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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6: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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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2.10.14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려면(4) 의의 흉배
엡6:10-20
아내 접대용으로 교회에 다니는 한 집사님이 계셨답니다.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저 아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교회에 다녔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죽었다고 하는데 믿어지지 않았답니다. 목사님이 천국이 있다고 하는데 천국이 있는지 지옥이 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배 시간에 예의상 참여해 주고, 설교 들어 주는 것이지 주일에도 머리는 주식 투자한 돈 생각과 승진 생각에 안식할 날이 없었답니다. 이 분이 학교 다닐 때 늘 1등하여 좋은 학교에 들어갔고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는데 남 잘되는 꼴을 못 견디는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 목사님으로부터 사탄이 이용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욕심을 버리라는 설교를 듣고 일생일대의 결단을 하였답니다. 난생 처음 산기도를 가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산에서 혼자 기도하자 마귀가 기도를 중단하도록 그를 유혹했답니다. "여기서 내려가면 네 아들과 딸을 하버드 대학에 보내줄게." 그래도 기도했답니다. 또 마음에 마귀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려가면 강남 최고급 아파트를 가질 수 있게 해 줄게." 그래도 아내 접대용 교회 생활이었지만 교회에 오래 다녀서 ‘이번 기회에 욕심 문제를 정리하리라’ 굳게 마음을 먹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답니다. 그 때 마귀의 회심의 한 마디를 던졌답니다. "너한테 준다는 거 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줘도 되지?" 그 말을 듣고 결국 이 집사님은 기도를 중단하고 하산하였다고 합니다.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오늘날도 영적 전쟁터에서 사단은 사람의 약점을 집요하게 붙들고 넘어뜨립니다.
오늘은 영적 전쟁 네 번째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면 첫째는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적은 사람이 아니라 악의 영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문제와 문제의 사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영적으로 강건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강건하려면 우리가 주 안에 있어야 하고, 주님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지난주에 말씀을 본 것처럼 진리로 허리띠를 띠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오늘 네 번째로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의의 호심경(breastplate)을 붙이라고 말씀합니다.
보호할 ‘호,’ 심장 ‘심’ 거울 ‘경’자를 써서 호심경(護心鏡)이라고 부릅니다. 개혁 성경은 의의 흉배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로 “도락스”입니다. 호심경은 가죽이나 금속으로 만든 가슴 가리개로 우리 몸 안에 있는 심장이나 패, 간, 장기 등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인들이 입는 것입니다. 만약 이 부분이 적으로부터 공격당하면 생명에 치명적인 위협이 됩니다. 그래서 적의 칼이나 창, 화살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목에서 배까지 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단순히 장기를 보호하기 위한 흉배가 아닙니다. 의의 흉배라고 수식하고 있습니다.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단지 군인들의 전투복이 아니라 영적 전쟁의 무기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비유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낌을 팍팍 살려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방귀를 단순하게 방귀라고 말하지 않고 "하수구 냄새같이 지독한 방귀!"라고 표현하면 느낌이 팍팍 오지요. 실재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 생생하게 이해하고 느낄 수 있도록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을 비유라고 합니다. 마음의 넓고 평온함을 표현할 때 “내 마음은 호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 학교 다닐 때 다 배운 것입니다. 비유에서 원래 표현하려고 하는 대상을 '원관념'이라고 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끌어온 대상을 '보조관념'이라고 합니다. 방귀가 원관념이고 하수구 냄새가 보조관념이지요. 그런데 보조관념은 아무거나 끌어다 쓰는 것이 아니라 원관념과 모양, 색깔, 성질 등이 비슷한 것을 끌어 쓰는 것입니다. 상징은 추상적인 사물, 관념, 사상 등을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어 머리속에 떠오르도록 하는 표현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평화', '자유' 등과 같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정신적 내용이나 추상적인 관념 등을 '비둘기'와 같이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이 영적 전투에 대하여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의 해석처럼 오늘 본문도 단순한 흉배가 아니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심장은 생각의 중심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심장을 생각하는 곳으로 여겼고 창자는 감성의 중심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슬픔을 표현할 때 마음이 슬프다고 표현을 하는데 유대인들은 창자가 끊어진다는 표현으로 자기의 감성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의의 흉배를 사용한다는 것은 내 생각과 감정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의의 흉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공격하여 넘어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약한 사람만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과 같은 사람도 공격합니다. 다윗 같은 사람도 공격합니다. 요셉 같은 사람도 공격합니다. 사단은 적수가 되지 않는 사람은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냥 놓아두어도 스스로 망하고 지옥가기 때문에 공격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무언가 잘 믿어 보려고 할 때 어려움을 당한 경험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예배하는 자를 찾는 사실을 알고, 예배드리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다는 사실을 알고, 주일날 예배드리러 가려고 하면 꼭 무슨 일이 생겨 예배드리는 것이 방해받았던 일이 기억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붙여야 할 의의 흉배는 무엇이겠습니까?
