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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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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성희 목사 |
참고 : | 2002년 05월 05일 연동교회 http://www.ydpc.org |
출4:1-7, 요6장8-11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었이냐
한 스승이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정말 무감각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제자 하나가 찾아와서 어떻게 내적인 자유의 단계에 도달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웃고 나서 말했습니다. "나는 스무 살 때까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없었다. 스물이 지난 후 나는 끊임없이 이웃들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걱정했다. 그리고 나서 쉰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나는 그들이 나에 대하여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나에 대한 생각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더구나 한국 사람들은 체면문화가 발달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한 내 자신의 생각입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나는 여기서 덧붙여 우리가 세 번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은 세상에 태어나고, 다음에는 하나님께 태어나며, 마지막 세 번째에는 우리 자신에게 태어나야 한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태어나면 자신의 가진 것만 가지고도 감사하며, 봉사하며, 헌신할 수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이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여 그만큼의 돈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가진 종은 돈으로 장사하지 않고 감추어 두었습니다. 왜 그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까? 성경에는 구차한 변명이 있지만 사실은 심리적으로 보면 다른 종들의 가진 것에 기웃거리는 비교의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보십시오. 엄청나게 큰 돈입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에 하루의 품삯입니다. 요즘 하루의 품삯을 5만원으로 따지면 1달란트는 3억입니다. 그런데 이 큰 돈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 적어 보이지만 절대적 가치에서 보면 큰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서 볼 때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만 가지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 충분합니다. 내 가진 것만도 하더라도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송명희씨의 고백적 시를 보십시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공평하신 하나님은 남에게 주지 않고 나에게만 주신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아브라함 매슬로우(A. Maslow)는 '요나 콤플렉스'라는 상태에 대해 설명합니다. 요나 콤플렉스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재능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상태를 만합니다. 또 이들은 의도적으로 이 재능에서 도피합니다. 요나가 도망갔던 것처럼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도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도 이런 콤플렉스에 걸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요나 콤플렉스를 해결해 주십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세 번째 거절합니다. 가서 해방의 소식을 전해도 백성들이 믿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사실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그는 백성들이 도저히 자신의 말을 믿을 것이라는 확신이 오질 않았습니다. 히브리어의 '믿다'는 말은 '아만'인데 '어린아이를 양육하다', '부모를 신뢰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양육받기를 거절할 것도 부모를 신뢰하듯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애굽인을 죽이고 동족으로부터 쫓겨난 양치기를 그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4:48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닫힌 마음에 아무리 얘기해줘도, 아무리 보여줘도, 절대 설득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을 때에는 부활을 보고도 믿지 아니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6:11에는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반드시 보고 들으면 믿는 것도 아닙니다. 아예 보지 않으려고 듣지 않으려고 닫아놓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족장 시대와 출애굽 사이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갑자기 임한 하나님의 계시와 모세의 신적 권위를 의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백성들에게 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예 들으려 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귀를 막고 이를 갈며 돌로 치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찔리면 회개할 것이지 마음에 찔리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돌로 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일부러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귀에 들리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둘째,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십니다. 모세가 이미 손에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모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지팡이였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요구하십니다.
