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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9:3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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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아브라함 |
19장 30절-38절: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롯의 행복관이 있지요. 시집 잘 가고 장가 잘 가고. 뭐니 뭐니 해도 물질적 조건이고 세상 어떤 조건입니다. 그 조건에서 이제 자기의 어떤 행복관을 찾는 거지요.
오늘날 불신세상 처녀총각들이, 특히 처녀들 쪽에서 그런 걸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처녀 측에서 행복관을 어디서 찾지요? 시집 잘 가는 거. 장가 잘 가는 거. 그렇지요? 그 잘 간다고 하는 그 ‘잘’이라고 하는 그 사상이 뭐지요? 가능한 한 죽을 때까지 물질적 조건이 실컷 먹고 마시고 써도 줄어지지 않고 풍족하게 남은 것. ‘그런데 시집장가 갔으면 좋겠다’ 그런 식이지. 이 세상은 전부 그거 아니요? 시집장가 가는 거 전부 다 물질적 조건 아니요?
예수 잘 믿는 사람들, 가난하면 큰일 났어요. 시집장가 가기 큰일 났어요. 그러니까 참 신앙적으로 바로 살겠다고 어떤 그런 정신을 가져야지. 그래야 외부적인 어떤 조건에 의해서, 생각을 해 봐요. 아니, 사람이 최고로 좋은 거 아니겠어요? 물질이 있건 말았건 때가 되면 가는 거고. 사람이 최고로 좋으면 최고 아니겠어요? 그런데 물질적인 조건이 부족해서 사람을 놓친다면 큰 실패지요. 그렇지 않아요?
두 번째는 아들 낳고 딸 낳고 하는 거. 자기 입맛대로 죽이고. 성도들이 시집장가 가면 자녀가 생산되는 건 자동적이 아니요? 그런데 그걸 자꾸 인위적으로 조절해서 몇 년 후에 자식을 가지겠다고 하면 그 동안은 뭐야? 그게 무슨 짓이냔 말이요. 그게 완전히 세상이에요. 그거 육이지. 육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지. 우리는 뭐요? 생명운동 하는 거 아니요? 먹어도 생명운동 시집장가 가도 생명운동 자식을 낳아도 생명운동. 그래요, 안 그래요? 그걸 인위적으로 조절해가지고. 약을 써서. 참 그거 세상이지.
몇 년 후에 자식을 가지겠다고 약 쓰고 있다가 암이 돋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 그러다 하도 약을 많이 써서 자기들 계획대로 자식을 낳으려 하면 자기들 계획대로 100% 자식을 낳을 수 있느냐 그 말이야. 문제야. 그러니까 인간이 계획해가지고 제 마음대로 해가지고 제가 잘못해서 제가 저질러 놓은 거. 그거 줍는 거지.
2100년인가, 2010년인가? 우리 한국국민이 절반밖에 안 될 거라고 방송이 나오데. 그러면 어찌 될 거야? 국가가 어찌 돼? 그리고 아들이 많고 딸이 적어. 어쨌든 어느 한 쪽으로 바란스가 안 맞고 이렇게 되면 문제가 일어나는 거지 뭐. 좋은 문제는 안 나오지. 당연한 거지.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돈 벌어 잘 살고 하는 그거. 그러니까 돈이 없으면 행복이 없는 거지요. 롯의 행복관입니다.
집 사려고 돈 벌어? 자타의 구원에 연관시키려고 돈 벌고 먹고 마시고 쓰는 거 아니요? 여러분들의 건강도 구원 이루는데 하나의 소유격으로 써야지. 그렇지 않겠어요? 건강을 돌볼 줄 알아야 되고. 딴 거 뭐 어떻게 하려다가 먹을 거 못 먹고 자기 몸에 병이 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어리석은 짓이지요. 어쨌든 자타의 구원에서는 떨어지지 말아야지. 돈 없으면 행복이 없으니 맨날 싸울 거고, 여자는 도망가고. 그런 거 많데.
