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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오아시스

출애굽기 김승규 목사............... 조회 수 1998 추천 수 0 2013.01.10 00: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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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5:22-27 
설교자 : 김승규 목사 
참고 : 2010-08-01 광명교회 http://www.kmchurch.com/ 

내 영혼의 오아시스

 

요절 : 출애굽기 15장 25절  “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회자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릴렉스(relax)입니다. 릴렉스란 말 그대로 '긴장으로부터 해방'을 말합니다. 예전에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는 사람을 최고로 생각했으나 요즘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이제 가장 미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회사를 위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못됩니다. 과로가 많은 사고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또 상당한 비 능률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커피 브레이크 타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커피 한잔을 마시는 잠깐의 휴식입니다. 잠깐의 휴식이지만 손실된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이렇게 잠시의 휴식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든지 휴가는 법제화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일 년에 법정 휴가를 4주간 줍니다. 독일에서는 노사간의 합의에 따라 그 때, 그 때 휴가를 줍니다. 미국에서는 휴가를 '베이컨시'라고 합니다. 이 말은 텅 빈 공간에서 유래합니다. 휴가철이 되면 도심이 텅빈데서 온 것입니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연차와 월차 등 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토요 휴무제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휴가와 휴식은 모두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사람은 휴식이 없으면 살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도 이 사실은 여실히 증명됩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마라에 당도했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과 감격에 넘쳐 났습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체험했습니다. 그들 속에는 넘치는 감격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홍해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사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도 물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구원의 감격을 맛본 사람들답게 의연히 견뎠습니다. 그리고 오아시스가 있는 마라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삼일만에 오아시스에 당도했을 때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또 우리에게 오아시스를 주시는구나" 그들은 마라의 발견을 통해 인내와 믿음의 승리를 노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마라의 물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썼기 때문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인내는 바닥이 나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삼일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참을 만큼 참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온 상황은 은혜의 상황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대한 휴식과 안정이 아니었습니다. 상큼한 오아시스가 아니라 마라의 쓴물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이 폭발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특별히 악하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이 되면 충분히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이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영적인 사실 하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안식은 눈에 보이는 오아시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사로부터 일주일 혹은 한 달의 휴식을 얻는다고 거기에 안식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몸만 쉬면 휴식이 있고 휴가만 내면 안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그렇다면 저들에게 마라의 쓴 물 대신 단물을 주시며 그들의 인내에 대해 보상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국 그 마라의 쓴 물을 변하여 단물을 내어 주십니다. 안 주는 것이 아니라 주십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교훈을 주신 다음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또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육체적인 쉼에서 더 나아가 영혼의 오아시스를 경험하게 하시길 원하셨다는 것입니다.진정한 안식이란 육체적인 것을 뛰어 넘어 하나님이 주시는 참 안식을 얻을 때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오아시스를 통해 안식을 누리려고 하였기에 그 기대가 무너지자 모든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것입니다.하나님은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그 너머에 있는 진정한 영혼의 오아시스에 그들을 안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영혼의 오아시스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첫째,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이 끝이라고 단정했습니다. 물이 쓴 오아시스 앞에서 그들은 절망을 노래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악에 받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애타게 찾고 찾았던 오아시스였습니다. 오아이스를 못 만났다면 차라리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썼습니다. 마실 수 없을 만큼 썼습니다. 그들의 절망감은 더 컸습니다. 안식은 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만이 그들을 기다릴 뿐이라고 단정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무엇이 달랐습니까? 사람의 안식은 눈에 보이는 오아시스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의 차이였습니다. 모세는 안식의 길이 여전히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모세는 확실히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을 같이 보면 선지자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을 갖는 것이 선지자적인 신앙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모든 성도들은 선지자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절망의 극한 상황에서도 영원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모세가 그런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백성들이 절망을 노래할 때에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보여 주는 것입니까? 우리의 진정한 오아시스는 목가적인 자연환경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영혼의 안식처는 바로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에 있습니다.

 

