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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 모세를 세우심

출애굽기 김강호 목사............... 조회 수 2073 추천 수 0 2013.01.03 22: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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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3:1-20 
설교자 : 김강호 목사 
참고 : 은혜와평강교회 http://www.gap.or.kr 

제4강 구원자 모세를 세우심

  

출애굽기 3장은 아주 중요하다. 연속해서 공부하니까 읽어 와야 한다. 유인물을 보면서 그냥 풀겠다. 출애굽기 3장은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모세를 세우신 그런 기사다. 그래서 1-12절까지는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보낸다. 하는 그런 내용이고 그리고 13-14절은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기록이 되어 있고 그 다음 그 이하에는 즉 여호와께서 어떻게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게 하셨는가 하는 성취의 방법까지 쭉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구원자로 모세를 세우신 기사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누구 시며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는 구원에 대한 전 문제가 여기 3장에 다 요약이 되어 있다.

 

3장의 내용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신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 시며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서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하여 이스라엘을 구원 하사 그들의 하나님 되시는 것이며 그 일을 권능의 심판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다. 그것이 3장의 내용이다. 무슨 내용이냐면 구원자로 모세를 세우시는데 그분은 누구시냐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 시고 지금 모세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냐?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로 이스라엘을 구원해서 그들의 하나님 되시는 것이고 그러면 그 일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권능의 심판을 통해서 이루신다 이렇게 구원에 대한 전 문제들이 3장에 요약되어 있다.

 

모세의 부르심에 대한 신약 성경에 증거는 다음과 같다. 신약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부분을 한 번 읽어야 되겠지요? 물론 제가 조금 요약해서 인용한 것이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주의 소리가 있어 나는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데 주께서 가라사대 내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고난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저희를 구원하려 내려 왔나니 시방 내가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 떨기나무 떨기 나무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은 자가 이 사람이라. 이 출애굽기 3장과 행7장을 가지고 해석하겠다. 그 말이다.

 

모세를 부르신 곳을 하나님의 산 호렙이다.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그렇게 되어 있다. 양을 끌고 그러면 왜 호렙을 하나님의 산이라 그렇게 붙이는가? 그것은 호렙산을 여호와의 산이라 한 것은 회상 적인 기록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다 있고 난 뒤로 모세가 기록했기 때문에 회상 적인 기록이다. 그런데도 회상 적인 기록인데도 그 산을 하나님의 산 그렇게 말함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자기를 만나시는 언약 체결에 대한 문제가 전면에 깔려 있다.

 

모세를 부르신 때는 사십 년이 차매 하고 사도행전은 해석한다. 모세를 예비하시고 부르신 모든 사건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계한다. 구원자는 구원받은 백성의 머리이다. 성경에서 사십 년은 죽음과 부활의 시기이며 시련의 시기이다. 우리는 구원자와 구원받은 백성을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구원자는 구원받은 백성의 머리요 그 머리의 구원 때문에 몸의 구원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세는 저 위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레위지파중에 다 죽도록 명령을 받았을 때 레위지파중에 한 사람을 예비하셨고 그가 곧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이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불렀는가? 사십 년은 바로의 궁전에서 바로 공주의 아들로 양육을 받았는데 사십 년이 차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더니 애굽의 모든 보화를 거절한 사람이고 자기 백성에게 거절을 당해 사십 년 동안 나그네 생활을 했는데 사십 년이 차매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 했을 때 모세는 애굽에 대한 모든 소망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가? 목동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성경은 그의 나그네 생활을 기록하면서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게르솜이라 했다. 그것은 내가 이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성경에서는 믿음의 백성의 아들 낳는 기사에서 그를 통한 은혜의 일이 그 후대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일을 나타낸다.

 

그런데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피난 갔을 때 그 행사를 기록하기를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자기가 그 땅에서 나그네 되었다고 기록했다. 모세는 애굽 궁중에 있을 때에도 자기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산했고 그리고 그 땅에서 쫓겨나 외롭게 유리했을 때도 그는 그 땅 백성으로 정착한 사람은 아니다. 그 말이다.

