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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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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양인순 목사 |
참고 : | 2010.8.1 성지교회 http://sungjii.or.kr |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칼 매닝거(Karl Menninger,1893-1990)는 “태도(attitude)가 사실(fact)보다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똑같은 크기의 사과 5개를 A와 B에게 나눠줍니다. A는 5개 중에서 제일 맛있어 보이는 것을 먹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도 4개중 제일 맛있어 보이는 것을 먹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제일 맛있는 사과를 먹습니다. 그리고 내가 먹은 사과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사과였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B는 5개의 사과 중에서 제일 맛없어 보이는 사과부터 먹습니다. 다음에는 남은 4개 중에서 맛없어 보이는 것을 먹습니다. 마지막까지 B는 제일 맛없는 사과만 먹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먹은 사과는 세상에서 제일 맛이 없다고 말합니다.똑같은 사과를 한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사과로 먹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제일 맛없는 사과로 먹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똑같은 사과일지라도 어떤 태도를 가지고 대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실(facts)들을 대합니다. 기쁘고 좋은 일도 있지만 대부분은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고통의 바다에서 사는 것처럼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일지라도 어떤 태도를 가지고 대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확연히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누가 봐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감사하며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갑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좌절하거나 낙심합니다. 절망가운데 빠집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뒷걸음질 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린 기억이 있는데요. 전도사로 사역할 때입니다. 가난하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게 공장에서 일하시는 남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왼 쪽 손목이 잘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병원 심방을 가는데 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떻게 집사님을 위로해야 하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나쁜 짓하는 놈도 많은데 하필 성실하고 믿음 좋은 집사님의 손을 원하셨을까? 답답한 마음으로 병실문을 열었습니다. 그때 집사님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저를 위로하려고 하지 마세요. 저는 이번 사고를 통해서 회개를 했습니다. 두 손 주신 것 가지고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감사해 보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두 손 다 자르실수도 있는데 일 할 수 있는 한 손 남겨두셨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저는 그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팔만 부러져도 팔자가 사납다니 재수가 없다느니 원망 불평인데 한 손이 잘리고도 회개와 감사를 할 수 있는 집사님의 신앙이 위대해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 신앙의 모습이구나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바꿀 수는 없지만 환경을 대하는 태도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문제를 보면 해답이 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었지만 바로의 궁정에서 40년 동안 왕자로서 교육을 받고 살았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이 히브리어로는 ‘물에서 건진 아이’이지만, 이집트 언어로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애굽의 왕궁에서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모세는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바로의 궁전에서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리더십을 지닌 일군으로 성장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자신의 힘과 능력을 신뢰하는 자신만만한 자였습니다. 그는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기 민족이 애굽의 압제아래 노예로 고통당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을 치는 모습을 본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죽여 버립니다. 자신만만했던 모세의 일생에 한순간 위기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살인범으로 몰린 모세는 하루아침에 왕궁을 떠나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합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모래바람 부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세계 최고의 왕궁에서 왕자로 군림하던 자가 목동의 신세로 전락하여 아무런 기대와 소망도 없이 양을 치는 모습을...모세는 여기서 철저하게 낮아지는 훈련을 합니다. 자신이 최고라고 여겼던 왕궁에서의 40년, 그리고 자신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비천한 존재임을 깨닫는 40년의 세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습니다. 절망과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모세를 드디어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모세의 소명장으로 알려진 출애굽기 3장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알려진 호렙산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기이한 장면을 봅니다. 지금도 시내산 밑에 성 캐써린 수도원이 있는데 그 수도원 안에 한 그루의 떨기나무가 있습니다.(사진1,2,3)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불러 사명을 주십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노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7-9)
깜짝 놀란 모세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낼 수 있습니까?’10절)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2절)
그러자 모세가 또 묻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면 그들이 내게 너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13절)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명하십니다. 비록 바로가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너희가 출애굽 하는 것을 허락지 않겠지만 내가 반드시 은혜를 베풀게 하여 빈손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애굽의 금, 은, 보화와 물품을 취하여 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다시 모세가 대답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믿지 않고, 내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보지도 못했다고 말할 것입니다.’(출4:1) 여기까지의 장면을 생각해보면 모세의 입장이 대단히 신중함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40년간의 왕궁생활, 다시 40년간의 목동생활... 그림이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비천한 양치기로서 그동안 모세의 자의식은 철저하게 낮아졌습니다. 자신은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철저한 자괴감이자 열등감의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볼 때 도저히 감당할 능력도 없고, 노예근성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믿어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애굽의 왕이 양치던 목동의 말을 듣고 노예로 부리고 있던 자들을 보내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이런 모세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자신만만하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모세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모세가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지나온 40년의 세월 속에서 체험한 자신의 비천함과 열등감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지나치게 자신감이 있어도 의외로 열등감에 빠집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과 조금한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열등감이 많을까요? 실제로 우리가 볼 때 좋은 대학,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이 열등감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그만큼 높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내가 이만큼 배웠으면 내가 이런 대우, 위치, 권세를 가져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잘된 사람을 보고 항상 비교합니다. 그리고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반대로 삶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모세의 경우는 후자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의 열등감이든지 마귀는 그것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묘하게 우리 안에 열등감이라는 가라지를 뿌립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자꾸 시험에 빠뜨리고, 넘어뜨립니다. 상처를 받게 합니다. 열등감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무서운 적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열등감을 극복시켜서 하나님의 사명자로 삼아가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열등감의 노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어가는 능력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요?
