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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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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성홍모 목사 |
참고 : | 2009. 1. 28(수) 영주교회 [서울시 후암동] http://youngjoo.co.kr/ |
자기 민족을 선택한 모세
오늘은 “자기 민족을 선택한 모세”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주에는 모세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모세가 장성한 후에 자기 민족을 선택하면서 겪어야 하는 고난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모세가 성장하면서 장고의 고민으로 밤을 새웠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가 나이 40세가 되었습니다. 나는 바로의 공주의 양아들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생모로부터 교육을 받은 히브리인, 노예민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선택이란 말은 “바하르”라고 하는데, 여러 개의 가능성 가운데 어떤 동기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누구를 택하든지, 무엇을 택하든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마음이요, 자유의사에 의한 결정입니다. 선택은 하나의 의지의 결단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 역시 자기가 감당해야만 합니다. 선택에 따르는 의무나 책임을 남의 것으로 돌려서는 그가 자유의사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선택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우리 앞에 여러 개의 가능성이 놓여있기에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고 하지, 선택할 것도 없이 어쩔 수 없이 하나만 지목하게 되었다고 하면 선택이란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때에도 세상에서는 수많은 민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을 당시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민족도 아니고, 수가 많은 민족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거나, 경건하기에 택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기뻐하셨기에 선택하신 것입니다. 선택에는 의무와 책임도 따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선택받았다는 것은 의무사상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한 특권을 누리는 객체로서가 아니라, 항상 주체로서 복종할 것을 요청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었지만, 다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선택할 것을 요청하시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수24:15-16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개 한 마리와 함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개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갈림길을 만나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될 때에 개가 누구를 따라가느냐 하는 것으로 주인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개는 주인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어느 나이가 되면 인생에 있어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인생 40이란 말은 벌써 어떤 결단을 내렸어야 내렸어야할 나이였습니다. 늦어도 사실 매우 늦은 편입니다.
동양의 성인 공자는 일찍이 논어(論語)의 위정(爲政) 편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이 글은 공자가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학문에 대한 더욱 성숙해지는 심화된 과정을 술회하고 있습니다.
공자가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40이라고 하면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이 부동(不動)의 위상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그의 나이 40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궁 안에서만 자랐기에 자기의 동족 히브리인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힘들게 살기는 하겠지 하였지만, 그렇게도 어려움을 당하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어느 날 모세는 왕궁 바깥으로 나가 동족에게로 갔습니다. 그는 자기의 동족 히브리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극악한 압제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짐승인지, 기계에 불과한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되었습니다. 일하다가다 지쳐서 죽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모세는 왕궁을 나가서 왜 자기의 동족에게로 가는 것입니까? 자기 동족이 혹독한 노동에 매어있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자기 동족 히브리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애굽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마구 치는 것이었습니다. ‘친다’는 말은 치명적으로 단번의 타격이 아니라, 연속적인 타격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여러 번 맞다보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린다고 하더라도 한 두 번 때리고 마는 것이지, 무방비상태의 노예를 두고 그렇게 연속적으로 때리면 기절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것은 비인간적인 처사입니다. 사람은 말로 할 수 있고, 말하면 다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라면 정말 비인간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는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아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다음날 모세가 다시 나가보니, 히브리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돌변하여 모세를 향하여 대들면서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이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라고 쏘아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예 알았습니다. 아직 분을 풀리지 않았지만, 말리는 사람을 보아서 그만 하지요”라고 조용히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리는 사람이 없으면 오래 싸울 수 있어도 사람이 말리면 싸움을 끝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의 사건을 들먹이면서 “너 어제 애굽을 사람을 죽였다는데, 그래 오늘은 나를 죽여보라”고 달려드니, 야단났습니다. 어제 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 났습니다. 살려준 사람이 조용히 입을 다물면 사건은 미궁에 빠질 터인데,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자기가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있다가는 자기가 죽인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죽을 뻔하였으나 모세라는 사람이 자기를 살려주었다고 감격하여 말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자기가 사람을 죽인 것이 히브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었고, 그 일이 탄로되었습니다. 사실 모세는 살인자입니다. 아무리 자기 동족을 위한 일이어도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을 지나친 일이요, 사람을 때리는 악한 애굽 사람이나, 그 애굽 사람을 죽인 모세는 더 악한 사람이요, 잘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살인자를 사용하시는데, 재판할 때는 살인도 정상을 참작하겠지만,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살인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죽은 애굽인도 부모님이 계시고,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다고 할 때에, 그들의 상심은 얼마나 큰 일이며, 아들의 죽음으로 비통에 빠질 것입니다. 더구나 왕궁에 있는 공주의 양아들이 범인이라고 할 때에, 정말 기막힌 일이었습니다.
