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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엡6:2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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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2.12.9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축복기도
엡6:23-24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바둑을 엄청 좋아하시는 목사님이 계셨답니다. 아주 승부욕이 강하신 목사님이셨는데 장로님이 목사님보다 한 수 위였다고 합니다. 장로님을 이기기 위해 틈만 나면 바둑 나오는 케이블 텔레비전을 보며 바둑 기술을 연마했답니다. 한 주간 동안 장로님하고 바둑을 두었는데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답니다. 한 번 져주면 될 텐데 장로님이 센스가 없으신 것입니다. 어느 날 토요일 설교준비를 끝마치고 그래도 한 번 이기고 주일을 맞이하려고 장로님을 교회에 오라고 하였답니다. 첫판도 지고 두 번째 판도 졌답니다. 세 번째 판도 졌답니다. 목사님은 장로님을 이길 때까지 하려고 밤이 늦도록 바둑을 두셨답니다. 밤늦도록 ‘아다리’만 부르다 장로님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설교를 하는데 성령 충만은 고사하고 피곤과 졸림만이 충만하였답니다. 장로님이 기도하는데 기도는 들리지 않고 바둑을 지게 된 실착이 머리에 떠올랐답니다. 강단에서 찬양은 부르는데 성도들의 머리가 검은 돌, 흰 돌로 보였답니다. 겨우 겨우 설교를 끝내고 축도를 하는데 이제는 이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 "요새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내주 교통하심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있을지어다. 아다리!"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서를 마무리하면서 사도 바울이 복을 빌어주는 축도로 마감하는 것처럼 예배를 드릴 때 목사님들이 마지막으로 하는 것을 축도 또는 축복기도라고 합니다. 이 축도는 단순이 복을 빌어 주는 기도와는 차이가 납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먼저 형식이 다릅니다. 종결어미가 “있을 지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간구합니다. 기원합니다.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는 다릅니다. 이런 기원문을 사도 바울의 일반적인 기도와는 달리 축복기도(축도)라고 합니다. 에베소서에는 2개의 축복기도(본문 1:2)와 2개의 일반적 기도(1:15-19, 3:14-19)가 나옵니다. 축복기도는 바울 서신 첫머리와 끝 부분에 빠짐없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의 13서신 중 26문장이 있습니다.(롬1:7, 롬16:27; 고전1:3,고전16:24, 고후1:1-2, 고후13:13; 갈1:3, 갈6:18; 엡1:2, 엡6:23-24; 빌1:2, 빌4:23; 골1:2, 골4:18; 살전1:1, 살전5:28, 살후1:2, 살후3:18; 딤전1:2, 딤전6:21, 딤후1:2, 딤후4:22; 딛1:4,딛3:15; 몬1:3, 몬1:25)
이중 특별히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을 택하여 대부분의 세계 교회는 예배시간 마지막의 축복기도의 본문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민6:24-26에 나온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아론의 축도를 사용하는 나라도 없지 않아 있지만 우리나라는 공통적의로 고후13:13을 축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는 목사님들이 이 축복기도를 할 때 둘 부류가 있는 것을 극동방송이나 기독교 방송을 듣는 성도님은 금방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축원하옵나이다."로 기도하고 어느 목사님은 "있을 지어다라"고 기도합니다. 기원문으로 할 것인가 명령문으로 할 것입니까 문제입니다. 이 말은 미완료형 동사로 되어 있는데 어느 때는 명령으로 어느 때는 기원으로 해석합니다. 십계명 때 “살인하지 말라. 도덕질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는 기원으로 해석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지금은”으로 시작하고 어느 목사님은 “이제는”으로 시작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이제로 부터 영원까지를” 넣고, 어느 목사님은 “영원까지만” 하시고 그것마저도 하지 않으시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교단 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같은 교단일지라도 총회에서 특별히 법으로 정한 것이 없기 때문에 목사님들의 관점에 따라 다릅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할까요?
성경 헬라어에 지어다를 나타내는 동사가 없는데 우리말 번역에 성경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하여 이 말씀을 첨가 시켜 번역한데서 부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비 존대형 명령형이 되어 젊은 목사가 하면 나이 드신 분이 거부감을 가지게 되고 마치 목사가 복을 주는 당사자 같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겸손하게 “축원하옵나이다.”라고 쓰자고 합니다. 그러나 “축원하옵나이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① 가상 주어가 1인칭이 되어 자기가 복의 주체가 되어버립니다. 축도의 주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어야 하기 때문에 축도하는 사람을 주어로 하는 "축원하옵나이다" 또는 "빕니다"의 종결어는 타당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함께 하여지이다" 또는 "함께 있어지이다"라고 합니다.
