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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3: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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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황두용 목사 |
참고 : | 2007.09.23. 어울림교회 http://cafe.daum.net/eoulimchurch |
출3:15-22; 막4장 21-29
계시의 말
<요약>
계시는 종교적으로 쉬이 말하여집니다. 종교의 창시자는 자신이 계시 받은 것이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계시된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창시자가 계시 받은 것으로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성경 자체가 계시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말이 계시된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말이 계시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성>
20세기에 전개되는 신학은 계시를 다루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난 자유주의 신학은 어떻든 인간의 종교성으로 출발하게 되니 인간 중심적인 신학이라고 하게 됩니다.
그런 신학을 수정하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기반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다루거나 아니면 계시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어떻든 다룰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좋은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로 보이는 함께를 다루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종교성과 상관된 하나님의 계시를 다루는 틸리히에서나 하나님의 계시를 기반으로 도그마로 전개하여 가는 바르트에서 하나님과 함께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다루어지는 계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거나 언약을 주시는 것은 계시로 함께 하시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말씀으로 보여지지만 일반 종교에서 다루는 계시는 창시자의 체험입니다. 그러니 종교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체험한 것을 계시라고 하면서 말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은 계시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말로 드러난 것을 보입니다. 그 말은 누구에게나 계시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계시의 뜻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지니는 사람은 누구나 계시를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으로 함께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이런 계시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계시를 지닌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함을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시된 말을 보이지만 종교에서는 계시된 것을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의 계시된 말로는 함께로 전개되지만 종교적인 계시를 기술하는 말로는 지켜야 할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시는 무엇보다 말로 의식하여야 합니다. 종교적으로 계시라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하게 되면 이미 이차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계시를 직접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라고 전달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종교 창시자의 전달을 수긍하며 받아들이는 것으로 믿음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는 말의 계시입니다. 그러니 말을 의식하는데서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즉 계시적인 내용으로 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 계시된 말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분별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 가지 말과 더불어 있습니다. 즉 계시된 말씀이 일반 사람들의 말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된 말은 함께의 말>
20세기 미국 신학자 니부어(H. R. Niehbuhr; 1919-1962)는 <The Meaning of Revelation(1941)>에서 계시를 지니고 가는 공동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도 그 당시 일어나는 계시의 문제를 공동체에 살아가는 삶의 뜻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니부어가 계시를 뜻으로 다룬 것입니다. 그런 경우 계시의 뜻은 공동체가 간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시를 뜻이라고 제한하고 보면 뜻을 지니는 사람과 지니지 못한 사람이 나누어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뜻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사람이 의식하는 것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의식을 갖는 사람과 갖지 않는 사람은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게 될 때 그것에 담긴 것은 말이고 그 말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시라고 할 때 우선 뜻으로 말하기 보다 말로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뜻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사람들이 의식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니 그런 의식으로 가기 전 우선 말로 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우선 생각할 것은 '계시의 말(the word of revelation)'이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뜻을 지니는 것보다 말을 지니는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니부어에서 보는 문제는 뜻이라고 하는 한 사람들이 지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의식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계시의 말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계시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이야기되게 됩니다. 말이라고 하게 되면 함께로 전개되게 되지만 뜻이라고 하게 되면 그렇지 않습니다. 뜻이라고 하면 계시된 것을 뜻으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즉 공동체를 지속하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자칫 사람들로 굳혀진 의식이 되게 됩니다.
말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그 말을 읽으면서 인도되는 것입니다. 말에서 뜻을 받아 산다고 하기보다 말로 인도되는 삶을 산다고 하게 됩니다. 뜻으로 인도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로는 인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에는 순종하지만 뜻에는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계시는 말로 이야기하게 되지 뜻으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뜻은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말이란 통용되도록 생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뜻은 의식되어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칫 사람들은 뜻이 자신들만이 지닌 것으로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뜻이 고유하다고 여기에 되면 폐쇄적으로 가기 쉽습니다. 말로 할 수 없다고 여기며 자신들만이 지닌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자칫 그런 점으로 우월성을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뜻이라고 하더라도 말로 표현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사람들에게 열어주게 됩니다. 물론 말로 그 뜻을 의식하게 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려고 주시는 말씀이니 함께 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으로 가리어진 것이지 사람이 의식하는 것으로 가리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가리어진 것을 사람들이 의식하는 것으로 가리울 수 없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뜻이지만 후자는 사람의 고의로 표현되게 됩니다. 따라서 계시의 말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야기되지만 계시의 뜻으로는 사람이 의식한 지속적인 것만 보이게 됩니다. 계시가 하나님의 언약의 계시라고 본다면 계시의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시를 종교적인 계시로 의식하면 계시의 뜻에 머무는 것입니다.
