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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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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성희 목사 |
참고 : | 2002년 08월 18일 연동교회 http://www.ydpc.org |
출6:1-5, 눅1장68-73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
1903년 7월 16일,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한 젊은 시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인내하라. 아주 낯선 방언으로 씌어져서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을 대하듯 의문 그 자체를 사랑하려고 애써라. 당장 답변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 답변되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 답변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혹 알려주더라도 그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의문을 던지며 사는 것이다. 지금은 의문과 더불어 살라. 그러면 서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해답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리라는 약속을 잊고 자신들과 패장들의 말이 바로에게 먹히지 않고 더 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하여 실의에 빠지고, 의문에 쌓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강한 손을 바로에게 더하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 내가 여호와다, 가나안의 언약을 기억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속되는 모세 설득 작전입니다. 가지 않겠다는 모세를 억지로 보냈는데 단 한 번만에 좌절하고 의심하고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사탄의 유혹이란 첫째,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는 유혹, 둘째, 하나님을 시험하게 하는 유혹, 셋째, 사탄을 믿게 만드는 유혹이라고 합니다. 사탄의 이러한 유혹은 성공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로널드 롤하이저는 '영성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오늘날의 내면에 역행해서 작용하는 많은 것들 가운데 특별히 정신을 타락시키는 것 세 가지를 들면 자아도취(Narcissism), 실용주의 그리고 노골적 불안이 있다. 나르시시즘은 우리가 겪는 가슴 통증의 원인이며, 실용주의는 두통의 원인이고, 불안은 우리의 불면증의 원인이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겪었던 의심, 불안은 우리 시대 구원전야의 문제점들입니다. 우리 시대의 공통적 증세를 보십시오. 정치와 사회와 문화와 모든 면에서 짜증을 느낍니다. "짜증나"란 말도 많이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증세가 아닌가 봅니다.
첫째, 강한 손을 바로에게 보이시는 하나님.
10가지 재앙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가 나타납니다. 바로가 점점 강퍅해지므로 하나님의 손이 시작됩니다. 정중동이란 말이 있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시고 손을 펴십니다.
어떤 분이 성육신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네 살 짜리 아이거 귀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이 되면 자기 방에 도깨비가 나타난다고 무서워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 아이는 부모님의 침실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진정시킵니다. "겁낼 필요 없다. 너 혼자 있는게 아니야. 하나님이 이 방에 함께 계셔" 엄마의 말을 들은 아이는 "저도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저는 살을 가진 누군가가 필요하단 말예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살을 가진 누군가가 필요해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보이게 나타나시는 것을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그래서 살을 가진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손을 대십니다. 하나님의 바로에 대한 손보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손 좀 봐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손을 보시면 큰 일 납니다. 하나님이 손 보시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주의 손은 만드시고, 지으시고, 세우시고, 구하시고, 쫓으시고, 치십니다. 그 외에도 여러 표현들이 있습니다. 룻기 1:13에는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5:6에는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빼앗겨 아스돗에 이르렀을 때에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12:15에는 사무엘이 사울 왕을 세우고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열조를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치시면 무서운 하나님의 형벌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손은 인자할 뿐만 아니라 무서운 손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 강압하고, 하나님은 바로를 더 강압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억압을 당하는 것을 결코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더 강압을 당할 것입니다.
둘째, 모세에게 여호와 이름으로 알게 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나는 여호와로라"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여호와는 홀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누구에 의하지 않고 홀로 있는 자입니다. 홀로 존재하는 자란 말은 홀로 하나님이신 자를 의미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여호와란 이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미 호렙산에서 나타나셔서 이름을 가르쳐주신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그 이름을 확인하십니다.
창세기 17:1에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28:3에는 이삭이 사용한 하나님 이름이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게 35:11에는 야곱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존엄한 이름인 '여호와'를 알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엘 솨다이"란 말입니다. '엘'은 강한 힘을 의미합니다. '솨다이'도강하다는 의미입니다. 극히 강한 자가 전능자입니다. 이 이름만 해도 하나님은 강하신데 여호와란 이름은 강한 정도가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모세는 이미 이 이름을 받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약해지고, 잊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이름을 말해 주십니다. 확실한 존재 의식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당신은 자신을 포기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 당신을 포기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독생자를 포기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메리랜드 대학교의 정신의학자인 아더 워윅="사람은 확실한 것, 안전한 것, 그리고 영적인 것 갈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지금 무엇인가 확실하고 안전한 것을 깊이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구약에만 여호와란 단어가 5911번 나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란 단어가 90번이나 나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훼방하면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지만 그 이름을 걸고 하나님은 모세를 안심시키십니다. 모세에게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셋째, 이스라엘의 신음을 듣고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 스스로가 기억하시고 확인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을 그들의 우거하는 땅으로 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창세기 15장과 17장에서, 이삭에게 26장에서, 야곱에게 28장에서 각각 언약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유브라데 강에서 애굽의 나일 강에 이르는 방대한 땅인데 하나님은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이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다시 독립국가로 선포할 때도 이 땅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은 지금까지도 문제가 됩니다. 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나안에 살았지만 그들의 신분은 나그네에 불과했습니다. 그 후손이 출애굽한 이후에 가나안을 차지 한 후 비로소 그들이 그 땅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이 관심을 보이신 이유는 언약 때문입니다. 출애굽이란 즉흥적, 감상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낡은 약속인 구약의 구원의 언약으로 출애굽을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입니다. 약속 없이 구원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약속인 신약의 구원의 언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토저라는 분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만 이미 약속된 길을 걸을 뿐이다. 돌발적인 사고가 일어나거나 불행이 그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행이란 것도 사실은 겉보기에 불행으로 보일 뿐 실상은 불행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감추어진 섭리의 비밀스런 참 뜻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것을 불행이라 여기는 것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약속은 절대로 변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속 없이 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제임스 패커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모든 상황에 따른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은 잊고 계시다가 돌연 생각이 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확정된 언약을 성취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가 차면 경륜을 따라 역사를 운행하십니다. 에베소서 1:9에는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시고 그 때까지 절대로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요셉은 어떤 사람이 약속을 잊어버려 고통을 당한 사람입니다. 요셉에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만났던 술 맡은 장관이 자신이 사면되게 되면 요셉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말해 살려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서 더 오래 고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때가 지나도록 고생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결론
축록자 불견산(逐鹿者 不見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좇는 사람은 산과 같은 험한 장애를 보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험한 장애만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미국의 시인 윌리엄 스태포드는 "잘못된 신을 따라 집으로 가다보면 우리는 우리가 쳐다봐야 할 별을 놓칠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잘못된 신을 따라가면 희망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데 내가 잊으면 높은 장벽만 보이고,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고, 희망을 상실합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반드시 지킵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복된 삶이 됩시다.
찬송가 455장 4절처럼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찬송하면서 우리의 길이 멀고 험해도 주님만 바라보고 그 언약을 의지하고 할렐루야 찬송하면서 사시는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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