1. 우리는 자기 의(self righteousness)의 흉배를 붙임으로 영적 전쟁터에서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은 무엇을 공격합니까?
사단은 참소자입니다. 고소자입니다. 이간자입니다.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평화롭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옥 같은 인생, 지옥 같은 가정, 지옥 같은 세상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변화된 우리의 복음적인 생각과 감정을 공격합니다. 심장은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죽이기 위해 공격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도록 공격하는 것입니다. 구원관을 공격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너 같은 것이 어떻게 구원받았어, 너 자신을 알아, 너 과거 어떤 사람이었어, 너 어제 어떻게 살았어, 너 같은 것이 집사라고, 너 같은 것이 장로라고, 너 같은 것이 권사라고, 너 같은 것이 목사라고, 웃기고 있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며 그 따위로 살아...” 세계관을 공격합니다. “창조자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빅뱅된 것이야, 진화된 것이야...어리석게도 과학 이전의 세계관을 지금도 믿고 있어. 참 딱하다.” 인생관을 공격합니다. “인생은 즐기는 것이야. 무슨 죄 타령하며 그렇게 교회에 주여 주여하고 있어... 죄의식 가지고 살지마. 동물이 진화된 거야. 즐기기도 바쁜 세상 죽도록 즐기고 살라고...” 가정관을 공격합니다. “애인 하나쯤 있어야 교양인이야. 문명인은 한 남자에게 한 여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예전 농경생활 때 통하는 것이야... 속박에서 벗어나 즐기라고...” 자녀교육에 대한 생각을 공격합니다.
무엇보다 사단의 치명적인 공격은 영적 생명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라는 사실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오랜 전에 부목사로 섬길 때 담임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고 계시는 데 저는 뒤에 서서 안내를 하였습니다. 설교를 하시면서 목사님께서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말씀하시면서 성도들에게 “믿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 때 뒤에서 돌아다니던 아이들이 “뻥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할 때마다 “뻥이요.”하면서 뛰어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이시고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단이 집요하게 공격하는 부분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목회자 전도폭발을 받았습니다. 그 때 어느 목사님께서 간증하였습니다. 자신은 목회를 하였지만 그 때까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세미나에 참석하여 예수님을 진정 구세주로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에 올라와 성전을 청결케 하는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화제였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는 물론,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가족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세주이신 것을 드러내실 때 예수님의 제자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자신의 말로 고백하고 인생을 예수님께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유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미쳤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남겼습니다.
사단을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네가 구원받을 만한 무엇이 있어야 구원받는 것이지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유혹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로 네가 예수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냐는 것입니다. 네 행동을 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의로운 사람이면 왜 그 모양 그 꼴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네 주제 파악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통해 공격합니다. 우리의 양심을 통해 공격합니다. 목사가, 집사가, 권사가 왜 이 따위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가지고 흉배를 붙여보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보다도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지은 죄들을 더 들추어내어 우리를 공격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가지게 합니다. 절망하게 합니다. 좌절하고 포기하게 합니다.
자기 의를 통해 사탄이 공격합니다. 네가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self righteousness)는 상대적인 의입니다. 때로는 우월의식을 가지게 하고 교만하게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대표적인 주가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매 주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성전을 위해 드렸고, 또 별도로 재산의 십일조를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내 놓았습니다. 그것으로 의를 이루려고 했습니다(눅18:9-14). 세리와 같지 않다고 비교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정죄합니다. 때로는 자학하게 됩니다. 때로는 교만해집니다. 때로는 절망하게 됩니다. 때로는 비교합니다. 도토리 키 재기의 의입니다. 이러한 의를 사탄은 이용하여 공동체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의는 하나님 앞에서는 걸레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64:6)” 더러운 옷 같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절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잘못과 허물 우리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사단을 계속 우리의 과거 죄를 기억하게 만들어 우리를 정죄합니다.