② 본문은 기원문인데 서술문 형식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③ 이렇게 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가 종종 들어가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기도와 달리 그리스도가 바로 복의 주체가 되는 것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④ 축도는 사람이 사람을 위해 복을 비는 것인데 다른 일반적 기도와 동일시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과 사람이 다른 누구를 위하여 복을 비는 경우(창12:3,창14:19,민6:23-27.신28:2),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인간이 인간을 위해 비는 복(축복)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길흉화복 모든 것에 다하는 것이지만 축복기도는 좋은 것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지만 축복기도는 자신을 위해서는 하지 않고 상대방을 위해서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도의 내용은 사람의 구체적인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지만 축복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보편적인 복을 내려 줄 것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축복기도는 하나님이 제정하여(창1:22-28), 레위지파들에게 이 축복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신10:8,신21:5) 공중예배에서 행해졌습니다(레9:22-23; 대하30:27)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기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들으신 바 되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대하30:27)” 예수님께서도 어린이를 안고 안수하고 축복했습니다(막10:16)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찾아와 그들에게 축복기도를 해 주었습니다(눅24:49-51) 멜기세택이 아브라함에게(창14:19-20), 이삭이 야곱에게(창28:1-4), 이삭이 에서에게(창27:39-40), 야곱이 요셉의 아들에게(창48:15-16,20), 모세가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신33:1-29)에게 축복기도를 하였고 그대로 이루진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볼 때 먼저 우리는 이 축복기도의 형식을 논하기 보다는 축복하고 축복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 어려운 감옥에서도 성도를 위해 축복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자신을 비난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축복기도를 하였습니다. 편지를 쓸 때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을 위해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축복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세상이 잘 되려면 다른 사람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복받으려면 다른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대선 정국에서 정치인들을 보면 얼마나 상대를 저주합니까? 상대를 축복하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합니다. 상대를 적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가 인생을 살 때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사는 것처럼 상대를 저주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교회생활도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하고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 편 한 식구입니다. 미국에서 시집가면 성 바꾸지 않습니까? 미국에 이민 간 분년이라는 자매가 있었답니다. 이씨 집에 시집을 갔답니다. 이분년이 되는 것입니다. 나씨에게 시집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길년이 이씨 집에 시집가면 이길년이 되지만 주씨 집에 시집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느 편에 서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예수믿고 다 “하”씨 집에 입양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사람들입니다. 족보가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원수가 아닙니다. 형제이과 자매입니다. 서로 축복해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축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곳에 모인 주의 거룩한 자녀에게 주님의 기쁨과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충만하게 넘치기를”
내가 축복받으려면 먼저 상대를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저주하기 보다는 축복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7)"라고 말씀합니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잠11:11)”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사3:10)"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가 잘 되는 길도 하루에 한 번씩 자녀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말은 성취력이 있습니다. 말은 사람의 사고체계를 지배합니다. 말은 감정의 열쇠가 됩니다. 말 한마디가 인생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슬프게도 합니다. 말 한 마디가 듣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고 낙심하게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축복보다 저주의 말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16세까지 자신에 관해 17만 3천개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긍정적인 메시지는 1만 6천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29.6개의 부정적인 메시지에 겨우 2.7개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는 셈입니다. 의도적으로 축복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저주스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하루에 한 번 자녀를 축복하라"를 쓴 롤프 가복은 "자녀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는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의 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축복은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고 그 속에서 전인성을 회복시키는 장(場)이 될 뿐만 아니라 이 땅에 행복을 창조하는 고귀한 사역이다. 하나님은 그 축복권을 부모에게 허락하셨다. 축복은 실로 부모의 특권이요, 거룩한 임무다."라고 말합니다. 축복받는 자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존 트렌트ㆍ게리 스몰리 "축복의 언어"를 통해 자녀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축복할 것인가를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애정 어린 접촉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입맞춤, 안아주기, 안수 등의 축복을 베풀 때에 수반되는 행위입니다. 신체적인 접촉은 축복을 베풀 때에 수반되는 필수 요소라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속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축복은 말로 표현할 때에 효과가 발휘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축복을 받는 자에게 높은 가치를 심어주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소중한 자질과 성품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높은 가치과 칭찬을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축복을 받는 자의 특별한 장래를 말해주라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특별한 장래를 말하는 것은 축복을 베푸는 중요한 방법이고 이를 통해 자녀는 장래의 소망이 넘치며, 삶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다섯째, 축복을 이루기 위한 적극적인 헌신을 하라고 합니다.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고 그 분의 능력과 권세로 보장해 주도록 요청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그치지 말고 자녀들에게 가장 유익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헌신하라고 말합니다.