 

그래서 그 머리의 행적이 곧 백성의 은혜로 미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개념이고 구원은 저 위에서 누가 구원해 준 것이 아니라 머리에게서 이루어진 일이 그 몸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해석을 보면 모세 인생을 사십 년이 차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고 사십 년이 차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고 이 사람이 사십 년 동안 자기 백성을 인도했다. 그런데 그들이 모세를 거절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너희들이 거절한 모세를 구원자로 세우셨는데 그가 어떻게 말했냐? 사도행전을 자세히 보면 그가 나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리니 그렇게 말했던 자다. 그렇게 말하면서 모세의 구원 사건에서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연결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우리 나라 식으로 부록의 나이 그런 개념이 아니다. 그러면 모세는 얼마큼 못되 먹었으면 80살이 되도록 안 쓰겠어요? 그런데 성경은 모세가 가장 온유하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40년은 영적인 훈련 40년은 애굽에서 군주로서 훈련 그래서 군주로서 훈련보다 영적인 훈련이 중요하다 하는 이런 말은 성경을 모세 개인의 성장 과정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성경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가 모세인데 모세에게 나타난 구원은 무엇인가? 바로 모세가 그러저러한 일을 지났기 때문에 바로 그를 통한 구원 역사가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말하지 개인의 성장 기록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40년을 성경에 보면 이전에 말씀을 드렸지만 제일 처음은 노아 홍수 기간이었고 그리고 모세가 40일을 두 번 산에 굶고 올라가 있었고 그런 기사가 있다.

 

사도행전에서 40년 40년 해석을 한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의 해석을 따라서 구약 성경을 봐야 한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그런 말은 없다. 나이 40이 되매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 그런 말들은 없고 여기 2장 11절은 모세가 장성한 후에 그렇게 되어 있지 40살이라는 나이는 없고 모세를 불렀을 때 40년이 차매 그런 말도 없고 단지 어디서 모세의 나이를 기록하냐면 드디어 자기 백성을 위한 구원으로 진행될 때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마지막 장면 이쪽에서 레위지파의 족보를 쭉 기록하고 이 두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뤘다 했을 때 그 때 모세와 아론의 나이를 기록한다. 그 전에는 기록하지를 안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더 역사적인 기록 방식이고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완성된 시점에서 해석적인 기록 방식이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의 해석을 따라서 구약을 읽어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도 토대는 항상 구약의 토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40년이 차매 해서 모세를 부르신 시기를 40년을 하나님이 채웠다. 40년이 차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그 40년이 찼을 때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항상 나그네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40년은 항상 죽음과 부활의 기간처럼 그렇게 때문에 언약 백성의 시련의 시기로 그렇게 나타난다.

온 세상이 홍수로 죽었을 때 노아도 방주 안에서 죽은 것과 비슷하다. 실제로는 안 죽었지만 그리고 방주로부터 올라왔을 때 그는 새로운 세계를 받은 것이다. 그런 의미로 죄된 옛 세상에서 죽고 하나님의 의가 거하는 새로운 세계를 상속받은 조상이다. 그런 의미로 죽음과 부활에 상응하고 그 시기에 방주 속에 있었던 노아는 시련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어야 한다. 마치 시내 산에 모세가 올라갔을 때도 그렇다. 그는 40일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의 중보자의 죽음과 같다. 그런데 그는 언약의 돌 판을 받아 내려온다. 어떻든 구약에 40일을 굶으면 그런 것은 일단은 죽음의 숫자다. 그런데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서 죽음과 부활의 형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고 그 때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을 원망해 버렸다. 하루하루 만나 받아먹고 사는 것을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 앞에 순종했는데 그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그랬을 때 40년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시련의 시기로 그런데 40년 동안에 옛 이스라엘은 죽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계수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항상 죽음과 상응하고 그리고 언약 백성의 믿음의 시련과 상응하는 그런 시기다. 그런데 40살이 되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고 40년이 차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세를 부르신 기사를 모세가 사람되도록 기다린 기사로 읽으면 안된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여호와께서 세우신 모세를 이스라엘이 그들의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우신 것을 거절한 것인데 이를 하나님은 그들의 관원과 그들의 구원자로 보내셨다. 그렇게 사도행전은 해석을 한다.

