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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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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본문: 마5: 3 - 12
옛날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태양과 바람이 지나가는 사나이의 오바를 벗기는 내기를 했습니다. 바람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내 입김으로 한번 큰바람을 내면 저 사나이의 오바를 당장에 벗길 수 있어」 그러나 아무리 큰바람을 불어 대도, 사나이는 단추를 확인하고 두 손으로 움추리며 오히려 옷이 벗겨질 까봐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오바를 못 벗겼는데, 태양이 슬슬 웃으면서 뜨거운 열을 쏟으니 사나이는 그만 「이거 웬일이야! 어이구 더워...」 하면서 오바를 벗어 들었습니다. 강제의 힘보다 따뜻함이 이긴 것입니다.거북이의 목을 강제로 빼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거북이의 체중이 불과 25-40 파운드 밖에는 안 되나 150-200파운드를 가진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빼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북이의 목을 빼내려면 따뜻한 화롯불 가까이에 놓아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북이가 당장에 목을 뽑는다는 것입니다. 온유란 부드럽고 따뜻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온유함은 세상에서 거의 유약함이나 비겁함의 동의어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온유한 자를 경멸합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세상에서는 주변인간으로 소외되어 무시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온유한 자는 속절없이 세상의 강한 자들의 유희를 지켜보는 구경꾼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온유한 자는 손해보고 빼앗기는 패배자로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으며, 시편기자는 「온유한 자가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고 약속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종들과 그의 조카 롯의 종들 사이에 소돔 고모라의 땅을 에워싸고 갈등이 생겼을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선택권을 양도합니다. 그에게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도록 기득권을 포기합니다. 그에게 온유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롯이 선택한 소돔 고모라는 결국 불바다가 됩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온유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살았고, 다윗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구박 당하고 사지에 던지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고 그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합니다. 다윗도 사울왕에 의해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생겨 다닙니다. 그러나 그는 신하된 본분에 성실하며 왕을 용서합니다. 마침내 요셉은 총리가 되고 다윗은 왕이 되어 형제들을 섬기게 됩니다. 온유가 승리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는 친히 스스로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그는 재판을 받으시며 십자가로 가시는 도상에서 지속적으로 고난을 받으시며 일방적인 형벌을 감수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침묵으로 이 모든 상황을 수용하셨고 저항을 포기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허다한 인류가 그 앞에 머리 숙여 그를 왕과 하나님으로 경배합니다. 온유가 승리한 것입니다. 교육학에는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 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는 철사로 엄마 원숭이처럼 만들어 그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 그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러자 아기 원숭이들은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 인형의 우유만을 먹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서로 찾습니다. 같은 재능, 같은 기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기 마련입니다. 온유한 마음이 있는 곳에 훈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건전한 사회생활이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팔복 중 하나입니다.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경직된 관계도 부드러워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감도 깊어져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사랑이 충만해지며 화평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훌륭한 신앙인들에게는 2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온유함입니다. 전문분야의 탁월한 실력자이지만 자랑하지 않고 겸손한 미소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또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스스로 의로움과 진실, 경건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외유내강(外柔內剛)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먼저 거듭난 성품을 요구하십니다. 변화된 예수의 성품을 소유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서「온유」는 짐승을 길들여 주인 뜻대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으로 해석하면 죄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길들여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한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본문의「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인생의 험난한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승자가 되어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링컨 대통령 당시의 국방장관 스탠턴은 유능했지만 고약한 성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링컨, 그 사람 바보구먼」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이를 보고 받은 링컨은 태연하게 답변합니다. 「스탠턴이 나를 바보라고 했다면 정말 바보일 거요. 그 사람 말은 대개 맞으니까.」나중에 스탠턴은 링컨의 죽음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기 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죽었으니 이 어인 불행인고!」 