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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가 누구냐

출애굽기 이동춘 목사............... 조회 수 1825 추천 수 0 2013.01.10 00: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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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5:1-9 
설교자 : 이동춘 목사 
참고 : 2009-04-19 비전교회 http://www.vision21com.com/ 

여호와가 누구냐

 

하나님과의 밀고 당기는 긴 논쟁 끝에 모세는 항복을 했습니다. 더 이상 핑계를 댈 수 없게 되자 항복을 했고, 항복한 이상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미디안을 떠나 형제들이 있는 애굽으로 갔습니다. 가서 형 아론을 만나고, 형의 도움으로 장로들을 만나고, 장로들의 도움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자신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믿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가 버텼던 것 중 하나가 자신이 전달하는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뜻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되어진 것을 보면 너무도 쉽게 받아들인 겁니다.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 4:31)

 

그런데 모든 것이 다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다 어렵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을 넘기면 쉬운 것이 옵니다. 그래서 살만한 겁니다. 그런데 쉬운 것을 넘으면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출애굽기는 이러한 사실을 쉽게 확인해 줍니다.

 

백성들을 만난 후 모세는 아론과 함께 바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다음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1절) 이 용기 있는 전달 앞에 바로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바로는 즉각 거절합니다. 모세가 당황했을까요? 아닙니다. 예상했던 바입니다. 왜냐하면 진작 하나님이 바로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3:19, 4:21 참조) 그러나 막상 당해보니 만만치 않습니다. “여호와가 누구냐? 나는 그를 모른다. 그런데 내가 왜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이제 그만 웃기는 소리 집워치워라!” 이것이 바로가 보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이러한 반응은 정말로 여호와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어서 그런 걸까요? 저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개그콘서트의 마지막 코너인 봉숭아 학당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코너는 구성원들의 좌충우돌을 통해 웃음을 제공하는데, 이 봉숭아 학당의 마지막 등장인물이 왕비호라는 윤형빈 군입니다. 이 친구는 그날 개그콘서트를 찾은 연예인들을 놀려먹는 것으로 유쾌함을 더합니다. 그런데 이 코너의 선생님이 그에게 ‘누구누구를 아느냐’고 물어보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친구는 ‘누구?’냐며 모르는 척, 무시하며 딴청을 부립니다. 그러다간 ‘아~걔~’ 그러면서 그에 대한 장난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지금 파악하고 있는 바로의 “여호와가 누구냐?”라는 질문은 윤형빈 군의 ‘누구?’냐며 능청을 부리는 반응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여호와가 누구냐?”는 질문은 여호와를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자기가 노예로 부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일단은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아무리 무심한 왕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겁니다. 단지 알면서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기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겁니다.

 

그렇다면 바로가 이런 냉소적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근거가 있을 겁니다. 무엇일가요? 그건 여호와는 자신이 노예로 부리고 있는 이스라엘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신이 믿는 신은 자신을 세계의 왕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의 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어 놓은 반면, 이스라엘이 믿는 신은 겨우 노예생활이나 하게 하는 정도라면 무시해도 좋을 신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일종의 비교우위론에서 여호와는 한 수 아래의 신이라고 여긴 겁니다.

 

어느 정도로 냉소적인지 다시 봅시다. 바로의 냉소적인 반응에 모세와 아론이 다시 한 번 간청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3절) 모세와 아론이 다시 전한 메시지에는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라는 메시지가 추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이 애굽을 치실 것이다’라는 우회적 메시지인 겁니다.

 

그러나 바로의 반응은 여전합니다. 오히려 더 완고한 반응을 보입니다.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4절) 그리고 9절에서는 모세와 아론의 말을 “거짓말”로 규정합니다. 이렇게 바로는 결코 하나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심한 냉소를 보내고 있는 겁니다. 노예들의 하나님에게 겁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와 같이 이런 냉소적인 태도가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로마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종교적 모함에 의해 처형을 당하실 때 로마 병사들에 의해 처형을 당하신 겁니다. 그런데 로마가 힘으로 세계를 지배는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헬라의 철학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500년 전쯤 살았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과 같은 이들이 헬라의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헬라의 철학이 오랜 세월 인간사조의 중심을 지배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철학이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입니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 17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선교여행 중 철학의 도시 아테네(아덴)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토론할 기회를 가졌는데 지적 호기심이 많은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라는 공동토론장소로 데리고 갑니다. 그때 주로 토론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스토아와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원하는데 이는 이성의 도움을 받아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에 달렸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들에게 질서가 있는 자연은 곧 신(神)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 철학 또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인간의 행복은 자신들이 자유롭게 어느 것이든 선택하여 즐길 때만 찾아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운명을 묶어버려 인간을 자유를 가져가는 신(神)은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진정한 쾌락은 신이 없어야 즐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토아 철학이 질서와 이성을 강조하는 철학이었다면, 에피쿠로스 철학은 쾌락과 감정을 강조하는 철학이었습니다. 이후 이 두 철학 중, 스토아는 모더니즘(modernism)으로, 에피쿠로스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으로 각각 발전합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기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그 속내는 에피쿠로스 철학을 닮은꼴입니다.