계시의 말이 아닌 계시의 뜻으로 굳힌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봅니다. 그들은 계시의 뜻을 지닌 것이라고 생각하여 굳혀진 삶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계시의 말은 이방인들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이방지역으로 파급되게 된 것입니다.
<자람으로의 계시>
계시의 뜻을 지닌다는 것은 공동체라는 모임으로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의 말은 함께의 생명을 보입니다. 뜻이란 의식된 것이니 개인이 각자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함께의 생명으로 피어나는 것입니다. 함께는 생명으로 온전히 보이게 됩니다. 생명의 함께입니다. 그런 점으로 계시는 함께의 생명이 자람으로 드러납니다. 생명의 자람이 아니라면 상태를 굳히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계시된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고 할 때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계시된 것임을 보입니다. 즉 사람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있음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의 내용을 보이는 것은 이런 계시성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함께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계시성입니다.
이렇게 보면 계시성이란 있는 것에 비추어 말하게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계시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재성으로만 다루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24,25는 계시로 자라지 못하면 결국 계시성을 읽게 된다는 것을 보입니다. 계시를 받게 되면 계시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세상의 현실로 의식하게 되면 자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계시를 받아온 것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성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자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씨가 내포한 생명력으로 이야기되게 됩니다. 땅에 뿌려진 씨가 싹트고 자라는 것과 같이 함께의 생명을 피우는 생명력으로 계시성을 보는 것입니다. 함께의 생명이 피어나는 것은 세상에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있어 가는 실재성으로는 다룰 수 없습니다. 그 안에 담긴 생명력을 실재성으로 다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은 계시성으로 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계시를 말하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신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보게 되면 예수님과 같이 구체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 구체성은 있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생명이라는 점을 영적으로 말하게 된다고 보면 이런 계시성은 뚜렷하여 집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깊이로부터 임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 계시성은 영적으로 다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을 계시성으로 보이게 될 때 삶이 세상에 있는 것에 속박되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즉 삶이 물리적으로 설명될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로 자라는 삶을 보이게 됩니다. 즉 계시란 설명될 요인이 아니라 자라는 생명력인 것입니다.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자란다고 할 때 이런 계시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 전통에서 세워간 교리의 문제는 바로 계시성을 주지 못한데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말로 성경의 내용을 굳히려고 하였기에 계시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믿음의 삶이 세상에 굳혀 가는 것으로 보이게 된 것이지 생명의 자람으로 보이지 못한 것입니다. 전통 교리는 믿음이 마음을 굳히는 것으로 다루었습니다. 마음을 굳힌다는 것은 어떻든 세상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즉 교회를 굳히는 것으로 표현되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굳혀지는 만큼 교회도 굳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교회가 세상에 굳혀 가는 삶을 다져 온 것이 됩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면을 보이게 되는데 그런 것을 정통성이라고 굳힌 것입니다. 정통성이라고 하게 될 때 이미 계시성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정통성이라고 할 때 계시된 것을 정통성으로 지녀간다고 합니다. 교회가 생긴 것이 계시로 된 것이니 그런 계시된 내용을 정통성으로 지녀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시성을 그런 정통성으로 지녀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통성으로 이야기되는 것이 이미 세상에 지속적으로 있어 가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지속적으로 있어 간다는 것은 이미 계시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굳힌 것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구약의 율법에서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언서에서 보게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드러나지 않는데 사람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체계로는 계시성을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율법으로는 함께의 삶을 보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답답한 것은 계시된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종교적으로 의식하기 때문에 계시된 내용을 의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소망이 없는 삶을 삽니다. 종교적으로는 소망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계시된 말을 묵상하게 하옵소서.
성경을 사람이 쓴 글을 읽으면서 이해하듯이 읽지 말게 하옵소서.
계시로 읽어야 아버지와 함께 하옵니다.
그러니 말의 이해보다 말의 함께에 눈뜨게 하옵소서.
그래서 함께 하는 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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