온유한 자만이 궁극적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온유야 말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무기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온유해야 합니다만 더욱 온유로 무장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억울한 환경 속에서(시 37:1),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딤후 2:24), 죄를 범한 자에게(갈 6:1),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약 1:21), 전도할 때(벧전 3:15), 공동체의 조화를 위해 온유해야 합니다(엡 4:1~3). 그러나 무엇보다 가족간에 온유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온유함으로 사랑하십시오. 아내는 남편에게 온유함으로 순복하십시오. 부모는 자녀들을 온유함으로 양육하십시오. 참된 온유를 위해서는 온유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온유를 간구하십시오. 예수 십자가 때문에 참을 수 있고 긍휼히 여길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이 진정 인생 승리의 비결이요 예수 잘 믿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여사가 다니는 교회에서 한 동물원 원장을 초청,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동물원 원장은 각 동물들의 특성과 수명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질문시간이 되었을 때 미우라 여사가 「동물이나 생물 중 어느 것이 빨리 죽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동물원 원장이 대답했습니다. 「호전적이고 성질이 급한 놈, 덩치가 큰 놈들은 빨리 죽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동물들은 오래 삽니다. 또 곤충 가운데서도 투구벌레처럼 등딱지가 딱딱한 놈들이 빨리 죽습니다.」 노자는 죽으면서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는 임종이 다가오자 제자들을 앉혀 놓고 입을 벌리고는 「내 입에 뭐가 보이는고?」하고 물었습니다. 「예, 아무것도 안 보이고 물렁물렁한 혀만 보입니다.」「그렇지, 내 치아는 다 빠졌어. 젊은 시절에 내 치아는 아주 튼튼했지만, 사나워서 혀를 물어뜯고 아주 교만하게 굴더니 다 빠져버렸지. 물어뜯기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참고 살아온 부드러운 혀만 남은 것이야.」 그러면서 단단한 것은 죽음이요, 온유한 것만이 생명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굳세고 강해야만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약육강식의 경쟁사회에서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통용되기 때문에 강한 자만 살아 남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자녀 교육에서도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식들을 강하게 만들까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혹, 밖에서 다른 아이에게 맞고 들어오기라도 하면, 다음부터는 어떻게든 남에게 맞기보다는 때리며 살도록 전의를 북돋워 주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마음이 따뜻하여 남에게 잘 해주고 성격이 부드러워 남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아이의 그 품성을 키워 주고 격려해 주기보다는, 「너는 그렇게 나약해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그러니?」 하면서 오히려 꾸중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부드러운 것보다 강한 것을, 여성적인 것보다 남성적인 것을, 따뜻한 마음보다 냉정한 성격을 선호하는 경향은 삼십여 년 넘게 계속된 군사문화의 후유증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습니다. 총칼을 들고 백성들의 피를 흘려서라도 권력만 잡으면 그만이라는 것이 군사문화요, 그것이 온 백성의 마음을 강퍅한 심성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결국 강한 것은 부러지고, 총칼로 일어선 자는 총칼로 무너집니다. 강한 것이 온유한 것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한때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였지만 오늘날 그들의 권력은 마른 풀처럼 시들고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군사 쿠데타로 권력에 오른 자들은 오늘날 무덤 속에 누워 있거나,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얼핏보기에는 악하더라도 강한 것이 승승장구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그러한 것들은 역사 속에서 바로잡히고 멸망하고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민족과 세계의 역사만이 아니라 개인에게 있어서도 결국에는 온유가 강함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경륜입니다. 차갑고 굳은 것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에 생명력이 넘치는 법입니다. 생명 없는 광물질은 차고 딱딱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나무도 껍질이 두꺼워지고 딱딱해지면 죽어 가는 고목이 됩니다. 부드럽고 연한 가지에서 푸른 잎이 움트며,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맺힙니다.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근육과 골격이 굳어져 가지만, 어린아이일수록 그 몸이 따뜻하며 부드럽습니다. 부드럽고 연한 것이 강하고 뻣뻣한 것을 이깁니다. 젊은 시절 자기 힘만 믿고 큰소리 치던 남편들은 늙어 가면서 온유한 아내에게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소리 없이 흐르는 물이 바위를 굴리며 보잘것없는 빗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새봄이 오면 갈라진 시멘트 담장 사이로 이름 모를 풀씨의 연한 새순이 돋아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이렇듯 온유함은 생명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가장 온전한 형태의 온유함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누이실 때부터 온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십자가에서 온전히 나타났습니다. 원수들이 욕하고, 비웃고, 저주했지만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사53:7) 온유하게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온유가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겼으며, 결국 우리가 그 승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온유함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자녀들을 온유하게 키워야 하겠습니다. 온유한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립니다. 또한 온유한 마음 밭에서라야 하나님의 말씀도 싹이 틀 수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함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온전히 얻을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심령이라야 진정으로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써 굳어져 가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변화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에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가 있는데 거기 여덟 번째 열매가 온유입니다. 여러분, 모세를 보세요. 