 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영혼의 안식을 얻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줄 아십니까? 놀러는 잘 다닙니다. 휴양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 가면 어떤 명소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회사에서 휴가도 잘 얻습니다. 그러나 참된 안식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영혼의 오아시스를 주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구할 줄을 모르면서 영혼의 오아시스를 주지 않는다고 원망만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루터 교회에 톰슨 목사님이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을 잃었습니다. 함께 교회학교 교사 집회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소아마비 증세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단 이틀만에 죽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아무리 목사님이라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혈압이 올랐습니다. 신경과민이 되었습니다. 식욕이 사라졌고, 강단에서 설교할 힘이 나질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깊은 절망에서 헤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곧 급속히 회복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되찾았습니다. 얼마 후에 놀라워하는 교인들 앞에서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의 슬픔도, 절망도, 고독감도, 괴로움도 모두 기도로 쏟았습니다. 그러자 내 마음은 차차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아들을 잃은 슬픔이 아직 남아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그 같은 경험이 있던 전보다 더욱 현명해졌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더 잘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좋은 결과로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기도가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했던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 때 예수님은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인성을 입으신 이상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그 영혼이 요동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겨내고 안정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 있는 신성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겟세마네에서 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하시는 동안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항상 지지자들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반대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인신에 공격을 가해 왔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으로 마음에 안정을 얻으셨습니까? 성경을 보면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눅6:11-12)

 

 예수님은 기도를 결코 쉬지 않으셨습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오아시스였습니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모든 영성이 회복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낮에 상처가 난 마음들이 밤과 새벽의 기도를 통해 회복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오아시스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기도입니다. 복음성가에서도 "기도는 우리의 안식"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에 안식이 없다고 한탄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니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둘째, 불굴의 정신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여기 '물샘 열 둘' 이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바로 12지파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는 바로 엘림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위해 마련된 오아시스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더위에 허덕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들의 고난이 왜 나의 책임이냐고 나 몰라라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와는 정반대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을 바로 당신의 책임으로 인식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사막 한가운데서도 오아시스를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예레미야 29;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평안과 안식을 친히 마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광야에 주저앉는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들이 마라에 앉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마라에서 엘림까지는 고작 10km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홍해에서 걸어온 거리에 비하면 결코 먼 거리가 아닙니다. 즉 그들이 조금만 더 전진해 왔다면 그렇게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영혼의 오아시스를 만나기 원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는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의 이야기 가운데 『작은 유대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 어머니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들려주던 이야기입니다. 키 작은 유대인이 알래스카 벌목 장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주인이 유대인을 무시하고 골탕먹이고 싶어 큰 도끼를 주면서 아름드리 거목이 있는 곳으로 보낸 것입니다. 거대한 나무아래 있는 이 사람의 모습은 마치 '고목 나무에 매미 붙은 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일솜씨는 키가 장대한 일꾼들을 능가했습니다. 유대인을 골탕먹이려던 주인이 오히려 놀라서 물었습니다.

 

"벌목을 어디에서 배웠느냐?" "사하라 정글에서 배웠습니다." "사하라는 정글이 아니라 사막이겠지" 그러나 유대인이 능청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예, 제가 나무를 몽땅 잘라서 사막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체구가 작아도 의지가 살아 있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역경을 헤치고 나아가 성공과 승리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24: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지쳐 있습니까? 아무런 평안도, 휴식도 없습니까? 낙심 상태에 있고, 손 하나, 발 하나 움직일 여력도 없습니까? 그러나 이제 일어설 수 있길 바랍니다. 모든 것이 끝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저 너머에 하나님의 안식이 기다리고 있으니 일어나 차지할 수 있길 축원합니다.

 

셋째, 긍극적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치에 항거 했던 본훼퍼 목사님이 사형 집행 당하던 날 영국의 한 장교가 이런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마지막 이군요, 안녕히 가십시오" 그 때 본훼퍼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이 아닙니다. 지금이 시작입니다.'

 

 우리는 이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행복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안식이 있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누구나 그것을 다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슬픔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한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주스런 삶 앞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지냅니다. 자살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범죄의 길로 들어갑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의 쾌락에 자기를 던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미래에 대한 비젼이 없을 때는 한없이 절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네스바네아에서 왜 절망했습니까? 오아시스가 없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가데스바네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난 가장 큰 오아시스였습니다. 이 곳에서 그들은 상당기간 머물렀습니다. 물도 풍부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그들은 커다란 것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나안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들은 이 곳에서 열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에 대해 악평하는 말을 접하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가나안에 대한 모든 꿈을 접었습니다. 이 때로부터 그들의 방황은 시작되었습니다. 40년 가까운 방황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전까지 그들의 광야 여정은 방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에 대한 소망을 접은 후부터 달랐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야말로 방황이었습니다. 소망이 없으니 사는 것이 괴롭습니다. 짜증납니다. 결국 그들의 대다수가 그렇게 방황하다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살아도 지옥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을 가질 때 그의 삶은 생동감이 넘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평안이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안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3:12) 이 소망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일 떠나는 교회 수련회를 통해 영육간에 오아시스를 경험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영육간에 쉬면서 또 하나님께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참 안식을 누릴 수 있길 축원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으며 죽음보다 강하다 했으니 수련회를 통해 주안에서 형제된 성도들이 더욱더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음으로 내일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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