미국 존스 홉킨스병원 소아신경외과 과장인 벤 카슨은 세계 최초로 샴 쌍둥이 분리수술에 성공한 의사다. 국내에도 소개된 <크게 생각하라>의 저자인 그는 흑인 빈민가 출신의 열등생에서 세계 최고의 소아과 의사로 성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다. 하루는 그에게 기자가 물었다. "오늘의 당신을 만들어 준 것은 무엇입니까 ?" "나의 어머니 쇼냐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 '벤, 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 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면서 내게 격려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자녀들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올 때 한 마디라도 축복을 해 주어야 합니다. 예전에 보면 어떤 집사님은 몸집이 여자 아이를 보고 메주같다고 하여 교회를 나오지 않는 가정을 보았습니다. 말 한 마디도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주지사 로저 롤스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흑인 빈민가 출신인 로저 롤스는 초등학교 시절 무단결석을 일삼고, 폭력을 일삼는 문제아였답니다. 심지어 칠판을 때려 부수기도 했답니다. 새로 부임한 피어 폴 교장선생님은 문제아인 로저 롤스를 불러 손을 펴보라고 하였답니다. 손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손가락이 가느다랗고 긴 걸 보니 너는 틀림없는 뉴욕 주지사 감이야."라고 말했답니다. 순간 롤스는 벼락에 맞은 듯 멍해졌답니다. 문제아인 자기를 칭찬해 준 사람은 폴 교장선생님이 유일했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때부터 그의 모든 것이 달라졌답니다. 그는 뉴욕 주지사답게 단정한 차림을 하고, 교양있는 말씨를 쓰려고 노력했답니다.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섰답니다. 이 문제아가 바로 51세 때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 주지사된 제53대 로저 롤스 뉴욕 주지사입니다.
일곱자녀 중 5명 변호사로 키운 LA 김혜성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자녀교육의 비결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아이들이 주일이면 교회에 모여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서로 우애를 나누게"한답니다. "항상 세상적인 성공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살기를 당부한 것이 자녀교육의 비결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공부가 전부가 아닙니다. 공부 하나로 늘 자녀를 비난하고 저주하면 아이들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남이 잘되기를 축복하면 결국 내가 잘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축복합니까?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기를 원합니다(23)
첫째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화평입니다(2:14-17).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킬 것과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할 것(4:2-3)을 말씀하였습니다. 새로운 사회, 거듭난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 가정, 교회, 사회가 평안해야 합니다. 바울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바울은 신령한 복 가운데 놀라운 평안을 누렸지만 에베소 교인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젠 바울과 같은 신세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가운데 바울을 끝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평안이 있기를 구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평안을 빌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눅 10:5-6)”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이러한 어려운 현실 속에서 우리가 평안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24절에서 은혜를 간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지어다.(24)”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 인간은 한순간도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어느날 프란체스코의 제자가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이 한 아름다운 자리를 그에게 보여 주고 그 자리는 프렌체스코의 자리이니 아무도 안지 못하게 하였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는 너무나도 부러워서 선생님 어떻게 선생님은 이렇게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답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말하면서 가장 큰 죄 인이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제자는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프란체스코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주었다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둘째는 믿음을 겸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평안이 임하면 새로운 공동체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운데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이 겸한 사랑입니다. 단순이 인간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이 사랑다우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부, 친구. 형제간의 사랑도 믿음이 없으면 존속될 수 없습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랑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이 믿음을 겸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에릭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예술'에서 사랑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째로는 관심을 가지는 것, 둘째로는 책임을 느끼는 것, 세째로는 존중하는 것, 네 번째로는 이해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는 것이라"고했습니다.