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세상에 날 때부터 그 천성이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하는 데를 나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감독이 이스라엘 사람을 이유 없이 학대하는 것을 볼 때 너무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인 감독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민중을 영도하여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는 도중 모세는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간이나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 모세가 여러 날 보이지 않게 되니까 아론에게 찾아가서 우리 지도자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아론을 충동해서 그들이 애굽을 떠날 때 가지고 나온 금붙이를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말하니 거기서 춤을 추고 먹고 마시며 야단이 났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세는 너무 기가 막혀서 어깨에 둘러메고 내려오던 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땅바닥에 내던지지 않았습니까? 그것 보면 모세의 본성이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불의한 것을 보면 마음에 불이 붙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온유했다는 것은 그의 본성과는 전혀 반대였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도 가만히 보면 날 때부터 그렇게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데 예수님을 잡으려고 대제사장의 종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너무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분한 김에 옆에 찼던 칼을 뽑아 그 종의 귀를 쳐 서 떨어뜨렸습니다. 이런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베드로가 그처럼 온유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편지를 읽어보면 온유한 성품의 베드로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8절를 보십시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회개하기 전에는 온유한 사람이 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기 교만에 꽉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혈통을 자랑했습니다. 그의 가문을 뽐냈습니다. 그의 신앙심을 내놓았습니다. 그의 학벌을 자랑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모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눈앞에는 보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성품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처치하는 일에 앞장을 섰고 거기에서 쾌감을 느꼈습니다. 이와 같은 성품의 소유자인 바울이 어떻게 그처럼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열매인 온유함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여성의 강함은 부드러움 속에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부드럽고 순한 대답, 즉 유순한 대답이 분노를 쉬게 하고(잠15:1),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 즉 「온량한 혀는 생명나무가 된다」(잠15:4)고 지혜의 말씀인 잠언을 통해서도 온유와 부드러움에서 오는 강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온유는 성도가 마땅히 지녀야 할 성품임을 잊지 맙시다.(딤후2:24-25, 딛3: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골3:12)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3:13)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저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온유한 자의 삶은 어떠한 것입니까? 첫째, 「굳어지지 말라」입니다. 「온유하다」라는 말에는 부드럽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움직이고 움직이는 것은 굳어져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이 반복적 습성과 형식에 매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강한 쇠는 부러지나 부드러운 눈물은 모든 것을 감싸 안습니다. 부단히 새로움을 향해 자기의 삶을 개혁해야 합니다. 굳어지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생활과 삶 속에서 여유있고 부드러운 것을 추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지나치지 말라」입니다. 「온유하다」라는 말에는 중용(中庸)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삶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극단을 지양하고 중도적 길을 간다해서 적당한 타협의 삶을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중용의 삶이란 자신을 절제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것을 우리는 수시로 목격하게 됩니다. 셋째, 「놓치지 말라」입니다. 「온유하다」는 말에는 꾸준함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꾸준히 포기하지 않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때때로 악과 불의가 승리하는 것 같아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선과 정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서 악을 이기라」 여기에 온유한 자의 승리가 있습니다. 악은 지금 당장은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종국에는 패하고 맙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선은 악을 감싸고 반드시 무릎 꿇게 만듭니다.
유명한 강해 설교가인 데니스 레인은 「온유란 거인의 손 안에 있는 갓난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온유한 자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자임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어떻게 강한 사람일 수 있을까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은 이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이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깨어져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야말로 가장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스데반은 유력한 유대인들과 논쟁했는데, 구약에 정통해 있던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구약의 역사를 관통하며 전하는 설교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렇게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주시라고 기도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렇게 강합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거인의 손 안에 있는 갓난아이」라는 말은 온유를 잘 표현한 말입니다. 