 

종교 안에, 특히 기독교 안에 이런 사고들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소위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신론’ 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이교적 사상입니다.

 

최근에 현대판 무신론을 보여주는 사건 하나 있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에 주도된 버스 광고 사건입니다.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의 저자입니다. 이 사람은 진화생물학자로서 영국인본주의자협회(British Humanist Association)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주도하에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걱정 말고 인생을 즐겨라.>라는 광고를 작년 12월 말부터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즈 등 영국 전역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마드리드·발렌시아·세비야·사라고사·빌바오를 운행하는 버스 수천 대에 부착한 겁니다.

 

이들의 말이 <There's no God.>가 아니라 <There's probably no God.>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은 없다’고 하면 단정을 짓는 것인데,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는 말은 애매한 표현입니다. 겉으로 보면, 신의 존재에 대해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는 듯 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도의 전술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이 즐겨 추구하는 것이 바로 ‘애매함’이기 때문입니다. 이 애매함은 극과 극을 거부하는 겁니다. 이 애매함은 너의 것도 인정하고 나의 것도 인정하자는 겁니다. 이 무신론은 포스트 모던적입니다.

 

이런 무신론 광고가 확산되자 영국 감리교회는 “신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환영의 뜻을 표명했다고 합니다. 이는 현재 영국의 기독교 영성이 거의 무너져 내려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되는 성명입니다. 현재 영국에서는 회개한 기독교인들을 뜻하는 ‘거듭난 기독교인’(born-again Christian)에 빗대 ‘거듭난 무신론자’(born-again Atheist) 같은 문구를 티셔츠나 자동차 범퍼에 붙이고 다니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국 감리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대단히 포스트 모던적입니다. 반면에 로마 교황청 폴 푸파르(Paul Poupard) 추기경은 “어리석고, 무의미하며,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히야,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더 보수적이네’라고 생각할 분이 있을 겁니다. 스페인에서는 일부 종교인들이 “신은 존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을 즐겨라!”(God does exist. Enjoy life in Christ)라는 광고를 내보냈다고 합니다. 일종의 역(逆)광고를 낸 거죠.

 

지금 또 하나 소개하려는 것은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것입니다. 최근 호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9일부터 13일까지 부활절 휴가기간을 맞고 있는 호주에서 성경책과 십자가가 교회로부터 홀대받는(?) 사태가 발생한 겁니다. 국민의 73%가 기독교인인 호주는 크리스마스와 함께 부활절 축제를 전 국민적 축제로 치르는 곳입니다. 그런데 부활절 이브였던 4월 9일, 로열노스쇼어병원 안에 있는 교회에서 십자가와 성경책 등 기독교 관련 심벌들을 전부 치워버린 것입니다. 이유인즉, 다양한 신앙을 가진 타 종교인들에게도 예배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해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자는 뜻 때문이었답니다.

 

그러자 일부 성도들이 예배당에서 십자가와 성경 비치를 금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모독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답니다. 그러나 병원 측 대변인은 병원을 찾는 환자들 중에 기독교인이 절대다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예배당을 찾는 환자는 아주 소수라면서, 예배당은 텅 비었는데 타종교를 믿는 환자들은 다락방 같은 곳에서 묵상한다고 항변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번 조치의 결과로 예배당이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 모두를 환영하는 ‘멀티 신앙’의 공회당이 됐다면서 기독교도 시대적인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보거나 기도를 하고 싶으면 교회보관함에 있는 십자가와 성경을 꺼내서 활용하면 되고, 예배나 기도가 끝나면 타 종교인들을 위해 십자가와 성경을 보관함에 넣어 놓으라는 예배당사용지침을 공지했답니다.

 

논란이 확산되자, 논란의 중심에서 오해를 받고 있던 호주이슬람친선협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사태를 진정시켰는데 그 말이 “십자가 있어도, 무슬림은 기도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호주이슬람친선협회 대변인이 <케이사르 트라드>입니다. 이 양반이 최근 인터뷰한 내용을 그대로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이 인터뷰가 종교다원주의가 어떤 것인가를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시인인 것은 알고 있지만, 지난 크리스마스 때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시를 쓴 카드를 보내줘 깜짝 놀랐다. ⇒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으면 누구의 탄생을 축하하겠나. 예수는 죄를 많이 짓고 사는 인간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진 성자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묵상하면서 회개한다.

