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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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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형묵 목사 |
참고 : | 2002년 5월 26 천안살림교회 http://www.salrim.net/ |
출3:7-8, 요4장 21-24
순례의 길
연 2주 강단을 비웠다가 다시 올라서는 일이 새삼스럽습니다. 더욱이 2주 연이어 두 분 목사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놓으셔서 말씀을 전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전도서 말씀처럼, 모든 것이 알맞은 때가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그 동안 촉촉이 적셔진 여러분의 마음을 뜨거운 사막의 열기로 말려 고실고실하게 만들 작정입니다. 지난 열흘 동안의 성지 순례 보고를 드리면서,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의 의미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성지순례 일정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출애굽 여정과 이스라엘에서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물론 엄격한 테마 여행은 아니기에 그 여정에서 접근하기 쉬운 군데군데를 뒤죽박죽 방문하기도 했고, 많지는 않지만 현지의 풍물과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아랍에미리이트의 두바이에서 2시간 정도 기착한 것을 포함해 16시간 비행 끝에 화요일 이른 아침 카이로에 도착했습니다. 너무나 화려하고 찬란한 고대문화와, 다소 초라하고 혼란스러운 현재의 실정이 뒤엉킨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쨌거나 이국의 풍경에 설레는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대체로 반듯하고 잘 가꿔진 공항 주변의 부유한 지역을 벗어나자 사막의 모레먼지를 뒤집어써 뿌연 건물들이 조밀조밀하게 붙어있는 풍경들이 펼쳐졌습니다. 거리의 신호등은 있으나마나 거의가 고장이 났고 멀쩡해도 소용없고 차선도 희미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차들을 포함해 신형 고급차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지만, 우리 나라 같으면 벌써 폐차되었을 법한 차들이 백미러도 없이 생생하게 거리를 달렸습니다. 당연히 교통사고율과 소통상황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고율이 우리 나라보다 훨씬 낮을 뿐 아니라 소통상황도 서울에 비해 훨씬 나은 편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경이롭지만, 더욱 놀란 것은 도심 한가운데 무덤집들(묘지)이 즐비하고 또 그 무덤집들에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시의 주택들은 대개가 붉은 벽돌 집들인데 선이 반듯한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고, 대개가 일부층은 사람이 살고 있고 그 위층이나 옆으로는 계속 공사중이어서 언뜻 보기에는 모든 주택이 건축중인 듯이 보였습니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두서가 없고 게으르게 보일 만한 상황이지만, 서두르지 않고 형편에 따라 살아가는 이집트 사람들의 느긋하고 낙천적인 삶의 방식의 한 단면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인 순례 여정에 들어가 맨 처음 카이로 시내에 있는 예레미아 기념 회당, 곧 예언자 예레미아가 이집트로 피신한 것을 기념하는 유대교 회당부터 들렀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 골목에 있는 예수님 가족의 피신처라고 알려진 곳의 기념교회당을 들렀습니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코레아에서 온 것을 알아차린 남루한 행상인들이 "안녕하세요!"에서 시작해 "두 개에 일 불"을 외쳐대며 호객을 하였습니다. 어디서나 이 풍경은 반복되었습니다. 아예 남대문시장식으로 "싸요 싸요, 골라 골라!"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고, 혼동한 사람들은 "안녕하세요" "니하우" "사요나라"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 피난 교회를 뒤로하고 이집트 박물관을 향했습니다. 서구의 식민 통치 시절 엄청난 분량의 문화재가 서유럽으로 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의 규모는 방대했습니다. 너무 방대해 다 볼 수는 없고 성서와 관련된 인물들의 유물만을 선별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출애굽 당시의 파 라오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람세스2세의 유물과 성서에 최초로 그 이름이 등장하는 파 라오 시삭 왕의 유물 등을 보면서 찬란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일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개 화보를 통해 많이 알려진 것 말고도, 미라와 함께 발견된 30천 여년 전의 정교한 직물도 놀라웠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집트를 가본 사람에게나 안 가본 사람 누구에게나 익숙한, 카이로 외곽의 기자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유적을 방문했습니다. 단지 무덤일 뿐인데도, 그 시설의 규모에 놀랄 뿐 아니라 지금부터 4500여 년 전 천문학과 기하학 고대 이집트 문명의 지혜가 총 집약된 결과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울러 단순히 어리석고 허황한 이방종교의 산물로만 바라볼 수 없는 느낌이 압도했습니다. 그것은, 영혼불멸과 부활의 믿음을 간직했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신앙의 정수이기도 했습니다. 파 라오를 신의 현신 또는 신으로 믿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세계를 고대의 주변 문명과 구별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스핑크스의 코가 한결같이 문드러진 사연도 이 때문입니다. 이방신의 숨결을 끊는다는 의미에서 서구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서의 세계는 고대의 주변 문명 그 가운데서도 고대 이집트 문명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지키고 있는 영생과 부활에 관한 믿음도 바로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우리가 볼 때는 불가사의하게 보일지언정, 그리고 무모해보이기까지 하지만 단지 그렇게 지나치고 말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끔 하였습니다.