온유는 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참여하여 그 분의 능력을 힘입은 자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자기의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삶의 지배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와 같이 자기주장, 자기이익, 자기 합리화, 자기연민, 자존심 등을 끝장 내버린 사람입니다. 존 번연은 「이미 넘어져 있는 사람은 넘어질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주장, 자기이익, 자기 합리화, 자기연민과 자존심을 끝장낸 사람이 어떻게 상처를 받거나 자존심이 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더 이상 넘어지거나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므로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타인이 자기에게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온유할 수 없습니다. 열등의식이나 우월감에 빠져 있는 사람, 항상 긴장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항상 남을 이겨야 하는 사람, 언제나 비교하면서 사는 사람, 늘 타인의 시선을 끌고 싶어 하는 사람 … 이런 사람들은 늘 남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가에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지고는 못사는 사람들입니다. 나보다 잘 났거나 나은 사람을 보면 시기하며 질투합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실망하고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자기 스스로도 늘 피곤하며 우울합니다. 이런 사람은 온유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온유한가 온유하지 않은가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것에 대하여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칭찬 받을 때 거기에 빠지지 않고, 조롱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할 때 화내지 않으며, 오직 모든 일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감사하며 평안합니다. 진정으로 온유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1-24)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예수님은 온유 자체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외하고 이 모든 사람들은 본래 온유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온유하게 되었을까요? 이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온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온유하게 될 수 있습니다. 속세를 떠나 세상을 등진다고 해서 결코 온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순종할 때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가 누릴 모든 축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땅을 얻는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이 말씀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한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온유한 자는 하늘의 복과 함께 땅의 복을 받게 될 것이며,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항상 만족을 얻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 -10) 온유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이렇게 진정한 만족을 누립니다. 동시에 온유한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축복과 영광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또 우리가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2:11-12) 우리가 온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떠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인과 세리와 창기와 어린아이들, 심지어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자들에게까지 온유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온유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되려면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배우고 주님을 닮아갈 때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되려면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해질 때 자아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자아가 죽은 사람은 열등의식과 우월감, 그리고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됩니다. 이렇게 자아가 죽어야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자아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의지합니다. 이렇게 자아가 이미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졌다고 속이 상하거나 마음에 상처 받을 일도 없게 됩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만 만족합니다. 온유한 자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순간 우리의 자아가 고개를 쳐들게 되며, 우리의 마음은 다시 강퍅해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온전히 다스리셔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주장하시면 우리는 온유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죄와 부정함과 무능을 철저히 깨닫고 인정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와 영적인 무능함 때문에 애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이제 나 자신으로서는 아무 소망도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의지하는 온유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 한 구절을 다함께 봉독하고 마치겠습니다.「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2-3)성도 여러분 모두가 온유의 열매를 맺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주님의 뜻을 온전히 펴는 우리가 되게 하옵시고, 악이나 불의가 득세할 때 우리로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온유한 자가 결국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즐기게 됨을 믿게 하옵소서. 마음속의 감정과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때때로 분을 내고 교만해지는 우리의 마음에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주옵소서.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겸손이 모든 것을 품는다는 것을 알고 그 진리대로 살아갈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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