 

이것을 세대론 자들은 바라 먼저 모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는데 거절을 받았고 자기 백성의 거절을 받은 모세는 미디안에서 40년 동안 사위로 구원자로  영접을 안 받았냐?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면 또 다시 자기 백성에게로 간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이 거절했는데 거절한 예수를 지금 이방인이 믿고 지금 이방인이 믿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또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간다. 그러니까 천년 왕국이 도면 예수님이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야 한다. 왜 다시 모세가 애굽에 가는 것처럼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한다. 그것은 성경을 구원 역사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신학 도식을 따라서 해석을 한 것이고 구원 역사적인 해석은 비슷한 장면이 있으면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내용을 따라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고 이방의 구원자고 또 이방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시 새로운 시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로 그들로 믿고 돌아오는 것이다.

 

로마서는 그렇게 해석을 한다. 천년 왕국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방문한 새로운 시대로 있지를 않는다. 여기서는 그들이 거절했던 모세를 하나님이 보내셨다. 사도행전에서는 이스라엘의 거절에 초점을 맞추려고 그런다. 그들은 거절했어도 하나님은 이렇게 인도를 하지 않으셨느냐? 그런데 그 약속으로 예수님 오셨는데 너희들이 이 성전을 의지함으로 그를 거절하느냐? 지금 그것을 사도행전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세대론 들의 해석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르신 분은 여호와의 사자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사도행전은 모세를 부르신 분을 천사라고 말하며 시내 산에서 생명의 말씀을 주신 분도 그 천사라고 말한다. 여기 보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는데 여호와께서 모세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를 일치시키고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그분을 천사라. 천사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를 불렀는데 그 천사가 시내 산에서 생명의 말씀을 받아서 우리에게 주셨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천사 이런 해석 때문에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사람들 우리 나라 같으면 대표적으로 여호와 증인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가엘 천사다. 또 봐라 계시록에서도 미가엘 천사가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과 싸우지 않냐 그러니까 미가엘 천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제 그렇게 말들을 한다.

 

그런데 여기 구약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를 일치시키고 있고 사도행전에서 그분을 천사라고 부르신 이유는 이제 예수님께서 사람의 형상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약 때는 천사 적인 영광으로 더욱 두려운 방식으로 구약 때 나타났다. 천사는 하늘에 영광을 직접 반영하는 그런 존재들로 있었다. 그래서 구약 때는 천사 적인 영광으로 나타났는데 그 분이 신약 때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는데 그래도 구약 때는 천사 적인 영광으로 비췄던 분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지 그분이 천사는 아니다. 또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를 일치시키고 있는데도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의 사자고 여호와는 여호와다. 이런 서로 일치시키는 표현이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해석되어 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서는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다. 존재 방식에서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다르다.

 

다 하나님의 본질이고 본체의 영광이어도 인격적인 특성으로 구분된 분이시다. 그런데 왜 신약 때도 예수를 살려주는 영이다 예수와 성령을 동일하게 줄긋고 있고 또 예수님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인가?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같게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여호와의 사자의 일은 곧 여호와의 일이다. 또 여호와의 사자의 일 곧 그리스도의 일은 누구의 일인가? 곧 영으로 그런 일을 하신다. 그러니까 때문에 예수님께서 땅에 계셨을 때에는 육을 따라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지만 그가 죽으신 뒤로 하늘에서 중보자 사역을 시행하시는 것은 다윗의 혈통을 따른 육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죽은 자 가운에서 일어나신(성령이 곧 생명의 원리) 곧 성령으로 부활하신 분으로서 그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가 땅에 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그의 존재 질서에 인성을 덧 입으신 것처럼 그가 죽음의 권세를 벗으시고 하늘 보좌에 오르셨을 때는 그는 영으로 부활하셨고 영으로 그 일을 하신다. 그러니까 성령과 예수를 사도행전과 요한 복음에서 거의 동일화시킨 이론들이 그런 것이다.

