다 육 자랑이고 세상자랑이고 하나의 인간자랑이고 자기의 무슨 능력자랑인 이거는 성령이 아닙니다. 복음운동이 아닙니다. 세상운동이지요. 이런 운동들이 별로 깨닫지 못하는 성도들을 롯을 잡아간 것처럼 막 잡아간단 말이요.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걸 다른 면으로 보면 이건 전쟁이다.
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영적 전쟁을 일으킨 것은 우리로 하여금 종과 횡으로 밟아봐라! 이것도 여러분들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종과 횡으로 행하려고 컴퓨터도 사놓고 복사기도 사놓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도 장애인들이 계십니다만 우리 OOO집사님도 꼭 장애인들에게만 전도하려고 그러지 말고 여러분들이 몸이 장애니까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하잖아요? 그러니 심부름을 시키려면 성한 사람에게도 전도를 해야지? 그렇지 않겠어요? ‘나는 나가서 전도를 못하니까 너는 발이 튼튼하니까 내 문서전도를 받고 나가서 전도를 해라.’
이 진리가 가치적으로 질적으로 굉장한 수준입니다. 분명히 학박사라서 굉장한 수준인 것 같은데 그가 세상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든. 그러니 그 머리가 얼마나 어두우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그런 자들에게 진리말씀을 깨달으라고 주라고.
우리는 종과 횡으로 이걸 써먹자! 그러니까 깨달은 것을 써먹으려고 소원을 해야지요. 또 하나님께서 어떤 환경을 주더라도 기뻐하고!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다가 사건이 오면 써먹어서 실력을 키우고, 또 사건이 오면 ‘아이고, 살통이 났구나’ 하고 또 나가고. 그렇잖아요?
성도가 소원이 달라지면 사람이 달라져요. 아무리 어렵고 큰 사건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영광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까 기쁘게 여기지요.
요단을 저축하고 나니까 생명을 내놓고 자기 소유 전부를 종과 횡으로 써먹어서 천하 영웅이 됐고 하나님을 독점했고 하나님도 감동을 받고 전쟁을 마치고 두려워 하니까 ‘나는 너의 상급이다’ 하는 위로가 오고.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하나님을 닮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진리 진리’ 해도 이 진리를 써먹지 않으면 썩어버려요. 진리가 썩을 때는 자기 인격, 자기 존영 모두 다 썩습니다. 알겠어요? 써먹는다는 말은 그렇게 살라 그 말이요.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고 귀만 높아서 입만 살아놓으면 굉장히 까실까실한 사람이 돼요. 써먹기만 하면 자라나고, 써먹을수록 자꾸 깨달아지고.
이제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한 일에 대해 하나님이 큰 감동을 받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서 하나님 당신을 아브라함에게 주고, 후대까지 또 약속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청원을 했습니다. 무슨 청원이냐? ‘내가 너에게 대접을 받고 싶구나’ ‘무슨 대접입니까’ 3년 된 암양 수염소 집비둘기 등등을 요청을 했지요. 하나님이 송아지하고 집비둘기하고 참새구이 같은 게 먹고 싶어서 요청을 했던 모양이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향하신 의사표시가 있습니다. 명령이 있고 지시가 있고 요구가 있고.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뭘 요구할 때는 그와 가까운 사이겠습니까, 먼 사이겠습니까? 아주 가까운 사이야. 허물이 없는 사이야! 그러니까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사이는 무엇이든지 요구하고 통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란 말이요. 수준이 그렇게 올라갔단 말이요. 수준급으로 안 올라가면 통하지를 않지. 그렇지 않겠어요?
수준급이 뭐요? 이쪽에서 척 얘기를 하면 저 쪽에서 척 알아듣고 반응이 오지요. 이렇게 되면 큰소리가 필요가 없지요. 신앙의 자리가 그렇다면 이거 참 고상한 자리입니다.
물론 여기서 암염소 집비둘기 수양 등등을 바치라는 것은 모든 제사를 말하는 겁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그러면 그렇게 무엇이든지 요구할 수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인간만큼 낮아진 겁니까, 인간이 하나님만큼 끌어올려진 겁니까? 끌어올려진 거지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너무 가깝고 친하니까 하나님을 잡고 슬슬 농담도 할 수 있겠지? 어른이 어린아이를 귀여워 해주면 그 어린아이가 그 어른을 잡고 슬슬 농담하면 어떻게 되지?
하나님 당신이 이 지구상의 그 누구에게도 찾아가지 않고 나에게 찾아와서 뭘 달라고 하니 이 지구상에는 나 외에는 딴 사람이 없다! 이 지구상에는 미인도 많고 박사도 많고 별처럼 사람이 많은데 하나님은 오직 나만을 찾아왔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 많이 있지만, 큰 교회당을 지은 사람도 많고 기도를 많이 한 사람도 있고 연보도 많이 한 사람도 있는데 그러나 나만큼 한 사람은 없다.
318명만을 가지고 4대 연합군을 물리친 사람은 나밖에 없다. 하나님을 최고로 기쁘게 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내 당대뿐만 아니라 내 후대에도 하나님을 독차지한 자는 역시 나밖에 없다. 이것 참 잘났지요? 잘나기 시작한 거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게 되면 최고로 올라간 거지요? 잘난 사람이지요.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찾아와서 대접을 받겠다고 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기 기분이 좋을까요, 나쁠까요? 아브라함이 얼마나 기쁘겠느냐?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물을 요구했을 때 각을 떴습니다. 3년 된 소나 양은 다 각을 떴지만 하나 뜨지 않은 게 있지요? 뭐를 안 떴지요? 그 작은 새 한 마리를 뜨지 않았어.