 

-그럼 무슬림도 부활절 기간에 특별한 예배를 올리나? ⇒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무슬림들끼리 만나면 부활절 축하사를 나눈다. 나는 최근에 예수 부활에 관한 시를 써서 이슬람교 모임에 나가서 낭송했다. 갈수록 깊어지는 시대의 어둠을 예수 부활의 정신으로 극복하자는 내용인데 큰 박수를 받았다.

 

-왜 그렇게 시대의 어둠이 깊어졌다고 생각하나? ⇒ 현대인의 물질숭배가 심각한 지경에 이른지 오래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다. 물질은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소이지만, 인간이 맑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을 도와주는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은 영혼과 물질의 가치가 전도됐다.

 

-<채널7> TV 인터뷰 이후 주변 반응이 어땠나? ⇒ 놀랄 만큼 큰 반응이 있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게 감동받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 대부분이 “무슬림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고 말하여 오히려 내가 놀랐다. 인터뷰 후에 만난 무슬림들은 “우리의 생각을 잘 전해주어 고맙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슬람교에서 예수의 존재는 어떤 의미인가? ⇒ 신은 하나다. 다만 사람들이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의 여러 방식으로 신을 신앙할 따름이다. 예수도 신앙의 대상 중의 하나다. 다만 이슬람에서는 마호메트가 ‘신의 마지막 메시지를 받은 것’으로 믿고 알라를 신앙한다.

 

-로열노스쇼어병원의 이번 조치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는? ⇒ 어제 처음으로 그 채플을 가보았다. 언덕 위에 있는 아름다운 교회였다. 병원 대변인의 말대로 ‘멀티 신앙’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더욱이 그곳은 환자들과 환자의 가족들이 주로 예배를 보고 기도하는 장소가 아닌가. 거듭 말하지만, 채플 안에 십자가와 성경이 있어도 알라신을 경배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

 

종교다원주의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종교는 다양하고, 구원의 길은 종교마다 다 있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든 구원의 길이 있으니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는 말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종교다원주의와 그 철학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이러한 시대적 현실에 대응하는 신앙의 변증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 논리가 대단히 교묘하고 인정적(仁情的)입니다. 좌도 건들지 않고 우도 건들지 않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방향으로 분위기를 몰고 갑니다. 그러니 열화와 같은 성원을 입는 겁니다. 정말로 교묘하고 치밀하고 인정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교회와 신앙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지혜롭게 막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주의입니다. 사방에서 “여호와가 누구냐?”며 빈정대는 말들이 홍수를 이루는 시대입니다. 참으로 긴장되는 시대입니다. 갈수록 더 과감하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무장된 무신론과 종교다원주의가 교회와 신앙의 현장을 침투해 올 것입니다. 마치 바로처럼 말입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재 요구에 성질을 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4절) 그리고는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을 불러 명령을 합니다. 벽돌에 들어가는 짚을 제공하지 말고 알아서 짚을 구해 쓰되, 벽돌을 만들어 내는 숫자는 지금처럼 그대로 내게 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조치는 참으로 기가 막힌 조치입니다. 짚이 제공 되도 노역인데, 짚을 구하기까지 해서 벽돌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중노역이 되는 겁니다.

 

아주 악랄한 수법으로 탄압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말인 겁니다. 그리고 노예들의 하나님이야 말로 허약한 신(神)인 겁니다. 무시해도 좋은 신(神)인 겁니다.

 

지금 이 세상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가격(加擊)을 일삼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이 바르게 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아서 하나님이 무시당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바로가 하나님을 무기력한 신으로 보게 된 것도 애굽의 문화에 저항 없이 순응하거나 빠져 들어가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무시하는 마음이 생겼을 겁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리 잘해도 무신론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진리를 교묘하게 뒤트는 종교다원주의 철학은 기승(氣勝)을 더할 것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한2서 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다서 3-4)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시록 13:1-10)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더 굳건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무신론과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조(思潮)가 교회와 우리의 믿음 안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분명한 성경이해와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이렇게 되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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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0 출애굽기 어처구니 없는 믿음을 버려라! 출5:15-21  양의섭 목사  2013-01-10 1642
8069 출애굽기 내 영혼의 오아시스 출5:22-27  김승규 목사  2013-01-10 1998
8068 출애굽기 나는 여호와로라 출5:1-6:8  석기현 목사  2013-01-09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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