잘 믿는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라고 공격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으면 그 따위로 살겠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니 예수님은 뻥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판매하는 종교 사업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믿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약점을 건드립니다. 교인들이 큰 교회에 몰리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꼬락서니 보지 않고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노출되기 싫고, 간섭받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장이 없습니다. 시냇가의 돌도 부딪쳐야 원망하게 둥글둥글한 것입니다. 피하지 말고 당당해야 합니다. 구원 문제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어떤 비난을 해도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인간들은 보는 것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기편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었는데 누가 우리를 고소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누가 무어라고 정죄해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정죄하지 않습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 43:25)”
2. 우리는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의 흉배를 붙이고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단의 공격을 어떻게 방어할 수 있습니까?
의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인간의 의는 상대적이고 도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이고 신분적인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3절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단의 공격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자기 의로 이길 수 없습니다. 로마서 3:10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의롭게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이길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업적에 의한 의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전가 받은 의입니다. 여겨 주시는 의입니다.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의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의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고 하신 칭의에 의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고린도서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죄를 알지 못한 이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죄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다 예수님께 전가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우리가 형벌을 받고 죽어야 할 것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가된 의, 여겨 주시는 의(義), 칭의 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의 열심과 율법을 지킴으로 즉 자기 의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 동안 자기가 의라고 여겼던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의로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나타난 의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여겨 주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포된 것입니다. 형벌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무죄라고 석방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의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전가된 의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 냄새 나고 더럽고 변화되지 않고 옛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의(義)를 덧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의 흉배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의를 우리가 흉배로 붙일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3장 21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1)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2)”
이 의는 우리가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형벌의 문제는 끝이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9)”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의를 받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4)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로마서에서는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3)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롬 4:4)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러므로 이제 사탄이 우리를 정죄하고 비방하는 화살을 쏘아 우리 마음에 절망적인 죄책감을 가지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고 자포자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때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롬8:33,34)라고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믿음으로 더 이상 우리는 신분적으로 죄인이 아닙니다. 사단 구원의 확신 무너뜨리려고 공격할 때 우리는 단호하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인이 되었다고 대적해야 합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왜 또 죄를 지었느냐?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라고 사탄은 우리의 생각, 우리의 양심, 우리의 감정을 공격하여 침체되게 합니다. 회의를 품게 합니다. 그럴 때 단호하게 대적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하여야 합니다.
3. 우리는 실천적 의(practical righteousness)의 흉배를 붙이고 영적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의의 흉배를 붙이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는 칭의란 불의한 자를 의롭게 만드는 상태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판적 의미에서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즉 법원에서 그 사람의 신분을 의롭다고 선포해 주는 것입니다. 유죄 선고하는 것은 정죄입니다. 사단을 끊임없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죄 있는 자를 죄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 형벌을 다 받았음으로 우리를 무죄하다고 법정적으로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출23:7,신25:1사5:23) 죄의 결과인 죄책(형벌)과 오염 중 형벌을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하여 완전히 제거시켜 주신 것입니다. 영생의 자격을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댓가가 아니라 무조건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입니다. 죄인의 신분이 아니라 의인의 신분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즉각적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고행이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칭의는 은혜성, 법정성, 선언성, 즉각성, 완전성, 최종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칭의를 받았다고 우리가 완전합니까?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까? 아닙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믿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마귀의 자녀라고 말합니다(요일3:6-9).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일 1: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으나(창15:6) 첩을 얻었고(16:3) 거짓말을 하였습니다(창20:2) 바울 이신득의 교리 말하면서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옥 가는 형벌은 면했지만 아직도 오염되어 있습니다. 