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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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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8-07-06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사랑은 오래 참고1: 고난의 사랑과 구원의 지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
사도는 드디어 사랑의 여러 특성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흔히 이 말씀에 나오는 사랑의 특성들이, 나눠진 과일조각을 하나로 모으면 온전한 과일인 되는 것처럼 한데 모여 사랑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즉 사랑은 오래 참음, 온유함, 투기하지 않음, 자랑 없음, 교만치 않음, 예의 이런 것들이 모여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빛은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모든 빛과 관련 맺는 사물 속에서 작용함으로 있음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신자 안에 사랑은 신자의 영혼 안에 있는 성향이기 때문에 볼 수 없습니다. 그 자체로는 영혼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영혼에 깃든 성향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랑의 많은 특성들이 바로 그렇게 사랑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찬연한 빛을 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도대체 어디서 이 사랑을 알게 되었을까요?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매우 못생긴 인물이었으나 매우 다부지고 신념에 찬, 약간은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젊은이였다고 합니다. 사랑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 사람이 어떻게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사람의 가슴을 울린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요?
Ⅰ. 바울의 사랑 경험
그가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는 증거는 회심 전 그의 성품에서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에 의로는 스스로 흠이 없다고 자부하던 인물인 그는 신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달려가는 중에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찬란한 빛과 함께 나타난 그리스도를 향해 물었습니다. “주여 뉘시나이까?”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도에게는 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하나님 사랑의 나타남이었고, 그는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사도에게는 두 가지의 강력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신학적인 변화입니다. 그는 이제껏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사람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자기 눈앞에 다시 나타나셨으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이라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을 리 없고, 또 하나님이 능력으로 그리 하셨다면 그가 죽은 것은 자기의 죄 때문일 리 없다는 신학적인 모순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유는 무엇일까? 사도는 거기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대속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그는 원래부터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시기까지 항상 당신의 아들로서 사랑하셨다는 신학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자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연이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어둠 가운데 있었던 그의 눈을 밝히 열어 구약의 모든 역사와 전개될 신약의 역사를 치달아 보게 했습니다. 바로 이 세상의 수많은 민족들과 나라의 역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하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윤리적 측면입니다.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 놀라운 사랑 앞에 엎드렸지만 한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깨달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그의 일생은 복음전파를 위한 시련과 핍박의 연속이었고, 끝에 가서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순교하게 됩니다. 그 힘겨운 삶을 살면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제가 무엇인지를 일평생 배워갔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매 순간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그는 다메섹 체험에서 자기 안에 수립된 이 사랑의 성향을 끊임없이 강화하면서 살 수 있었고, 은혜가 떨어질 때는 이 사랑이 약화되는 것 또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사랑은 오래참고” 할 때의 오래 참음도 그의 자연적인 성품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깨달은 사랑의 새로운 특성이었던 것입니다.
Ⅱ. “오래 참음”이란
자연적 본성과 어울려 그것과 같은 방향으로 행함을 우리는 참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게으름뱅이가 늦잠 자는 것을 인내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자연적인 본성과 상충되지만 더 높고 고상한 목표를 위해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는 데서 오는 고통을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성경의 오래 참음은 한 두 번의 행함이 아닌 사랑 안에 수립된 성향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오래 참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Ⅲ. 참음이 필요한 이유
A. 다른 사랑이 보편적임
첫째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과는 다른 사랑이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호수가 있고 거기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완벽한 원을 그리며 파문이 퍼져가게 되겠지요. 다시금 똑같은 자리에 돌멩이를 떨어뜨려도 두 번째 파문은 첫 번째 파문과 간섭을 일으키지 않고 질서 있게 번져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드시고 싶으셨던 사랑 질서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잔잔한 호수면 위에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수 천 개가 비처럼 쏟아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크고 작은 파문이 한꺼번에 생길 것이고 그 파문들은 서로 어지럽게 간섭을 일으키며 퍼지지 않겠습니까? 그 어지러움이 바로 세상이 지닌 사랑의 질서입니다.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사랑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하나의 동일한 방향으로 파문을 그리며 간섭 없이 퍼져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다른 자기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자기와 너의 자기는 다르기 때문에 사람이 천 만 명이라면 천 만 개의 자기가 즉, 사람 수만큼의 파문이 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중요한 두 개념을 비교하게 됩니다. 바로 ‘사적인 사랑’과 ‘교통적인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도 다소간 확장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조금만 생각의 폭을 넓히면 내가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혼자서는 진정 행복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이 사랑은 확장될수록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고, 축소되어 추악해 보이기도 하는 다양성을 지닙니다. 그런데 확대가 된다 하더라도 이 사랑은 여전히 그 중심축이 자기이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과는 현저히 구별됩니다. 필연적인 단절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성향을 의미합니다. 나만 챙기면서 다른 이에게 사랑받는 이를 보셨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영웅인 안중근 의사가 일본에서는 과연 어떨까요? 각자의 이익이 충돌할 때 치열한 싸움이 불가피합니다. 이 단절성, 이것이 바로 사적인 사랑이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사랑은 그런 사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사랑이 아니라 내 자신을 꺾고 십자가 사랑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간 사랑입니다. 내가 중심축에 있었을 때는 원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중심축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갔을 때 잠시 전에 내 원수였던 그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적인 사랑을 저는 ‘단절애’라고 부르고 하나님 사랑을 ‘교통적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은 반드시 외롭지만, 끊임없이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외롭지 않은 이유입니다.