네 번째는 잘 먹고 잘 놀고. 노는 축에도 빠지지 않고. 우리 성도들은 노는 축에는 빠져도 괜찮지?
롯의 행복관 이 정신이 롯의 두 딸에게 들어가는 겁니다. 그 정신 사상이. 그러니까 아브라함하고는 판이하게 다른 가정교육관입니다. 그러니까 두 딸 입장에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시집장가 잘 가고 아들 낳고 딸 낳고 돈 벌어 잘 살고 잘 먹고 잘 놀고 하는 이런 자기의 소원성 희망성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말이지요. 딸들의 입장에서 보니까. 그러니까 세상에서 인간의 도리, 여자의 도리를 쓰는 길이 막혀버렸다고 생각이 된 거지요. 그래서 이제 이 두 딸이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지.
아버지 딱 모셔다 놓고, 어떻게 술병은 들고 왔던 모양이지? 굴속으로 숨을 때 술병을 놓치지 않고 들고 왔나, 아니면 그 굴속에 술집이 있었나? 산이니까 산머루 같은 거 따다가 술을 담았나? 그래, 이제 딸이 둘 다 각자 자기 소원대로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걸 누가 가르쳤을까? 부모가 가르친 거지요.
오늘날 부모들이 하는 걸 보면 전부 다 자식에게 그게 그 즉시 내려가요. 참 그 제 1방송에 9시부터인가 10시부터인가 자식 가르치는 거 많이 나오는데 가만 보면 어쨌든지 세상에서 빠지지 않고 훌륭하게 가르치려고 묻기도 하고 가르쳐 주기도 하고 많이 얘기들 해요. 하지만 정말 요게벳이 모세를 기르는 그런 거는 없는 거지요. 있을 수가 없는 거고.
이제 산에서 내려올 때는 식구가 몇이지요? 다섯이지. 그러면 이 다섯 식구가 촌수를 따져 봐요. 몇 가지 촌수입니까? 애들은 할아버지보고 뭐라고 그래요? 아버지라고 그러고, 아버지만 되나? 할아버지도 되고 손자도 되고 아들도 되고 남편도 되고 아버지도 되고. 그러니까 촌수가 개판이지. 참 왜 이걸 기록해 놓았을까? 누구 보라고? 우리와는 관계가 없지요? 안 그래요? 여자들만 관계가 있고 남자들은 관계가 없나? 참 이거. 이걸 왜 기록해 놓았을까?
심판에 이르기까지 롯은 세상에서 부자로 영광을 누리고 살았지만 지상저축 소유주의로 산 결과가 바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불신세상은 그걸 몰라요. ‘물질이 풍부하면 잘 살 것이다’ 꼭 그렇게 하나만 생각하지 ‘물질이 풍부하면 사람이 본능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다. 벌어지게 생겼구나’ 이걸 전혀 모르는 거지요. 그거 알 리가 없어요.
물질이 풍부하면 도덕적으로 망해요. 그러니까 사람이 가만 보면, 물론 정신이 바로 들어서 바르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보면 물질이 안 굶어죽을 만큼 그저 아침저녁 때꺼리 찾아먹고 그 정도가 제일 편안하고 무난하지요. 안 그래요?
우리 성도들 어쨌든 구원목적으로 몸도 건강관리 잘 하고. 죄 안 짓겠금. 자기만 건강해서 부지런하면 아침저녁 때꺼리는 먹을 수 있는 거거든. 예수 잘 믿고 전도 잘 하고 잘 가르치다 가면 되는 거지 뭘 더 바랄 게 있어? 안 그래요?