범죄자의 심령이 그 죄로 말미암아 더럽고, 악해 졌고, 부패해져 있습니다. 바로 칭의를 받았다 하더라도 이 오염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부패한 심령의 내부적 상태가 변화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이다. 바로 도덕적인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 까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단은 공격합니다. “칭의로 원죄 자범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책으로 부터 완전히 벗어났다면서 그런데 뭐 날마다 죄졌다고 회개하고 있었어? 회개 유효기간이 끝난 거야 오늘날과 같은 즐겁고 기쁜 세상에 무슨 죄 타령하고 있어.” “너희들 회개하는 것 보니까 칭의도 불완전한 것이 그만” 불신자가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받게 되는 모든 고난은 죄로 말미암은 형벌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정죄에서 벗어났으므로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범죄할 때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징계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형벌이 아닙니다. 형벌은 하나님께서 법정의 재판장으로 나타나 죄에 대한 응분의 값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이 우리 신자에게 재판장이 아니라 아버지로 나타나 우리 죄를 꾸짖고 바른 길로 나가도록 채찍을 가하는 일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자녀교육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3:12)"라고 했습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히12:7,8).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할 때 성령께서 탄식하십니다(요14:25)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성화로 나가는 하나님의 절대적 의에 근거한 도덕적 의의 흉배를 붙여야 합니다. 이것을 실천적 의(practical righteousness)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ʻ분급된ʼ(imparted) 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누어 주는 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내 속에 심겨져 중생함을 받고 거듭난 삶을 살게 되면 그 생명의 씨앗이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2~13절에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구원받았는데 또 무슨 구원을 이룹니까? 우리가 잘 이해야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구원을 신학적 용어로는 성화라고 합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고후 6:7)” 엡4:24; 5:9에서는 "하나님을 따라 의"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상대적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릴 때 먹이시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한 의를 말합니다(마25:31).
사탄으로 부터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믿는 사람답게 인품과 행위의 흉배를 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의를 계발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의를 부여받았다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태어났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4).라고 말씀합니다. 자연적 본성으로 싸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싸우는 삶이 있습니다. 이미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으니 아들딸답게 사는 것입니다. 왕자답게 왕같은 제사장답게 사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음악가의 손에 들린 악기 같은 피동적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손에 이끌린 살아 있는 자녀와 같은 존재로서, 그 의를 이루는 데 있어서 성령과 동역하는 적극적 주체가 되어 이 땅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의의 열매들이 성도들에게 나타날 때 마귀는 그 공격할 무기를 쓸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왕자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잘 사용하는 비유입니다만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왕이 마을에 시찰을 갔는데 거지가 너무 재미있게 노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거지가 춤을 추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왕도 너무 재미있어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얼굴 모습이 자신을 닮은 것입니다. 공연이 다 끝나고 신하를 시켜 아이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허리를 보니 흉터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 다쳤는데 그 흉터가 있는 것입니다. 왕은 끌어안고 감격합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거지는 어안이 벙벙합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후 왕자가 되었습니다. 신분이 거지에서 왕자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동안 거지로 생활하였습니다. 밥을 거치처럼 먹는 것입니다. 소변을 거지처럼 왕궁 아무 곳에나 흘리는 것입니다. 말을 함부로 합니다. 쌍소리를 합니다. 잠을 자는데 밖에 나와서 자는 것입니다. 덥다고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의 신분이 거지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신분은 그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왕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살면 신하들이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를 비난할 것입니다. 그를 조롱할 것입니다. 왕실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고, 왕자로서 풍성한 삶을 누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 믿고 의로운 신분이 되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실천적 의의 방패를 붙이고 사단을 대적해야 합니다. 자기 의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전가된 의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의는 상대적 의입니다. 전가된 의는 절대적 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살아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으니 그 은혜에 감격하여 의를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성도로써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사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견고한 방어 장비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2)”
사단 우리에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지게 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즐겁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깨달았어도 실행하지 못하게 합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전도 열정 없게 합니다.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합니다. 사단은 별짓을 다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습니다. 한 번 구원받은 사람들 하나님이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사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단은 끊이 없이 우리를 왜곡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율법주의 신앙인이 되게 합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한 신앙이 되게 하려고 합니다. 어차피 내세의 천국 가는 것은 방해할 수 없으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천국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전략에 우리가 무릎 꿇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의 참소와 양심의 가책을 이겨내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하려면
1. 우리는 자기 의(self righteousness)의 흉배를 붙임으로 영적 전쟁터에서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의 흉배를 붙이고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실천적 의(practical righteousness)의 흉배를 붙이고 영적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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