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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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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연재선 목사 |
참고 : | 2009년8월16일 새생명교회 http://nlc1.cafe4.com/ |
출2:1-10
모세
어떤 사람은 베트남의 경제를 ‘아오자이 경제’라고 말한다. 베트남인들의 특성을 말할 때 전통의상인 '아오자이'에 비유하곤 한다. 이른바 '아오자이론(論)'이다. ‘아오자이’란 ‘긴 옷’이라는 뜻이다. 아오자이를 처음 본 사람들은 입고 벗기가 쉬운 줄 안다. 그런데 사실은 보기와는 다르다. 목부터 허리까지 촘촘히 박힌 단추며, 허리를 동여맨 두 겹의 줄까지 있다. ‘아오자이’는 아름다우면서도 입고 벗기 어려운 옷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시장은 전망이 있긴 하지만 결코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는 경고인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베트남의 경제’라는 큰 주제를 ‘아오자이’라는 베트남 여성들의 전통 의상에 담아서 설명하고 보여준다.
이와 유사하게 성경은 이스라엘이란 나라 전체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모세라는 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모세라는 한 개인을 연구하고 본받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1장에서 언급했던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즉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모세라고 하는 한 개인에게 담아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의 힘이 강성해질 것을 염려하여 처음에는 강제노동을 시켰다. 그러나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되자 그 다음에는 산파들에게 명령하여 이스라엘 여자가 출산할 때 남자아이들은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남자아이들을 살려두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스라엘은 점점 번성해 갔다. 그러자 바로는 수위를 높여 아들이 태어나면 그 아이를 나일강에 던지고, 딸이면 살려두라는 명령을 했다.
이런 애굽 왕 바로의 엄한 명령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모세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로 초점이 모아진다. 모세의 부모의 이름은 ‘아므람’과 ‘요게벳’이다(cf. 6:20). 그들은 아이가 잘생긴 것을 보고 3개월 동안 아이를 숨겨서 키웠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역청(tar)과 나무진(pitch)을 칠하고 거기에 아이를 담아 나일강에 띄워 보냈다. 아이의 누이(미리암)는 멀리서 그 광경을 살펴보고 있었다.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시켜 데려오게 했다. 갈대상자를 열어보니 히브리 사람의 아이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그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자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그 공주는 당시의 바로였던 투트모세 1세의 무남독녀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공주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만 그 아이가 어려서 죽었다고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고 있던 모세의 누이는 바로의 딸에게 다가가 아이를 위하여 히브리 여인을 불러 젖을 먹게 할 것을 제안했다. 바로의 딸이 허락하자 모세의 누이는 자기의 어머니이자 모세의 어머니를 유모로 데리고 왔다. 이렇게 하여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 되고, 모세의 어머니는 삯을 받는 유모가 되어 자기 아들을 키우게 되는 기구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은 모세를 등장시키면서 이스라엘의 언약을 모세라는 한 개인에 담아 보여주셨다. 모세는 나일강이라는 죽음에서 바로의 딸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 건져냄을 당하였다. 이처럼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 건져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게 되는데, 이스라엘이 죽음의 물에서 건져냄을 받는 것은 그들의 잘남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 이스라엘이요, 지금의 교회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세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불쌍히 여김을 받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이란 누군가의 인간의 노력이나 잘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무엇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 쪽에서 자신이 섬기는 신에게 어떤 것을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때로는 그것이 돈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행(苦行)이나 선행(善行) 등의 지고(至高)한 모습이거나 윤리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돈이든, 윤리이든 세상의 종교가 가진 동일한 출발점은 결국 인간 쪽에서 신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출발점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있다. 오직 하나님 쪽에서 불쌍히 여기시는 것으로부터 출발되는 것이다. 구원이란 인간의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에 그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다(엡 2:8).
모세나 이스라엘 모두는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다 같이 자기들의 힘으로 그 위기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불쌍히 여김을 받는 방식을 통해서 구원되어진 것이다. 결코 인간의 어떤 행위도 첨가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 방식인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 역시 이런 원리 위에 뿌리는 내리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모임은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이 삶의 근간인 사람은 자신에게 힘이 없을 때 수치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잘 사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반대로 초라한 모습은 수치로 여기며 감추려고 한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의 소유를 힘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부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아무 거리낌 없이 남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란 인간의 잘남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다. 불쌍히 여김 받았음을 감사하며 모이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교회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기도나 헌금 등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교회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드러내는 도구인 것이다.
누군가 희생의 삶을 산다면 그는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늘 원망과 불평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오늘도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은 그릇으로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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