우리가 이걸 미리 이걸 생각해두는 게 좋아요. 두 부부 간에 부자로 소원 목적하고 살았다. 그랬는데 자식이 나왔다. 그 다음에 그 자식 속에 들어가는 것도 그 정신이 들어가게 돼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대 삼 대까지 아마 못 갈 거예요. 풍부한 그 상태로써. 사람이 망가진단 말이요. 그러니까 사람이 어디서 살던 그 정신적 그런 걸 길러줘야지요. 그게 시급하지요. 우리의 구원도리는 전체 인류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놓고 논하는 거니까. 인간이 바로 서면 그 이상 없어요.
(이하 일부 녹음 누람됨)
그거 어떻게 좀 알아듣게 잘 짜서 전도지 좀 내요. 그거 암만 봐도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목적인 그리로 교육이 안 되면 불가능이야. 무슨 짓을 해도 안 돼요.
아브라함의 이력은 날이 갈수록 자랑스럽고, 그렇지요? 롯의 이력은 날이 갈수록 수치스럽고. 신령계에서도 수치스럽고 물질계에서도 수치스럽고. 롯이 아마 하나님께 말을 하면서 괜히 이걸 성경에 기록해가지고 내 얼굴 못 들게 해 놨다고, 오고 오는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히 무궁세계에까지 내 얼굴을 못 들게 해놨다고 그 소리한다면 그게 회개가 된 것일까요, 안 된 것일까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현재 이 자리에서 롯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요? 눈이 큰지 작은지, 키가 큰지 작은지 모르잖아요? 그래, 얼굴은 몰라도 롯의 이력은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고전13:12인가 보면 ‘그 날에는 온전히 알리라.’ 확실히 알리라. 마음만 먹은 것도 안다 그 말이요.
사실 우리가 시간은 좀 지났어도 행동은 나타나지 않았어도 마음먹은 거 자기가 시간이 좀 지나도 알지요? 기억력이 좋으면 자기가 어릴 때 품은 마음 그거 생각이 될 수 있단 말이요. 참 그걸 보면 옛날 거 끄집어 낼 수 있는 기계가 뭐지? 컴퓨터야 뭐야? 녹음기도 있고 사진기도 있고 물건도 있고. 그러니까 여러분들, 그 전에 세상적인 누림성의 요소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버리라 그 말이요. 좋은 것은 아니야.
불 가운데 얻은 구원이 또 있지요? 탈 것은 다 타버리고 알몸으로 나오는 거. 그게 불 가운데 얻은 구원이지요. 고후5:3인가에 보면 ‘우리는 벗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벗은 자들로 나타나지 않게 하려고.’ 의를 입는 거. 또 계3:18에 보면 ‘흰 옷을 사서 입고 벌거벗은 수치 보이지 않게 하라.’
물어봅시다. 여러분들, 인간이 벗었다 하는 거. 도덕적인 면에 인격적인 면에 성품적인 면에 벗었다 하는 그거 여러분들 느낄 수 있지요? 자기가 그거 느낄 줄 알아야 돼요. 성경 많이 깨달아서 영적인 면에 민감성을 가지게 되면, 우리가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는 겁니다. 상대는 자기는 ‘세상영광 어쩌고 저쩌고’ 하며 세상에서 ‘내로라’ 하는 거지만 신앙적인 영적인 면에서 인간을 딱 들여다보면 벗은 게 환하게 보인단 말이요.
그러니까 자기 수치를 모르고 모르니 눈이 감겼고. ‘내가 벗고 있구나. 내가 입고 있구나.’ 내가 벗으면 안 되지. 성도의 수치가 뭐지요? 간단히 말하면 성경 모르는 거 아니요? 성경 모르면 성도의 수치지. 성경을 잘 깨달아 알고 있으면 수치가 아니지요. 그렇지요? 수치가 아닌 것은 자기가 옷을 입은 것과 같다. 성경 모르면 벌거벗은 거 아니요? 그 얼마나 수치스러워. 자기가 얼마나 벗었느냐 하는 것을 자기가 신앙으로 감지할 수가 있어요. 벗고 다니지 말아요.