그 다음 여정은 출애굽 여정과 직결된 곳들이었습니다. 3000여 년 전 히브리인들이 피땀이 고센 지역 방문이었습니다. 카이로 시내를 벗어나 나일강 하류 삼각주 지역에 해당하는 고센 땅은 히브리인들이 거주하며 강제노역을 한 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람세스2세?)이 곡식을 저장하기 위한 국고성으로 비돔과, 신도시 람세스를 건설했다고 출애굽기는 전하고 있는데, 바로 그 지역으로의 이동이었습니다. 카이로 시내를 벗어나면서 또 낯선 광경을 경험했습니다. 관광산업의 비중이 높은 이집트에서는 외국 방문객들의 안전에 무척 신경을 쓰는 모양입니다. 카이로 경계에서 무장경찰들이 호위한 가운데 선도차가 따라 붙고 한 명의 경찰이 직접 관광차에 탑승했습니다. 이것은 카이로를 벗어난 이집트 전역에서 단체 관광객에게는 공통되는 관행입니다.
결국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저녁 때 국고성 비돔을 방문했습니다. 유적이라 할 만한 것은 인공 언덕 흔적과 그 언덕 층층이 쌓여 있는 흙벽돌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초라한 주택들과 널부러진 쓰레기,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이곳은 비교적 관광객이 드문 지역이라 남루하기 짝이 없는 행색을 한 아이들이 신기한 듯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오기 시작한 사탕을 받아먹기 위해 순식간에 아우성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가난한 아이들을 뒤로하고 첫 숙소로 돌아와 1박을 하고 다음날 고센 지역 가운데 또 하나의 지점 람세스를 방문했습니다. 거의 폐허가 된 유적지이지만 거대한 석상들과 고대의 시설들, 그리고 역시 수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흙벽돌층을 확인하고, 그 어느 층에 히브리 노예들의 피땀이 어려 있겠거니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고가는 길목에서 과연 비옥한 고센 땅의 실상을 확인했습니다.
그 다음 일정은 그 비옥한 고센 땅을 뒤로하고 광야로 향하는 여정이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장관을 경험하지는 못하고, 위쪽의 수에즈운하 지하터널로 가볍게 통과하였지만, 광야 길의 실체는 곧바로 확인되었습니다. 지금은 나그네들을 위하여 일정구간에 수로를 만들어 놓고 경작지도 일구기 시작했지만 출애굽하던 그 시절에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광야 길의 연속이었을 그 길을 지났습니다. 출애굽한 무리들이 사흘길 걸어 당도했다던 마라의 우물을 거쳐 달리고 달려 바위 위에서 물이 쏟아져 나온 현장이자 동시에 아말렉 족과 전쟁을 벌였던 르비딤에 당도했습니다. 간간이 오아시스 지역에 자리잡은 베두인 마을을 지났지만, 아마도 르비딤은 광야 최대 오아시스 지역인듯했습니다. 지금도 제법 많은 베두인들이 양떼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곳의 어린아이들에게 준비된 사탕을 나눠주웠습니다.