 

이런 것은 구원 역사적인 의미 때문에 서로 동일화시켜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존재론적으로 구분이 안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부르신 분의 형상은 떨기나무 가운데 있는 붙는 불이신 데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은 모세가 두려워 떠는 것처럼 소멸하는 불이시다. 그런데 떨기나무가 타지 아니하면 모세도 죽지 아니하였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나무가 타서 사라지지 아니하는 것은 불같은 시련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표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중에 임하신 은혜의 표상이다. 이 은혜의 임재가 임마누엘로서 교회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모세가 보니까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사라지지 않는다. 그 묘한 불이지요? 불이 붙었으면 사라지고 없어져야 하는데 불은 붙었는데 떨기나무가 안 사라진다. 묘한 불이구나 하고 모세가 보러 갔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을 한다. 만약 모세가 보러 가지 안했으면 어떻게 하냐? 하나님이 말하지 못했을 것 아니냐 그러니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이 아니냐 그러는데 그것이 아니고 모세는 여기서 영적이고 상관이 없고 불이 붙었는데 사라지지 않으니까 이상해서 가본 것뿐이다.

 

이것이 영적인 일이고 하나님의 계시 인줄 알고 보러 간 것은 아니다. 모세는 그냥 요새 소 풀먹이다가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사라지지 않아서 보러 간 것뿐이지 무슨 영적인 일이고 상관이 없다 그 말이다. 갔더니 떨기나무 가운데서 불렀다. 모세야! 모세야! 너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 신을 벗어라. 그 때 모세는 그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얼굴 뵙기를 두려워서 얼굴을 가리웠다. 여기서 신을 벗으라 그 말은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하니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섰다는 증거고 신을 벗는 것은 종의 자세다. 아마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의 신발에 대한 계시가 없다. 하나님의 뜰은 거룩한 곳이면 그것은 종으로서 봉사하는 것이어서 그런 의미로 신을 벗으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다.

 

아마 신학생들이나 청년들 보면 이런 설교를 많이 할 것이다. 네 발에 신을 벗어라. 그 신으로 어디 어디 다녔냐? 이 신으로 어디만 다녀야 되겠는가? 교인 집에만 다니고 교회만 다녀야 되겠지요? 그전에 영화관에 다녔던 신 모세가 그전에는 목동이었으니까 순 소똥 묻은 신이지. 그런데 이제 그 발로 성소를 거닐어야 하니까 신을 벗어라 그런데 그런 말이 아니다.

 

성경은 도덕적인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고 너는 종이니 너는 내 앞에 신을 벗어라 그 말이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했다. 그 말이지 모세의 인격을 고쳐라 너희들아 발에 신을 벗고 새 신을 신으라 그런 말이 아니다. 그 말이다.

 

아마 요새 큐티 한다고 하면서 이 본문을 보면 아하! 모세보고 신을 벗으라고 했구나 오늘 내가 행할 길을 조심해야 되겠구나 어디 가야 할지 이렇게 읽지 말라 그 말이다. 이것은 모세의 인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고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불은 보통 해석하기를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을 용광로로 해석을 안했냐? 또 더 뜨거운 용광로는 바벨론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불이었거든요? 그렇게 안하냐? 그러니까 떨기나무에 불꽃이 붙은 것은 이스라엘이 불꽃과 같이 애굽에서 시련을 받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는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이신 데 친히 떨기 나무 가운데 임하셨는데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않는 것은 그가 심판의 주로 임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 거하시고 함께 하시는 분으로 임하셨기 때문에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않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모세도 죽기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중에 거하실 하나님이 지금 딸기나무 가운데 계셔서 지금 모세와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마누엘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들 중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고난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이것이 임마누엘로서 교회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떨기나무 가운데, 시내 산에 그리고 성소에 임하신 하나님께서 때가 되매 임마누엘로 사람 중에 오셨는데 그분은 이렇게 두려운 형상으로 오시지 안했고 하나님과 그 제자들이 함께 먹고 마셨는데 그들이 죽은 적이 없었다. 죄인들도 함께 먹고 마셨는데 그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고 지금도 그분은 영으로 교회 안에 임재해 계신다. 그것이 은혜다.

모세를 부르신 목적은 애굽에서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듣고 친히 이스라엘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 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광대하고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약 속의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려오사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인도 하사 가나안 땅에서 함께 거하시는 것이 구원의 목표이다. 모세를 부르신 목표를 말씀하고 있다.