2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하나님은 먼저 모세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겸손함과 자기비하는 분명히 다릅니다. 겸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타인이나 공동체를 위해 절제하는 것입니다. 자기비하는 자기 안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거나 비굴해 지는 것입니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잘 것 없고, 남이 가지고 있는 대단한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열등감을 넘어서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의 소중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인정할까요?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심으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상속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임을 항상 고백해야 합니다. 옆에 계신분의 자존감을 높여 주기 위해서 함께 고백합니다. “당신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다시 한번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우시고 “당신은 하나님의 천연기념물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자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소중함을 압니다. 여러분! 남자분들은 아내의 소중함을 항상 인정하십시오. 비록 젊은 시절의 미모는 없어도 내 곁에서 나를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아내들은 남편의 소중함을 인정하십시오. 비록 다정다감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가장으로서 얼마나 힘들게 달려왔습니다. 더 따뜻하게,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특별히 직장에서 은퇴한 남편과 함께 사시는 분들은 더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남편을 대하십시오. 미우나 고우나 끝까지 내 곁을 지킬 사람은 바로 아내요 남편입니다.
때로는 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으로 감싸 주세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강연하던 강사가 질문을 했답니다. “여러분 가운데 미워하는 분이 없으시면 한 번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체면 때문에 손을 들지 않더랍니다. 한참 후에 할아버지 한 분이 손을 들더니 “있었는데 ----다 죽었어” 하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자꾸 옆집 아이와 비교하지 마세요. 요즘 애들이 하는 말중에 <엄친아, 삼지>가 있습니다. 엄친아는 엄마의 친구 아들이라는 약자입니다. 삼지는 착하지 이쁘지 공부잘하지입니다. 엄마가 항상 자기 자녀에게 옆집 엄청 친한 친구 아들과 비교하면서 하는 말이랍니다. 건강하게 학교 잘 다니면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주일 성수하면 더 감사하십시오. 조금 못하면 어떻습니까? 조금 늦게 가면 어떻습니까? 바르게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일하는 일터를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이 주신 성직임을 알고 최선을 다해서 일하십시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그 사업이 하나님의 사업임을 알고 열심을 내십시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선한 목적을 품고 달려가십시오.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꽃을 피우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성지교회를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이 땅에 5만개가 넘는 교회가 있지만 여기에 불러주신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목회자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해 주십시오. 다른 교회 목사님이 아무리 멋져 보인들 어떡하겠습니까? 부러워하지 말고 더 훌륭한 목사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성도 간에도 서로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십시오. 내가 속해 있는 교회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때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내게 주어져 있는 것들, 그것이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소중하게 여길 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철저하게 자신의 무능력 앞에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없는 것을 찾지 말고, 이미 너에게 있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지팡이입니다. 모세가 생각할 때 그 지팡이는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무가치해 보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양이나 몰고 다니고, 짐승을 좇을 때 사용했던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지팡이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영화 ‘십계’에 서 찰튼 헤스턴(Charlton Heston)이 홍해를 갈랐던 크고, 신비로운 지팡이가 아닙니다.(사진4,5) 지금도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토프카피 (Topkapi) 박물관에는 모세의 지팡이가 전시되어 있습니다.(사진6) 모세가 진짜 사용했던 지팡이라기보다는 모세 당시에 목동들이 사용했던 지팡이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지팡이는 겨우 1m 정도의 크기로 길거리 어디서나 주울 수 있는 작은 막대기에 불과합니다.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네가 붙잡고 있는 아무 쓸모없는 것 같은 막대기라도 내가 사용하면 큰 능력의 지팡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열등감을 극복하는 비결은 내게 있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크고 화려한 것을 추구합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자랑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고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세상의 가치기준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기준을 초월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방랑자에 불과했던 하삐루(habiru)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지 않고, 애굽이나 헬라제국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면 훨씬 빠르게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은 430년이나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신명기 7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은 당시의 강대국이 아닌 가장 약한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많이 배우고, 가문이 좋은 엘리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가장 천한 직업중에 하나인 어부들, 세리들을 제자로 삼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7)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약한 자들을 부르셔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셔서 부요한 자, 권세 있는 자들을 폐하십니다. 이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거리가 못 된다는 증거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한 자들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역사를 이루는 촉매가 됩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오히려 약함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깨닫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모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지팡이를 크게 여기십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는 지금까지 양이나 몰고 다니며, 짐승을 좇던 작은 작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능력의 지팡이가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지팡이가 어떤 역사를 행할 것인가를 실제로 보여주십니다. 