진수성찬을 다 차려놓고 ‘하나님 오셔서 잡수십시오’ 했더니 하나님은 잡수지도 않고 그만 삐지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기분 나쁘다고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았단 말이요.
레위기 1장 14절에 뭐라고 기록돼 있지요? 성경에는 쪼개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작은 거라고 해서 쪼개지를 않았어요. 아주 작은 것이라도 말씀대로 쪼개야 할 텐데 쪼개지를 않았어. 너무 작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통째로 잡수시라고 그렇게 했던 모양이지? 이러니까 하나님이 삐지고 돌아가서 하나님은 안 오시고 온다는 게 솔개가 오는 겁니다. 마귀가 온단 말이요.
아브라함이 깊이 잠이 들었는데 잠이 들면 자면 자는 건데 뭘 두려워하나? 그런데 ‘두려워하더니’ 라고 돼 있거든요. 신앙의 잠을 볼 수 있지요.
어두움 후에 하나님께서 아침에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너의 후손이 400년간 종살이를 한다’는 저주만 하고 돌아갔습니다.
이게 우리에게 뭘 보여주는 것이냐? 아브라함을 최고도로 올려놓으니 아브라함 왈 ‘나도 잘 났다’고 했습니다. 새는 안 쪼갰단 말이요. 이것을 쪼개지 않으면, 즉 잘난 대가가 400년 동안 포로가 돼 버린단 말이요. 왜 작은 죄를 조심을 안 했느냐?
자기를 겸손의 위치에 두었다면 ‘이 못난 나를, 아무 것도 모르는 이 못난 나를 이렇게 대우해 주십니까’ 하고 삼가 자기를 쳐다보게 되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나도 너만큼 잘났다’ 하게 되면 조심이 될까요, 안 될까요? 조심이 안 되지요.
그 분을 만나기 위해 금식기도도 하고 거룩으로 삼가 조심하고 ‘어떻게 하면 그 분을 만날꼬? 누구를 통해서 그 분을 만날꼬?’ 하고, 만나자고 할 때도 만나자는 그 시간 전부터 미리 가서 기다릴 정도로의 마음의 간절성.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의 상대가 됩니까? 그 분과 만나서 대화를 하는 이것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나는 주님과 언제든지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자격자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 안 되지요. 주님을 제 마음대로 불러놓고 제 마음대로 만나자고 하는 자가 많지요. 우리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 요구대로 다 들어주시는 분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게 겸손일까요? 그게 신앙일까요? 그게 교만일까요?
교회 안에서 기도하는 것도 가만 보면 그런 걸 많이 들을 수 있지? 이건 보통 교만한 게 아닌데 주님을 문 밖에 세워놓고 자기는 돈 얘기하느라고 야단이야. 돈 얘기하느라고 주님을 문 밖에 세워놔.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누구냐?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대접하다니. 나 같은 죄인을 예수님께 봉사를 하게 해 주시다니!’ 성경에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랬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예수님 앞에 잘난 자가 되지 말자 그 말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예수님이 찾아온 게 아니니까! 그렇지요? 아브라함이 잘난 체 하다가 400년 동안 종살이하는 그 저주가 오게 됐습니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을 등용계시로 저희들 앞에 내세우시고, 아브라함 속에 들어있는 생각과 마음, 그 신앙사상을 보여주시고, 오늘날 우리들이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그 신앙생활이 바로 되는 것인지를 아브라함의 사건을 보고 듣고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때의 아브라함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다 똑같은 줄 압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잘난 것 아무 것도 없는 줄 압니다. 저희들이 불러서 주님이 온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의 발작에 의해서 이 못난 저희들을 찾아오시고, 말씀을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며, 어찌하든지 당신처럼 만들어 주려고 하시는 그 은혜 너무나도 감사하고 감사하옵나이다.
행여나 우리들 속에 ‘내가 잘났소, 나도 잘났소’ 하는 하나님 앞에 교만한 마음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어찌하든지 성경 하나 하나 깨달아 나가면서 모든 것은 천국저축 소유주의로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주시는 대로 이용하고 갈 수 있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상에서 볼 때도 어떤 큰 관공서 같은데서 급사 일을 하려고 한다든지, 청소부를 하려고 한다든지 할 때 아무나 감히 그런 곳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에 수종을 들 수 있다고 하는 이것이 저희들이 잘나서 예수님을 믿은 것도 아니고, 저희들이 잘나서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도 아닌 줄 압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 같으나 알고 보니 돕는 그 방편을 통해서 어찌하든지 우리에게 구원을 입혀주시기 위해서 그러한 일도 만들어 놓으시고, 저희들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수종 들게 하는 것인 줄 압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그 일을 하시고, 그 사건을 일으키시니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모든 것은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수종 들며 나가는 복되고 귀한 겸손한 자가 다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행여나 교만해서 받은 은혜 다 내버릴까, 빼앗길까 두렵습니다. 저희들이 더욱 더 겸손함으로 부지런함으로 활동 방편을 통해서, 순종으로 통해서 남은 은혜 다 받고 갈 수 있는 복된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 충만하심이 당신의 백성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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