수필가와 주부편지 발행인으로 은혜 드라마 선교단 창단하여 문화 선교를 하는 박강월권사님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대학 때 2살 연하의 남편 만났답니다. 두 살 때 다락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건을 겪고 소아마비 진단을 받았답니다. 시아버지가 두 살 연상이고 게다가 다리를 절룩거리는 장애 여자라 단호하게 결혼을 반대하였답니다. 교회에서 부모님은 끝내 불참하는 눈물의 결혼식을 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우리 잘살 수 있을 거야. 나만 믿어.”라고 하여 용기를 얻고 살았지만 남편은 그 뒤 7년 동안 부모와의 인연을 끊었고 결국 매일 술에 절어 살았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를 부르며 성경 구절을 벽에 붙여놓고 혼자 가정예배를 드렸지만 남편은 술을 마시고 급기야 3일, 1주일, 1개월씩 외박을 했답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을 꼭꼭 걸어 잠그고 달팽이처럼 안으로 안으로만 숨어들어 갔고, 습관적으로 장롱 속으로 기어들어 가기도 하며 남편을 원망했답니다. 그 괴로움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자 나는 정신쇠약에 불면증, 대인공포증까지 생겼답니다. 세 살짜리 딸도 숨어사는 엄마 때문에 혼자 노는 아이가 돼버렸답니다. 술이 잔뜩 취해 새벽 4시에 들어온 남편을 뒤로 하고 건넌방으로 가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맑은 새소리가 들려왔답니다. 홀린 듯 새소리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데 이번에는 찬송이 울려 퍼졌답니다. 이번에는 한 음성이 들렸답니다. “방금 하늘나라의 소리를 들으셨지요?” 신비체험을 하고 몸에서 기운이 솟구쳤답니다. 주님이 힘든 자신을 안고 “내 딸아, 그래 그래, 괜찮아”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후 남편과 상관없이 딸과 매일 저녁예배를 드렸답니다. 딸은 아빠를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했답니다. 어느 날 밤 12시쯤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답니다. “나 지금 집앞 공중전화야. 데리러 내려와 줘.” 공중전화 부스 옆 벤치에 노숙인처럼 초라하게 앉아있는 남편은 꺼져가는 한숨소리를 내쉬며 땅만 보고 있었답니다.
“모든 것이 허무하기만 해. 그냥 세상을 사는 것도 싫고…그래서 술로 풀어보려고 했어.”
“당신에게 마지막 제안을 하겠어. 새벽기도회와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해. 당신이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 술을 끊고 새 사람이 된다면 다 용서할게.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그게 싫다면 이혼해.” 남편은 그 제안들을 모두 수용했고 출근하기 전 새벽기도회에 참석했고 퇴근 후에는 성경 개인 레슨을 받았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답니다. 딸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남편은 주일 저녁, 수요일, 심지어는 철야예배도 참석하는 ‘예수쟁이’가 되어갔답니다. 그 때 시아버지는 폐암 진단을 받았고 사흘 밤낮을 울면서 남편을 설득해 아버지를 만났답니다. 1개월간 매일 12시간씩 금식기도를 드리며 병실을 찾았답니다. 수술 전 기도 의사와 가족들 앞에서 “주님, 부디 한번만 기적을 나타내 주세요. 아버님을 비롯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생명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증거를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했답니다. 시아버님은 완치 판정을 받아 10년이 지나도록 재발 없이 더욱 의욕적으로 사업을 운영하였고 그 사업을 남편에게 물려주었답니다. 딸의 운동회에 참석하고 오다가 그만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 남편의 등에 업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고 마지막으로 정밀진단을 받았답니다. 40년 동안 소아마비로 알고 살았는데 소아마비가 아니었답니다. 두 살 때 다락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을 때 대퇴부 뼈가 튕겨져 나와 엉치뼈에 붙는 바람에 다리가 짧아져 절게 된 것입니다. 수술을 받고 정상인이 되었답니다. 시아버지에게 “이제 그만 주님을 영접하세요.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셔야 해요.” 그 때 시아버지는 “아가, 그동안 내 죄를 용서해준다면 하나님을 믿으마.”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떻게 아버님을 용서해요.” “아버님,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세요. 그분께서 죄를 다 사해주실 거예요.” 시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답니다. 자신 역시 감격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답니다. 그 날 이후 시아버지는 회사에서 신우회를 조직해 예배드리고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았답니다. 남편은 장로가 되어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고 선교센터를 열고 사업하며 문화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언젠가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기를(23)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 우리 나라가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 되겠습니까?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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