 

7절부터 보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내 백성의 고통을 보고 내가 내려와서 이러이러한 땅으로 인도하리라. 그리고 하나님이 너를 보낸 증거가 무엇인가? 12절에 보면 네가 애굽에서 이 백성을 인도한 후에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즉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면까지를 일단을 구원의 목표로 제시한다. 그래서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그들이 지금 애굽의 종살이하고 있다. 그들은 애굽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애굽의 종에서 건져내어서 약속의 땅으로 불러들이시고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하는 것이 모세를 보내신 목표인데 하나님을 섬기는 첫째적인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시내 산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의 삶은 시내 산의 삶이 가나안 땅으로 옮겨진 것과 같다. 모세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모세가 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이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증거이다. 호렙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언약 체결이 구원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일을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에서 완성하셨다.

 

시내 산에서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모세를 불러서 그들을 가나안 땅에 심을 약속의 증거다. 시내 산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다. 그 하나님이 지금 어디 계시는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를 만나고 계신다. 그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그 언약의 교제가 가나안 땅에서 온전한 방식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세가 그들을 구원해도 구원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역사 하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 일이 드디어 교회 안에서 완성되었다. 우리들에게 영원한 안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은 지금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우리 중에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신 분은 스스로 계신 자이시다. 이 말은 야웨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이다. 모세를 이스라엘을 위해서 보내신 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야웨이시며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대대로 기억할 영원한 이름이요 표효이다.

 

모세가 물었다. 그러면 내가 가서 나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조상들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났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묻기를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가 무엇이라고 할까요? 이름은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본성을 이름이라고 그런다. 이름 그랬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물었을 때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할 것인가? 했을 때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그렇게 말씀했다. 14절 끝에 보면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렇게 하고 15절부터 스스로 계신 자에 대해 더 설명을 한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표효니라. 여기서 자기 이름에 대해서 더욱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그들을 시내 산에서 만나시고 그리고 애굽의 모든 보화를 취하게 하겠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스스로 계산 자란 말은 야웨 여호와 이 말은 네 거룩한 문자라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그들이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대명사 식으로 불렀다. 주 즉 아도나이로 그러기 때문에 이 이름의 발음을 모른다. 더구나 포로 후로는 더 모를 것이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은 글이 전부 자음으로만 되어 있고 모음이 본래 없다. 요새 식으로 하자면 가령 자음으로만 써 놓고 그 글을 읽으라고 하면 읽어질까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읽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 한글을 표음문자라 읽기 어려운데 이 사람들 글자는 한자처럼 상형 문자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하늘천 하고 토가 붙여졌으니까 읽지 아무것도 안 붙여 놓고 읽어라 하면 못 읽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것이 하늘 천이 라고 조상 대대로 외웠다. 그러니까 착 보면 천하고 읽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안 쓰고 그 말을 보면 못 읽지요.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은 네 거룩한 문자인데 그들이 본래 그 이름을 안 불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그것을 더구나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발음에 있어서는 여호와니 야웨니 여러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본들에 있는 모음들을 보고 또 다른 사본들에 있는 참고해서 이름을 붙여 보는 것이고 정확한 발음을 확증될 수 없는 조항들이다. 그런데 그 이름은 어떻든 스스로 있는 자가 그래 놓고 스스로 있는 자는 누군가? 조상들의 하나님이다. 그렇게 15절에 해석을 해주고 있잖아요? 그래서 야웨라는 말은 스스로 계신 자라는 말이다.