그리고 시내산 아래 미디안 광야에 당도하여 여장을 풀고, 그 다음날 새벽 한 시에 시내 산 등정에 올라 예배를 드리고 일출을 목격하고 하산하였습니다. 시내 산 광야의 여정을 거치면서, 이집트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했던 히브리 백성의 심정을 이해할 만했습니다. 그 비옥하고 풍요로운 고센 땅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광야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물 한 모금 찾기도 힘든 그 광야에서라면 비록 자유가 없는 노예로 살아갈지언정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었겠다, 절감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한편으로 자연이나 그 어떤 것에 의존하기보다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역설한 신앙의 원천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해방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여정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었다면, 제가 오늘 여기에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편리한 문명의 이기 덕분에 단 몇 시간만에 이스라엘 국경도시 에일랏에 이르러,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이스라엘 입국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국경의 보안요원들이 모두 예쁜 여자들이어서 두근거리기도 했지만, 느긋하고 여유작작한 이집트 국경의 군인들과 근무요원들의 태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시시콜콜해보이지만 이스라엘 안보를 위해서는 중요한 질문들에 답한 후 가방 하나하나와 온 몸을 검색당하는 것은 말할 것 없거니와 일일이 일정을 확인받은 후에야 대기하고 있던 이스라엘 편의 관광차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상하여 사해와 쿰란 공동체 유적 주변의 광야를 지나고 유대 광야를 지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를 잠시 당혹하게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차에서 내리면 방열쇠 받고 가벼운 가방만 들고 들어가는 게 관례인데, 무거운 짐을 질질 끌고 호텔로비에 이르렀는데도 방 배정을 받지 못해 한 동안을 서성대야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칙사 대접받다 시피 하다 이스라엘에서는 국경에서부터 홀대를 받는 듯해 다들 조금씩 언짢은 기분이었는데, 알고 보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이 유대인의 두 번째 큰 명절인 오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 친지들이 호텔에 모여 명절을 쇠는 바람에 방이 빠듯해서 조정하는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오히려 그 바람에 유대인들의 풍습을 더 가까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셈이었고 저녁식사 때는 오순절 기념 포도주로 만찬을 할 수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당황했던 것은 단추를 눌러도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였는데, 그게 안식일용 엘리베이터라는 것을 잠시 후에 알았습니다. 명절은 안식일에 준하는데, 단추를 누르는 것마저도 일하는 것에 해당해 안식일용 엘리베이터는 자동으로 움직이며 층층이 오르내리도록 해 놨습니다.
어떤 호텔에서든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청학동 그룹에 해당하는 정통 유대인이 15% 가량, 빵떡 모자 눌러쓴 개량 유대인이 30-40% 가량, 그 나머지는 세속화된 유대인이라 하는데, 유대 율법의 전통이 지금까지도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 셈입니다. 유대인의 명절과 안식일, 그리고 이슬람의 안식일이 계속 연이어지는 바람에 일정이 다소 뒤틀리기는 했지만 순례를 하는 데는 한산해서 좋았습니다.
다음 날 예루살렘 순례 일정은 복잡다단했습니다. 세례요한 탄생지 교회, 승천교회, 마가의 다락방, 주기도문 교회, 예수 눈물교회, 겟세마네 동산, 예루살렘 도성과 통곡의 벽 다윗의 가묘 등등을 순례했는데 그 가운데 절정은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 순례였습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14개 지점을 하나하나 통과해 골고다에 이르렀습니다. 그 의미상 절정인 것은 분명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본래 원형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처소마다 육중한 고래등같은 교회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당시의 현장감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하나의 처소마다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신앙심에 경의를 표해야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횟칠 떡칠이 되고 만 것 같아 유감이었습니다. 대개 비잔틴 시대 초기 유적에 십자군 시대에 재건되거나 덧씌어진 교회건축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갈등 현장에,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뒤범벅이 되어 종교적 갈등을 생생하게 증명해주는 현장이 되어버린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라기보다 오히려 혼돈의 도시와 같았습니다. 물론 자연적 조건 및 지형적 조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으로도 큰 감회를 느낄 수 있었지만, 세계의 성지라는 예루살렘이 과연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거룩한 땅일 수 있을까, 한참 고개를 갸웃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성 맞은 편 언덕에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탄식했다는 그 심정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히려 예루살렘 순례의 더 큰 의미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들레헴을 먼 발치에서 내려다보고 하루 일정을 마치고, 다음 날 엠마오 마을을 거쳐 지중해변의 로마 황제의 도시 가이샤리아에 이어, 광야와는 전혀 다른 비옥한 지대인 이스라엘의 북단을 향했습니다. 갈멜 산과 전략요충지 요새 므기또,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과 가나 혼인 잔치집을 거쳐 이스라엘의 수원지 헬몬산 아래 단 지방을 포함한 점령지 골란고원 일대의 비옥함과 풍요로움을 확인했고 다시 남하하여 갈릴리에 도착하였습니다.