우리가 대화를 한다거나 얘기를 해보면 여자들은 성격은 상당히 세밀적이고 조용하고 과학적이고 어떤 관찰력이고 한 그런 거 좋지요. 덜렁덜렁하는 것보다 잔잔한 거. 거 테레비에 나오지. ‘부드러운 여자에요.’
덜렁거리고 돌아다니면, 이를테면 처녀가 그렇게 돌아다닌다면 시집가서 살림을 잘 합니까? 남편하고 같이 돌아다녀야 돼. 그러니까 살림하기가 어려워. 배우면 잘 할 테지만 성격상 그런 사람들은 천상 보험 그런 직장. 말솜씨 좋은 여자는 그런데 취직하는 게 좋고. 그래서 예수 잘 믿어서 잘 만들어지면 다행이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보면 신앙적으로 보면 잠언서에 보면 여자는 일찍 일어나고 식구들에게 먹는 거 신경 쓰고. 물론 계시적으로 보면 우리 교역자들인데, 또 한 편 우리 여자들 입장에서 그것도 알아야 돼요. 괜히 거기 여자라고 해놓은 게 아니니까. 그 가정 부요해져요. 그리고 그 남편이 또 올라갈 거고. 그 얼마나 좋아. 참 그런 거 좋아요.
그런데 어떤 가정을 보면, 일반적이지요. 그러니까 문제는 정신이 비뚤어지면 행동적으로 속임성이 다 돼버려요. 우리 생각 같으면 ‘그걸 아껴놔서 구원 이루는 면에 쓰면 좋겠는데’ 이게 나오는데 그냥 소비야. 그러니까 나쁘게 말하면 남편 등골 빼먹는 거지.
일반적으로도 보면 가정이 정신 바로 차려가지고 살림 잘 살아나가면 그 가정 일반적으로 건전하지요. 우리가 그런 거 많이 볼 수가 있지요. 사람이 살다보면 어떤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그 자녀들이 그걸 또 배우고 그러거든요. 부모가 살림 살 줄 모르니까 그 자식이 뭐가 돼. 그 자식이 시집가면 또 남편에게 무슨 사랑을 받겠어. 빤한 거지 뭐. 그게 다 우리에게는 구원거리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로서의 일반적인 면의 수치성. 우리가 신앙적인 면의 수치성 그걸 우리가 다 알아야 되겠지요.
천국에는 제재가 없고 간섭자가 없습니다. 다만 자기의 실력의 제재만 받는 곳이지요. 그 곳에서 자기 마음대로 별 짓을 다 할 수 있는 그런 성분은 세상에서 다 제거돼 버리고 하나님의 단일성의 성품만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단일성적인 천국이다. 하나님의 한 생명가지고 사는 곳이다. 주님의 구속으로 된 그 한 생명가지고 사는 곳이다. 각자마다의 개체개별성이지만 전부 다 하나님의 생명가지고 사는 것. 예를 들면 집집마다 다 전기불이 있지만 그 전기는 한 발전소에서 오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천국에는 의사대립성이 없다. 자기 개인의 육적인 의사는 다 빠지고 가는 거니까. 우리가 제일 지혜로운 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사로 자기가 스스로 바꾸어놓는 이게 참 지혜롭습니다. 이게 구원이란 말이요. 세상에서는 물질적 육적 그런 거 다 갖고 있어도 천국에는 영만 들어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에 맞추지 못하고 만들어지지 못하고 순종되지 못한 것은 바보취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은 또 능력도 취미도 단일이고. 하나님의 취미를 내 취미로 삼고 살아야지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는 취미 없는 무취미가 된다. 이 세상에 보면 간혹 무취미로 사는 사람이 있지요? 무슨 맛으로 사는지? 우리 성도는 무취미가 있으면 안 됩니다.