모세에게 더 이상 너는 쓸모없는 막대기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위대한 존재임을 이적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명하십니다. 그것이 뱀이 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모세가 뱀을 피합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엄청난 독성을 지닌 뱀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뱀을 자신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겼습니다. 이집트 박물관에 가보면 당시 왕들이 사용했던 지팡이에 뱀이 새겨져 있습니다. 왕이 앉았던 의자에도 뱀이 양쪽에 고개를 쳐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뱀을 잡을 때는 반드시 머리를 잡아야지 꼬리를 잡으면 십중팔구 물리게 됩니다. 모세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지만 뱀의 꼬리를 잡습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열등감을 해소시키고,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고자 이런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열등감을 넘어서는 비결은 바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이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실패와 상처 투성이 일지라도 그것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 상처와 실패와 아픔의 상처들이 주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직접 목격한 모세는 계속해서 자신을 비하하면서 머뭇거립니다. 손에 나병이 발했다가 다시 낫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말 재주가 없고, 혀가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서 하겠다고 발뺌을 합니다. 이쯤되자 하나님께서 좀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11절에 보면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더 이상 변명하지 말고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13절). 화가 나신 하나님께서 형 아론을 붙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17절에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모세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는 더 이상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기적을 행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 지팡이를 가지고 홍해를 가릅니다. 반석을 쳐서 생수를 나오게 합니다. 이제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드디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더 이상 모세는 양을 치는 막대기로서의 지팡이가 아닌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위대한 지팡이를 손에 들게 되었습니다.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것을 하나님의 손에 올려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그것은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능력의 도구가 됩니다.
여기 제가 좋아하는 만년필이 있습니다. 이 만년필을 실에 묶어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비싼 만년필이라도 제가 원하는 글을 쓸 수 없는 무가치한 것이 됩니다. 아무리 고급 만년필이라도 유치원생의 손에 들려져 있으면 그것은 300원짜리 모나미 볼펜만도 못합니다. 그러나 작가의 손에 들려지면 아름다운 시를 쓸 수도 있고, 멋진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값이 비싸냐가 아닙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느냐가 아닙니다. 누구의 손에 잡혀 있느냐 입니다.
아무리 소중하고 귀한 것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지 않으면 죄악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의 재능이나 재물도 하나님의 손에 있지 않으면 쾌락과 타락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손과 접촉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야 합니다.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보면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사진7) 하나님이 아담을 향해 손가락을 펴서 아담과 접촉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손에 접촉할 때,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붙들리게 될 때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닫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의 의미가 생깁니다.
전에 바닷가에 갔다가 파도에 떠밀려온 나무조각을 보았습니다. 제 눈에는 쓰레기로 보였지만 성전에 꽃꽂이를 하는 권사님은 그것을 가져다가 강단에 멋진 장식으로 사용했습니다. 제 눈에는 쓸모없는 쓰레기지만 권사님의 눈에는 작품의 소재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보잘 것 없고, 쓰레기 같은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귀히 여기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세요. 다 잃어버렸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나에게 아직 남아 있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남아 있다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순간 홍해가 갈라지고, 생수가 나오고, 출애굽의 리더가 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내 손에 있는 지팡이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순간 그것은 내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는 지팡이가 됩니다. 하나님이 들어 쓰시기만 하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다윗의 손에 들려있는 보잘 것 없는 물맷돌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 거인 골리앗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집니다. 벳세다 광야의 소년의 손에 들려졌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통하여 주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더 이상 남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서 허우적거리지 마십시오. 자신을 비하하며 비굴한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내 손의 지팡이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올려 드리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더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룰 줄로 믿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의 질문 앞에서 “주님! 이제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살겠습니다.” 믿음으로 고백하며 세상을 향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다같이 전능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 하실 일 전혀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 일행하시고 죽은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자 아무도없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자 에겐 능치 못함없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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