 

스스로 있는 자를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이 이름이 대대로 기념될 이름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스스로 계신 자라는 야웨의 의미는 존재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조상들의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이며 미완료형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이제 까지 스스로 있는 자 이것을 조직신학적인 방식으로 써서 하나님은 자존하는 분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지으심으로 존재하는 의존적인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존재 방식이 다른 자존적인 존재이시다. 이 자존으로부터 구원의 자존을 연혁 적으로 추론해 왔다. 스스로 존재가 자존적이니 그의 하는 일도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지 다른 피조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내용상은 맞는 말이지만 그것은 성경 본문 자체가 말하는 것은 아니고 조직신학적으로 소위 철학적인 방식으로 해석해 들어간 것이지 성경 자체가 말하는 내용 자체는 아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조직신학적인 해석 방법을 교정하겠다는 말이다. 이론상은 틀린 것은 아니다. 철학이 철학의 체계를 가진 것처럼 신학적인 체계로서 그것이 맞는 말인데도 그 본문이 그 말을 하냐 했을 때 아니라 그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이 아니냐? 맞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존하는 분이다. 다른 피조물과 존재 방식이 다르다. 그것은 자존한다는 신에 대한 속성으로부터 그의 구원의 자존을 추론해 내는 논리적인 연혁이지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의미는 아니다 그 말이다. 그런 의미로 이전 해석을 교정하겠다 그 말이다. 그러면 무슨 말이냐 하면 여기 15절을 보면 스스로 있는 분을 어떻게 설명하냐면 나는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스스로 있는 분은 여호와이신 데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고 이것이 영원히 기념될 이름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렇게 했다고 해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전에는 나를 여호와로 말하지 않고 전능 자로만 말했는데 내가 너희에게는 여호와로 알리노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서 친히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던 하나님이 자기가 조상들의 하나님 되심을 즉 자기가 자기 되심을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서 드디어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여호와로 드디어 자기를 나타내신 것이고 이 여호와가 창2장부터 여호와로 나타나 있다.

 

그것은 창세기의 창조 이전의 창조 역사를 해석적으로 기록하기 때문에 여호와가 곧 에덴에서 사람을 짓고 역사를 출발하셨던 분이시다. 그렇게 기록해 나가는 것이고 여호와의 이름이 역사상에 처음 계시되는 때는 지금이다. 지금 모세에게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세를 통해서 창세기를 기록하고 있을 때에는 이전의 역사를 해석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전에 창세기에서 여호와가 나왔는데 여기서 처음 나타난다고 그러는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그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여호와로 자기를 나타내시고 6장에서 이제 모세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역사를 진행시켰을 때도 다시 자기를 여호와로 말씀하시면서 내가 조상들에게는 이 이름으로는 말하지 않고 전능 자로만 나타났지만 이제는 나를 여호와로 나타내노라. 그런 말의 의미가 드디어 스스로 여호와 되신 분 소위 스스로 존재하신 분의 그 역사를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거기서 자기를 여호와로 계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조상들의 하나님 되심 조상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역사를 진행시킨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서 나타나는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그 후손들에게서 이뤘을 때 하나님은 자존하는 분이시고 스스로 원하시는 은혜의 일들을 그가 이루시는 사실을 거기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분이 신약의 주 예수시다.

 

바로의 신약의 구원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와 되심이 완벽하게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 역사에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신다. 그는 자존하시는 분이시다. 그가 만물을 지으셨고 그리고 자기 백성을 지으신 분이시다. 자기 백성의 구원 역사에서 자기를 나타내신다. 항상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지 창조 이전에 존재에 대한 문제로부터 출발을 하고 그렇지를 않다. 그 점을 조심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후손들에게서 성취하신다. 그리고 후손에게서 자기 이름이 대대로 빛나게 될 것이다. 그는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시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다. 그러니 여호와의 여호와의 되심은 구원 역사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스스로 계신다는 야웨의 의미는 존재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분이시라는 의미이며 그러기 때문에 미완료형이다 하는 말은 알아만 두십시오. 미완료형이다 하는 말은 알겠지요? 아직 진행 중이다 하는 말은 알겠지요? 완료형 하면 이미 끝난 일인데 미완료형 하면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고 그런 의미다. 야웨하는 말의 글자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야웨의 완전한 의미는 구원 역사에서 정점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예수의 얼굴에서 완전하게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구원에서 자신을 야웨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은 예수의 지상 생애에서 자신을 야웨로 나타내셨고 내니라. 하는 말 그것이 야웨의 의미다. 스스로 존재 한자다. 있는 내가 나다. 그런 의미가 신약 성경에서 예수께서 하는 의미가 여러 번 쓰고 있다. 그런 의미가 문법적인 의미로는 야웨에 해당하는 말이고 또 특별히 행9장에 보면 나타나셨고 또 이방인을 아브라함의 복으로 부르실 때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실 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야웨로 나타내셨다.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랬는데 바울이 거꾸러졌는데 그 때부터 예수는 곧 주이시다. 누굽니까? 내니라 했을 때 내니라 하는 말이 구약의 여호와의 말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제 이스라엘을 불렀을 때 시내 산에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타내신 하나님이 천하 만민을 불렀을 때 하늘 영광으로 시내 산 보다 더 밝은 하늘 영광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바로 그분에게서 여호와의 이름이 완전하게 나타난다.