근데 능력의 한계선은 자기 만들어진 대로. 그러니까 자기가 누릴 것이 많이 있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못하고 또 실력이 없어서 못하고. 줘도 실력이 없으면 못하지요. 그러니까 멍청이 아니겠어요? 어떤 사람은 피아노를 잘 타서 피아노를 갖다 주면 날개 떨어지는 소리도 마음대로 내고 하는데 그거 못하는 사람은 못하지요.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도 미감성에 있어서 입맛에 있어서 민감해가지고, 설교의 맛이 있어요.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맛이 다른 게 있어요. 그런 맛도 얼른 감지를 해야지요.
천국이 무슨 맛이겠어요? 복합적인 맛입니다. 다 들어있어요. 그걸 깨달으라고 우리 혓바닥에 감지할 수 있는 그걸 넣은 거 아니요? 천국에서 생명과 따먹고 맛있다고 하는데 자기는 생명과 따먹고 그 맛을 모른다면 그 천국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아닌 말로 이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 자리에 말씀 못 듣고 아무 재미없다고 하면 무슨 맛으로 거기 있느냔 말이요.
우리가 세상에서 또 성경을 보면서 ‘천국이 이렇구나’ 하는 걸 속속들이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단순히 성경을 역사적으로만 보지 말고 그 속에서 천국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지요.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못하면 기능도 없습니다. 성품 속에 기능 지능도 다 있는데 지능이 없으니 무슨 기능이 있겠어요. 안 그래요? 기능을 잘하는 사람은 지능이 좋은 사람이지요.
롯의 경우는 아닌 말로 성도라면 지옥은 못 가고 천국에서 벌거벗은 자로 돌아다니고 있으면 그거 어떻게 되지? 하기야 뭐 천국에서야 ‘너 왜 옷 벗었느냐’ 그 말을 하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걸 느껴보자 그 말이요.
우리는 다 중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중생기간에 부지런히 자라야 합니다. 우리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롯의 다섯 식구가 족보가 참 어지럽습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 롯의 길을 걸어가면 롯과 같은 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을 따라가면 아브라함처럼 되는 거 당연한 거고 롯을 따라가면 롯처럼 되는 거고. 이걸 또 종들이었으니까 아브라함도 교육자요 롯도 교육자입니다. 그러면 각자 따라간 자들이 다 어떻게 됐습니까?
오늘날 교회교인들이 그걸 볼 줄 알아야 되는데 그걸 못 보지요. 어찌하든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충성봉사 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문제는 ‘지도자가 어떤 지도자냐’ 이걸 다 봐야 되겠는데. 지도자를 보고 따라가야지 원 세상에. 그런 면을 보면 멍청한 자들이 많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왜 이런 걸 다 기록해서 주었느냐? 우리보고 육은 마지막 날에 다 벗게 된다. 마지막 날에 벌거벗은 수치로 나타나지 말라고 우리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세상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자기 발아래 밟고 그 다음에 이용 활용, 자타의 구원 면에 이용 활용하고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이렇게 가게 되면 자기가 영능자가 됩니다. 자기 자체가 영능자가 돼요. 또 그렇게 되면 자꾸 좋은 점은 자기에게 많아지지요. 속이 주님을 닮아가니까 인격적 지식적 거기에 따라서 도덕성도. 그게 능력자지요. 그렇게 되니 이제 장점도 많아지고 믿기 전에 가졌던 단점은 자꾸 묻어집니다. 우리에게 장점이 많아야지요. 이렇게 해서 이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영원히 가게 된다. 마지막 그 말에 다 들림을 받게 된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예수 믿게 해주시고, 더 감사한 것은 저희들이 사는 날 동안에 주님이 간섭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고상한 그 성품을 하나 둘 경험적으로 깨달음으로 입혀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세상에 살면서 사는 욕심이 주님이 욕심이 나고 주님이 가진 것이 욕심이 나고 살면서 모든 생활 환경 속에서 내 속이 몽땅 주님의 것으로 바꾸어져 나올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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