애굽의 황제 바로는 정보원들을 잘 관리하고 있던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정식으로 고발이 되었는지 모세가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전해들고는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습니다. “아니, 히브리 사람으로 공주의 양아들이 되었으면 조용히 애굽 사람으로 살 것이지, 왜 애굽 사람을 쳐서 죽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편에서 생각하면 우리 속담처럼 모세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을 사람을 건져주었더니, 은혜를 원수가 갚았습니다.
모세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망가는 길뿐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 쳐서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이 사건을 깊이 생각해보면 모세는 왜 편히 살 수 있는 애굽의 왕궁을 빠져나와 자기 동족에게 갔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아직은 미완성의 사람입니다.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조직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에 돌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 모세는 이런 모험을 감행하는 것입니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세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애굽인의 생활 방식과 히브리인의 생활 방식 사이에서 오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지배자의 생활 방식과 피지배자의 생활방식 사이의 갈등, 애굽의 자유 속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압박감과 압제받는 히브리인이 가질 수 있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갈등입니다. 부유하고 자유로운 지배자요, 왕궁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북스러운 압박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히브리인으로 살아가면 영혼이 누리는 자유함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정신적으나 육체적으로 정말 감당할 수 없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육신적인 자유인으로 살아갈 것이냐, 정신적인 자유인으로 살아갈 것이냐, 자기도 지배를 받아야 하는 히브리 사람이면서, 히브리 사람이 아닌 것처럼 처신하고, 왕궁의 호화스러운 생활에,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인척 하고 살아갈 것인가? 그는 히브리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살기 좋은 왕궁의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노예로 살아갈 것인가, 갈등과 고민은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자유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정신적인 자유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동안 호사스럽게 살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양어머니도 좋고, 자기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생어머니로부터 받은 히브리 정신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히브리 사람이 왕궁에 산다고 하여 애굽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히브리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하루 속히 왕궁을 빠져나와 고통 받는 동족에게로 가는 것만이 그가 사람답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한국 사람이 영어 좀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하여 미국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의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 권력과 부유함도 원치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동족이 고통 받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는데, 자기만 왕궁에 잘 먹고 산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요, 민족 앞에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민족이 고통 받고 있는데, 자기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는 민족 앞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히11:25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고 하셨습니다. 사람이란 좋은 자리를 거절하기란 정말 어려운 결단입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릴 것인가, 내 동족과 함께 고난 받으며 자유를 누릴 것인가 모세가 민족을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어떤 보화보다도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결단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고난 받는 자리에 있어도 하나님은 나에게 영원한 상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장차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고난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은 결단의 사람이요, 결심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결단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면서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나를 부인하며, 나의 십자가를 지고 성숙한 제자로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결단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힘없고, 결단력도 약하지만, 성령님에게 나의 모든 의지를 양도하면서 위탁할 때에, 진정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나는 심히 약하지만, 강한 능력의 성령께서 나를 사로잡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갔습니다. 미디안이라는 곳은 지리적으로 여기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지역입니다. 