모세가 이스라엘 중에 증거할 말은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인도하여 약 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이며 그들은 이 말은 믿을 것이다. 모세가 증거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로들에게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나타나서 너희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고 그렇게 전해라. 그런데 바로에게 말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고 모세가 바로에게 증거할 말은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니 그에게 희생을 드리기 위해서 삼일 길쯤 광야로 나가게 하라. 그렇게 말을 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모세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인가? 실은 가나안 땅까지 갈려면서 이 앞 삼일 길쯤 간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해석을 한다. 바로가 3일 길도 가기를 거절하는데 가나안 땅까지 간다고 하면 가게 하겠냐? 지금 노동력이 부족해서 야단인 판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악인도 핑계하지 못하도록 그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최하의 것은 요구했다. 사흘 길쯤 휴가를 내주라고 요새 같으면 노동절 휴가 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안 내주었으니 가나안 땅은 언급할 것도 없고 그러니 바로는 핑계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핑계할 수 없게 하려고 이렇게 약하게 말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말하고 바로에 대해서는 그 언약에 대해서는 바로는 아직 가리워져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는 일만 그가 할 일이다. 왜 자기 수하에 있으니까. 이렇게 말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축제로 모인다는 말이다. 희생을 드린다 그 말은 축제다. 모든 이방 종교의 제사는 축제다. 우리 나라 추석이 축제다.

 

모든 이방 종교는 축제다. 성찬식도 그런 의미로 축제다. 그런데 바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섬기도록 허락하는 일뿐이지 가나안 땅이 무엇이냐 하는 일들은 바로에게는 알릴 조항이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 한 것으로 해석을 한다. 바로는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치시기 전에는 듣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갈 때에는 빈손으로 나가지 않고 애굽의 사람의 물품을 취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심판과 자기 백성의 영광이다. 만국의 영광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될 때에 교회에 그리스도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구원 역사의 완성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모세를 불렀을 때 그 백성이 받을 영광까지 한꺼번에 말함으로 한 세트를 이룬다 그 말이다.

 

이 일이 그 다음 여러 면으로 풀어서 설명이될 것이다. 항상 처음 사건에 전체적인 문제가 다 나타난 것이 논문의 서론 구조하고 같다고 그랬다. 그리고 결론은 서론과 상응할 것이고 그리고 본론은 서론과 결론에 대한 자세한 논증들을 확대시켜 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처음과 끝에 일치되고 가운데는 설명들이다. 지금 모세를 불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대해서 완벽한 프로그램이 나타난다. 그들을 부르신 분이 무엇이며 그들의 구원이 무엇이며 또 어떤 과정을 통과할 것인지 그리고 그 다음에 더 확대된 방식으로 풀어 주고 있다. 그러니까 3장이 중요한 것이다.

 

문제

항상 문제를 풀 때는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문제를 먼저 풀고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염두해 두라 그 말이다.

 

1. 모세가 양을 치며 이른 산을 하나님의 산 호렙이라고 부른 이유는? 이것은 하나님이 그 산에서 나타나셨고 그리고 그 산에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체결한 것을 회상해서 붙인 이름이다. 하나님이 그 중에 임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산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 시대 때도 하나님의 거룩한 거처를 시온산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존귀하게 되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시온산에 모든 산 위에 높아질 것이고 구약 언어를 쓰고 있으니까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산에 임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이  친히 세상에 임하셨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시내 산보다 더 높은 산이라고 히브리서에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도달할 산은 불붙는 산이 아니다. 온전케 된 의인들이 거하는 영광의 처소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시내 산에 임하셨고 거기서 언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그 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말하고 있고 항상 하나님의 임하신 곳은 항상 하나님의 거룩한 거처다.