혼란스러웠던 예루살렘과는 달리 갈릴리는 그래도 옛 정취를 맛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이기에 빼앗길 것도 많아 오히려 가난한 어부와 농부들의 고장이 된 갈릴리에 이르러, 우리는 예수님 시대 모형대로 복원한 배를 타고 선상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호수변 도시 티베리아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갈릴리 주변 가장 큰 도시인 오늘의 티베리아는 다소 술렁대는 유흥도시와 같은 느낌이었지만, 다음날 아침부터 막달라를 거쳐 그리 멀지 않게 쭈욱 연결된 갈릴리호수 주변을 순례한 것은 예루살렘에서의 혼란감을 진정시켜줄 만했습니다. 산상수훈이 행해졌다는 팔복교회와 베드로 고백교회, 오병이어 기적교회, 부활하신 후 식사를 나눈 바윗돌을 지나 예수님의 주요활동지인 가버나움에 이르렀습니다. 에수님 시대의 흔적을 지닌 가버나움 회당 유적을 확인할 수 있었고, 바로 그 앞, 예수님께서도 거하셨던 베드로의 집 유적도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살아가고 있고 농부들이 거름진 땅에서 농사를 일구고 있는 갈릴리 풍경을 보면서, 풍요로운 땅이기에 빼앗길 것도 많아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갔던 그 땅에서 사랑의 복음을 전했던 예수님의 체취를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강행군이 순례여정의 마지막 일정을 위해 남으로 남으로 가던 중 요단강 세례 터를 들렀습니다. 강이라 하니까 대단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야말로 또랑이었습니다. 시리아 장군 나아만이 투덜댄 이유를 알 만도 했습니다. 거기서 쭈욱 내려와 갈 때 지나쳤던 사해에 들러 물 위에 뜨는 경험을 하며 환호를 하고 생전 처음 머드팩까지 해봤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뒤돌아보다 굳어버린 롯의 부인상이라 불려지는 소금기둥을 보고, 유다 마지막 항쟁지 마사다에 들렀고, 거기서 다시 롯의 새로운 정착지 소알 성을 들러 순례의 마지막 지점 성서시대 이스라엘의 최남단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룻밤을 지내고 아침에 아브라함의 우물을 보고 다시 광야를 거쳐 카이로에 도착한 후 하룻밤을 더 묵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귀국길 비행기를 타고 하룻밤을 지새워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9박 10일이 일정이 끝났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며칠 째 흥분이 가라앉질 않는다고 집사람이 말하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교우 여러분의 배려 덕분에 정말 기억에 남는 순례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기억들은 앞으로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녹아 들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과 그 경험을 더 많이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시간에 오늘 함께 읽은 두 본문 말씀으로, 순례보고의 결론을 삼으려고 합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은, 풍요의 땅에서 살았지만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노예신세였던 히브리인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명을 전합니다. 그것은 과거 한 민족의 한 역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변함없는 구원의 여정을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한 지점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순례의 행진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입니다. 저는 이번에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을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땅이라 부르는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저는 이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구원을 향한 순례의 종착지는 결코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시온 산 언덕 성전도 아니오 사마리아 그리심 산꼭대기 제단도 아닙니다. 그 한 장소에 집착하는 마음이 오늘의 혼란스러운 예루살렘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평화의 땅이 아닌 분열과 갈등의 땅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구원을 향한 순례의 길은, "이 성전을 허물라"고 했던 나사렛 예수, 갈릴리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구원을 향한 순례자의 길에 나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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