사해 동북쪽으로부터 가데스바네아 부근에 위치한 사해 남서쪽의 바란 광야에 이르는 여러 지역, 시내반도와 그 외 아카바만의 동쪽 해안지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세가 도피한 미디안이란 곳이 꼭 집어 이곳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호렙산 즉 시내산이라는 곳도 시내반도의 제벨무사(모세의 산)이라고 하는 정설처럼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라오즈산이 호렙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라오즈 산에서 산 아래에 있는 ‘바드’라는 도시로 흐르는 시내를 “와디무사”라고 하여 아랍인들은 “모세의 시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장인이 된 이드로의 집터가 있던 미디안은 아리비아의 라오즈산 근처로 보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도망간 미디안은 생각밖에 먼 곳이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모세는 바로의 얼굴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쳐서 거기에서 머물렀습니다. 그 때에 미디안에 제사장 르우엘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일곱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일곱 명의 딸들이 들에 나가서 양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녁때가 되면 양 떼를 이끌고 우물에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른 양 떼를 돌아보는 목자들이 와서 우물물을 미리 사용하지 말라고 딸들을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양떼에게 풀을 더 먹이고 올 터인데, 그 때까지 물을 긷지 말고, 기다리고, 자기들이 와서 양떼에게 물을 먹인 후에야 먹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광경을 우물가에서 지켜보던 모세가 나섰습니다. 아니, 양떼를 이끌고 온 차례대로 물을 먹이면 되는 것이지, 공동우물을 가지고 누구는 일찍 왔어도 기다려야 하고, 누구는 늦게 왔으면서도 먼저 먹여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나서서 목자들을 밀쳐버리고, 이드로의 딸들이 먼저 양들에게 물을 먹이게 하였습니다. 지금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면서도 도망칠 수밖에 없어 이렇게 온 것도 한이 되고 기가 막히는 노릇인데, 여기 와서 보니, 사람답지 않게 노는 사람들을 또 보게 되니, 의분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자라고 하여 무시하고, 아들이 없는 집안이라고 깔보고, 제사장 집안에서 무슨 말을 하겠느냐, 여자들이 힘을 쓰면 얼마나 쓰겠느냐, 무시하려고 한 것입니다. 모세는 악한 일을 보고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났습니다.
제사장 ‘르우엘’이란 분은 그의 이름이 다양한 사람이었습니다. 르우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출3장에 와서는 “이드로”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드로’라는 이름의 뜻은 ‘탁월하다’,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사사기4:11의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떠나”라는 말이 나오는데, 장인이란 말은 처남이라는 뜻도 있어 호밥이란 사람은 모세의 장인의 아들, 곧 처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세의 장인은 르우엘이란 이름과 이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씨족의 이름을 개인의 고유한 이름으로 보았기에 생긴 오류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르우엘이란 이름은 이드로가 속한 씨족의 이름이고, 개인의 공식적인 이름은 이드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에 거의 모든 이름이 이드로라는 이름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것으로, 이드로가 개인의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날따라 일찍 돌아온 딸들에게 어떻게 하여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고 하였습니다. 딸들이 말합니다.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아버지가 딸들에게 말합니다. “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딸들에게 이끌려 들어가서 루우엘의 집에 동거하게 되었고, 르우엘은 큰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아내로 주기를 기뻐하였습니다. 드디어 모세는 이방인이 아니라, 한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아들을 낳고 게르솜이라고 지었는데,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모세는 아들을 부를 때에 “게르솜”이라고 하여, 자신은 나그네요, 동족에게서 떨어진 사람인 것을 상기하였습니다.
사도행전7:22에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40년간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운 사람이요,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나이 40이 되었을 때에 그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났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결단이요, 결심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상하게 보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를 연단의 시간, 훈련의 시간을 가지게 하시려고 미디안으로 불러내셨습니다. 미디안이란 그에게 있어, 연단의 장소요, 영적인 훈련소였습니다.
애굽의 명예와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통받는 자기 민족의 일원인 것을 만천하에 공포하였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칭함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사람이 일생 살면서 민족 앞에 죄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었다고 하면 그는 민족의 이름으로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누릴 수 있는 죄악의 낙을 포기하는 차원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결단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결단이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고난을 선택하였을 때에, 그가 민족을 선택하였을 때에, 그에게 있어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고 자신만이 만족할 수 있는 감격이었습니다. 모세가 민족을 위하여 고난받은 것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은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오늘 하나님과 민족을 선택한 모세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선택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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