B. 예수 사랑은 새 질서임
참음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예수의 사랑 그 자체가 새로운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는 자연 질서와 도덕적 질서 모두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하신 모두가 하나님 사랑의 질서 안에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처음 질서는 죄로 인하여 깨어졌으나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거듭남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중생은 바로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사랑의 운명의 굴레에 얽힌 사람의 내면에 있던 자기사랑의 원리가 뽑아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성향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에 의해서 다시 심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삼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람 안에서 질서를 형성하게 될 때 이 질서는 자기 안에서 만족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삶과 주변 환경 속에 펼쳐지기를 원하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게 자기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직 신자도 하나님 사랑의 경향성이 자기 사랑만큼 필연적이지 않은데다 여전히 죄와 싸워야 합니다. 게다가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사는 삶 가운데는 고통스러운 일들도 끊임없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그 모든 것을 참으며 자신의 삶의 현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 안에도 이런 사랑의 질서가 심어질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피도 섞이지 않은 이들에게 다가가 핍박을 당하면서까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들에게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끊임없이 내어주며 고난도 당하고, 심지어 순교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 사람들 속에 숙명적으로 깊이 심겨진 자기 사랑의 질서가 언젠가는 성령의 능력으로 파괴되고 하나님 사랑의 질서가 심겨져 그들도 우리와 같이 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기뻐할 때가 올 것이라는 소망 때문입니다.
C. 고난의 사랑과 구원의 지혜
마지막으로 참음의 이유는 고난의 사랑과 구원의 지혜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의 교통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영원 전부터 사랑이셨습니다. 이 사랑 안에는 완전한 행복이 있을 뿐 어떠한 고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죄악 된 이 세상에 나타날 때에는 큰 고통이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고통을 받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옷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고통이 경험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의 마음에는 하나님 사랑이 충만했고 모든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펼쳐가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확장되어진 사랑의 질서 때문에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했고, 자기 사랑의 질서를 가지고 죽일 듯이 그분에게 대적하여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좋은 거처나, 훌륭한 의복이나, 많은 재물에 대한 욕심은 그 분에게는 없으셨습니다. 그 분에게 있는 단 하나의 바람은 당신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알고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살고 싶습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홀로 있을 때는 한없이 행복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한없이 그런 행복만을 즐기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괴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 하면 하나님이 그를 슬픔이 많은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강제적인 보내심이 아니라 그 자신이 소원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없을 때에는 그저 안정된 삶만을 원했지만 주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나니까 그는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홀로 받으시옵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그 깊은 고통의 경험을 통해 신자는 마치 시집간 딸이 아이를 낳고 어머니의 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수많은 죄인들에 대하여 예수가 일체의 오래 참으신 것처럼 또한 자기도 참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짧은 칼 하나, 망치하나 어떤 무기나 돈도 없이 오직 사랑 하나를 가지고 이 세상을 떠돌며 당신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시며 사셨지만 합당한 대접을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가 사랑을 베풀며 선을 행할 때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사랑의 자원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의 소산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는 자기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이 안타까워하며 권면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 지가 어떻게 사도 일수 있겠어. 열 두 명은 예수님이 직접 데리고 다니셨지만 저는 무슨 다메섹 가다가 만났다는데 증인이 있어?” 이런 아주 사악함이 고린도 교회에서 누룩처럼 번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사도는 자기가 정말 사도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갖는 교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게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다. 나는 정말 사도이다. 내가 사도인 증거를 대볼까? 표적을 행하고 기사를 행하고 능력을 행한 것도 있는데. 이것들보다도 더 중요한 표, 내가 사도인 증거가 있다. 너희 가운데서 모든 것을 견디며 참았지 않니? 내가 참 사도가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어?” 10여 년 전에 이 구절은 저에게는 정말 지성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을 받았던 사도가 사도직을 변호하면서 자기 안에 사랑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을 통하여 자기가 정말 예수께 속한 사람이며 그 은혜에 붙들린 사람이고 예수 안에 있는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소명 받은 사람임을 아주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세속화되어 그리스도조차도 자기실현과 성공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탐욕스러운 시대에 사도의 오늘 이러한 발언은 정말 새롭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오래된 복음이고 잊혀진 복음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향해 강퍅한 마음으로 심지어 칼까지 겨누는 무지한 인간들에게 보이신 태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도 아무것도 아니신 것처럼 사셨습니다.
그 분의 모든 관심은 오직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그 분은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기를 자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은 우리를 이렇게 고통이 많은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힘입어 번영하게 위함이 아니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자기를 썩게 함으로써 자기 안에 이미 주신 하나님 사랑이 흘러가도록, 그래서 일평생 자기를 부둥켜안고 우상처럼 숭배하면서도 불행했던 인간들에게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게다가 이 뜻을 위해서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매일 진리의 빛과 무한한 사랑의 은혜로 필요한 힘을 공급해주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끊임없는 파도처럼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며 세상이란 호수 가장자리로 번져갑니다.
그렇게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그 영광 안에서 우리도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극히 작은 때를 주셔서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도구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래 참으며 이 사랑이 내가 있는 그 곳에서 실현되기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도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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