그 약속이 교회 안에서 지금 세상에 임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의미를 항상 이해를 해야 될 것이다.

 

2. 이 여호와의 사자 천사의 의미가 일치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말은 존재론적인 일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일치성 때문에 그런다. 여호와의 일은 곧 여호와의 사자가 하시는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와 여호와의 사자는 구분이 안된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구분이 안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신약의 완성된 빛가운데서 봤을 때는 구약의 모든 나타남은 천사적인 영광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사람으로 오셨고 천사보다 더 큰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 앉으셨다. 이제 그분을 우리가 영이라고 부른다. 주님과 영을 우리가 거의 구분하지 않고 부르고 있다. 

 

3. 여호와의 형상이 타는 불인 까닭은? 하나님은 소멸하신 불이기 때문이다. 즉 거룩한 분이시다. 이 불에 떨기나무가 타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은혜로 그들 중에 임하셨기 때문이다. 함께 거하시는 분으로 임하셨기 때문이다. 은혜로 임했다 그 말은 안 타게 했다는 말이 아니라 함께 거하시는 분으로 임했기 때문에 안탄 것이다.

 

4.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는 말은? 자기를 하나님으로 나타내시고 모세를 종으로 서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5. 여호와께서 내려와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의미는? 하나님께서 내가 내려와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아담이 범죄한 뒤로 물론 하나님께서 여러 곳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셨지만 하나님이 내려와서 이렇게 거론되고 있는 구절들은 어딘가 했을 때 바벨탑 사건에서 우리가 내려가서 그렇게 되어 있고 다른 데서는 이런 말은 없다. 사사기는 올라간 장면은 있다. 그런데 내려가서 하는 말은 바벨탑 사건과 여기서 있다. 바벨탑 사건은 항상 우리가 심판에 대해서만 생각하는데 심판은 구원을 위한 심판이다. 심판은 구원을 봉사한 심판이지 구원 따로 심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바벨탑 사건은 인류의 힘을 분산시킨 의미로는 심판이어도 그것은 온 천하게 노아의 계통들이 확산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하는 의미로는 은혜다.

 

그렇게 해서 노아에게서 시작하신 역사를 바벨탑 사건에서 완성시켜 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은 아니다. 왜 서로 분리되어 있으니까. 그것처럼 여기서 내려와서 하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범죄한 뒤로 하나님은 사람과 친히 함께 하시지 않는 분으로 처음에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후로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으로 그리고 사람은 땅에 있는 것으로 그렇게 묘사되고 항상 하나님의 거처와 사람의 거처가 구분된 것처럼 이해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내려와서 하는 사실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시는 임마누엘에 대한 표현법들이다.

 

6.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된 증거는? 여기 보니까 내 백성을 그렇게 말씀하는데 내 백성의 증거는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그들의 경배를 받으심이다. 그러니까 모세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즉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이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된 증거다.

 

7.이스라엘의 구원해서 계시하신 여호와의 이름의 뜻은? 이것은 스스로 계신 자로 있다.

 

8.조상들의 하나님이 여호와로 영원히 이스라엘에게 기념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를 자기 백성의 구원 역사에서 나타내시고 증거 하기 때문이다.

 

9.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땅의 약속으로 증거 하게 하셨으나 바로에게는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 희생을 드리도록 사흘 길쯤 광야로 가서 하고 말한 이유는? 이것은 바로에게 거짓말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대한 증거는 이스라엘 백성이고 바로에게는 그런 것이 가리워졌기 때문이다.

 

10.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구원받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지고 그 권능은 원수에 대한 심판과 자기 백성의 영광이다. 그 영광은 무엇인가? 애굽의 보화를 취하는 것이다. 이 일은 천하 만민이 예수께 복종하게 되었을 때 만국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을 때 역사적으로 완성되게 될 것이고 그 영광은 곧 하나님의 백성의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얻은 영광의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소를 지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원수에 대한 심판과 자기 백성의 구원  항상 자기 백성의 영광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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