지팡이는 모세가 가지고 있던 양을 치던 목장입니다. 휴대용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이 지팡이는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의미합니다. 시편 23편에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라는 말이 나옵니다. 목자는 지팡이와 아울러 대부분 쇠조각을 단 몽둥이로써 맹수를 막았다고 합니다. 양을 치는 사람이 가지고 다니던 흔한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양을 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칠 것을 요청하십니다. 더구나 유대인의 주업이 목축이었기에 목자의 지팡이는 가장 익숙한 도구였습니다. 모세는 장차 이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백성을 인도하고, 홍해를 가르고, 물을 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이것을 던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뱀이 되었겠습니까? "그럼 그 긴 막대기가 될 게 뭐가 있나?"라고 할지 모르지만 길기 때문에 뱀이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긴 지팡이라도 말이 되게도 하시고, 소가 되게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뱀은 바로를 상징합니다. 애굽 왕 바로의 두건에는 뱀이 그려져 있습니다. 모세는 지팡이가 뱀이 된 것을 보고 피하였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피해 살았습니다. 애굽인을 죽이고, 도망하여 바로의 낯을 피하여 40년을 살았습니다. 뱀을 다시 잡으니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뱀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뱀을 잡을 때는 꼬리를 잡지 않고 머리 쪽을 잡습니다. 물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꼬리를 잡으면 뱀의 머리가 돌아와서 물게 됩니다. 그런데 뱀의 꼬리를 잡는다는 것은 정면 대결을 의미합니다. 이제 모세는 바로와 정면 대결을 하게 될 것입니다. "꼬리를 잡으라"는 말은 '아하즈'라는 말로서 '제지하다', '조롱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가서 바로를 제지하고 조롱하듯 극복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모세에게 권능을 나타내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손에 있는 것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권능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손에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내게 있는 재능, 내가 가진 재물이 아무리 미약해도 하나님께 바쳐질 때 권능의 도구가 됩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에 사울 왕이 투구와 갑옷과 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몸에 맞지 않는 투구와 갑옷을 벗었습니다. 자시 힘에 너무 버거운 칼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냇가에 가서 물맷돌 다섯 개만 가지고 갔습니다. 그 물맷물 하나만을 가지고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내 손에 없는 것을 찾을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얻을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4:1-7에는 감동적인 드라마가 나옵니다. 엘리사의 생도 중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생도의 아내가 엘리사에게 와서 자신의 처지를 아뢰었습니다. 그 남편이 빚을 졌는데 빚을 갚지 못하니 빚쟁이가 아내와 두 아이를 종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엘리사는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그 집에는 기름 한 병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식구들로 하여금 동네 이웃에게 가서 빈 그릇을 빌려오게 합니다. 빌려온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기름 한 병이었지만 모든 그릇을 다 채울 때까지 기름은 넘쳤습니다. 그들이 이제 더 이상 그릇이 없나이다라고 하자 기름이 그쳤습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두 아들고 함께 생활하게 하였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있는 것만 가지고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있는데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빌립보서 2:2에는 봉사할 때에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허영으로 하면 봉사가 아닙니다. 내 손에 없는 것을 가지고 봉사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솔하게 손에 있는 것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기적은 일어납니다.
셋째, 여호와가 나타난 줄을 믿게 합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은 백성과 장로들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모세의 이적을 통하여 믿었습니다. 출애굽기 4:30-31네는 모세와 아론이 장로들을 모으고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이적의 목적은 현상이 아닙니다. 지팡이가 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적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애굽의 마술사들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경거리지 이적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적의 목적은 백성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이적의 목적이 마찬가지입니다.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며 믿게 하려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무리 이적을 보아도 믿지 아니하면 알지 못합니다. 본다고 믿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듣고, 기적도 보았지만 그러나 얼마 후에는 배반하고 죽이라고 고함치는 군중으로 변하였습니다. 이적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나사로의 사건에도 보시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아도 말씀을 믿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씀을 듣고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1:15)고 하십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무덥 앞에서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2)라고 하십니다. 기적의 현상이 아니라 믿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0:31에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도 믿음입니다. 요한복음은 믿음의 복음입니다.
미국 디트로이트출신의 침례교 신자인 크리스틴 클레이풀은 쿠바에 선교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맡은 일은 스페인어 성경을 전달하는 임무였습니다. 선교사는 성경을 한 권이라도 많이 가져가려고 옷을 겹겹이 입고 가방에 성경을 잔뜩 넣었습니다. 옷차림새를 이상하게 느낀 공항 직원은 그녀를 특별히 조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관원 앞에 가방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방의 지퍼가 열리지 않습니다. 3센티 가량 지퍼가 열리더니 움직이질 않습니다. 세관원은 자신이 가방을 받아 아무리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자 가방을 던지며 가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호텔 방에서 가방을 열기 위하여 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칼도 필요 없이 손을 대자 가방은 열렸습니다. 별로 멀지 않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적은 지금도 예나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찬송가처럼 나의 생명을 드립니다. 손과 발을 드립니다. 음성을 드립니다. 보화를 드립니다. 시간을 드립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만 드려도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적은 나타납니다. 있는 것만 드려도 놀라운 은혜가 넘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십시오. 한 어린이가 가지고 온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입니다. 그러나 이 어린이의 손에 있던 작은 것이 예수님께 드려지고 축사할 때에 5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우리 손에 있는 것만 드려도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어린이들의 고사리 손에 있는 것만 드려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의 손에서 주님께 바쳐진 것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바쳐진 작은 것들이 그들이 생활에 기적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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