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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따라간사람들]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
영성묵상훈련 오명희 전도사............... 조회 수 2900 추천 수 0 2013.01.16 23:48:28출처 :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78&page=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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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
사람들은 종교개혁하면 루터나 칼빈과 쯔빙글리를 연상한다. 하지만 그들 이전에 먼저 개혁을 주도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위력에 눌리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단으로 몰리거나 순교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있음으로 종교개혁의 기운은 싹터 성공할 수 있었다. 15세기말,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서는 문예부흥운동이 한창이었다. 한편 플로렌스에 예술과 문학이 발달하는 동안 탐욕과 부패도 그만큼 깊어갔다. 교회도 그런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로마교회는 더욱 부패해지면서 세속의 권세를 손에 넣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의 사치와 방종은 실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에 치달았다. 플로렌스의 수도원들에게 청빈서약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러한 때에 전제군주들과 성직자들과 시민들의 부패한 삶을 돌이키고자 선지자적인 삶을 살다가 순교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루터가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기롤라모 사보나롤라이다.
세속을 떠나 수도원으로
사보나롤라는 종교개혁 이전의 진정한 개혁자였다. 그는 마틴 루터가 출생하기 약 30년 전인 1452년 9월21일 이탈리아의 페라라에서 니콜로 사보나롤라와 엘레나 보나코르시의 5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친할아버지 미켈레에게 교육을 받았다. 당시 할아버지는 유명한 의사로서 도덕과 신앙원칙들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지 그는 어려서부터 세상의 끊임없는 고통과 악을 보면서 비통함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철이 들면서 이러한 비감은 더해갔다. 그의 부모들은 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그 당시 사회의 타락과 불의를 보고 뜻한 바 있어 신학을 택하였다.
그는 1475년 23세 때 아버지의 집을 떠나 볼로냐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도원에 들어간 이유를 편지로 아버지에게 설명하였다. “나는 이탈리아의 사악함에 눈 먼 백성들을 더 이상 보고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덕이 도처에서 경멸되고 악이 추앙되며 경외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그의 가장 중요한 소원은 어찌하든지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떠나 참회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 속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었다. 수도원에 들어온 이후 그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경건한 삶에 남다른 열심을 보였다. 그의 수도생활과 금식은 너무나 철저하고 혹심한 것이어서 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줄 정도였다. 그래서 수도원의 상급자들은 강제로 말릴 정도였다.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사보나롤라는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하였고 성경에 정통하였다. 성경에 대한 그의 사랑과 본문에 대한 그의 박식함은 실로 뛰어났다. 성경 66권을 거의 외웠으며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전을 자유롭게 읽었다. 후일 그는 이 기간이 일생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때였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그는 1481년 플로렌스에 있는 성 마가 수도원으로 옮겨갔다. 10년 후 그는 성 마가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목숨을 건 눈물의 메시지
뛰어난 학문과 경건과 인격은 성 마가 수도원에서 말씀을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그는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7년간의 신학공부를 마친 후 설교자로 파송받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설교하였다. 그는 진정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예배, 그리고 이 땅을 향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내에 자행되는 불법과 부도덕,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타락상에 충격을 받은 그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기도 중에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밖으로 나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곧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 그가 타락한 플로렌스에 임할 심판에 관해 설교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고 작열하는 영혼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그의 불같은 선포는 천둥소리와 같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교회는 조국의 죄악을 인하여 애통하며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찼으며, 사람들의 마음은 거룩한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였다. 목숨을 건 용기와 도전 속에서 외치던 그의 선포는 정치지도자, 성직자, 시민들의 부패한 삶을 하나님 앞에 눈물로 고발하고 있었다. 수많은 청중이 몰려들고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듣기 위해 한밤중에 와서 성당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사회악에 대한 비판,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엄격한 강조와, 향락에 들떠 부패한 삶을 살아가는 지도자들에 대한 질타는 당시 유력한 지도자들의 비위를 거스르게 했다. 특히 플로렌스의 통치자인 메디치가(家)의 로렌조는 더 심했다. 그래서 그는 사보나롤라를 공격하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점점 더해 일평생 사보나롤라를 박해했던 로렌조도 죽음을 앞두고 사보나롤라를 청해 그의 축복을 받고자 할 정도였다.
거룩한 참회의 도시, 플로렌스
로렌조가 죽자 메디치 가(家)의 통치도 오래가지 못하고, 1494년 찰스 8세의 침략으로 무너졌다. 이보다 2년 전에 사보나롤라는 프랑스의 찰스 8세가 침략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정말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해 오자 그는 단독으로 찰스 8세와 만나 협상을 통해 프랑스군을 순순히 퇴각시켰다. 이렇게 그의 예언이 적중하자 이 도시에서 그의 신망은 극에 달하였다. 로렌조의 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하였으나 백성들이 만장일치로 사보나롤라를 프로렌스의 통치자로 뽑았다.
뒷날 칼빈이 제네바에서 그랬듯이 사보나롤라는 플로렌스에서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가 되어 민주주의적 신정체제를 수립했다. 사보나롤라는 3년 동안 플로렌스를 다스렸으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플로렌스시를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그분의 복음이 법률이 되는 모범적인 국가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는 플로렌스를 거룩한 참회의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허영의 화영식’을 거행하였다. 각종 음란서적, 그림, 사치품 등이 불태워졌다. 교회와 수도원은 그 옛날의 청빈함을 회복하였고 성직자들은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건달들은 사라지고 감옥은 텅텅 비었으며 부랑아들의 천한 유행가는 찬송가로 바뀌었다. 그가 얻은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찬란하지만 부패한 르네상스의 수도 플로렌스가 기적처럼 변하여 당대 사람들에게 마치 낙원을 맛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정치적 음모와 거룩한 번제
언제나 그렇듯이 사보로롤라의 신정정치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교황의 힘을 빌고자 하였다. 그들은 교황에게 사보나롤라를 중상모략하는 허위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계속된 그의 비판적인 설교는 드디어 로마 교황청의 비위를 건드렸다. 교황 알렉산더 6세는 특히 사생활이 문란하여 여러 명의 사생아를 낳았는데 그는 교황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의 입을 막기 위해 교황은 그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추기경의 직위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거부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은 추기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성도들에게 허락하셨던 죽음, 곧 주님을 위하여 나의 몸을 온전히 태워 번제로 드리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성자들에게 주시는 순교의 붉은 피로 물든 모자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자 교황은 사보나롤라의 영향을 줄이기 위하여 많은 고발자들을 동원하였다. 플로렌스의 수도사들로 하여금 사보나롤라를 갖가지 죄로 고소하게 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의 위원들에 의해 이단자이며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로 고발되었다. 마침내 1497년 5월 12일 교황은 그를 이단자로 파문하여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순교로 불태워진 영혼의 갈망
그들은 아주 거친 폭도들을 동원해서 그가 머물던 성 마가 수도원 정문을 부수고 들어가 그를 잡았다. 그들은 그에게서 이단이라는 실토를 얻어내기 위해 심하게 고문했다. 양손을 위로 묶고 도르래에 연결된 밧줄이 당겨지면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럴 때마다 그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근육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철회하기 위해 숯불로 지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러한 고문이 한달 여 동안 반복되었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견지하는 가운데 종교재판의 고문으로 견딜 수 없을 때면 “주여, 이제 충분하오니 저의 영혼을 거두소서”라고 말했다. 그는 그 고통스러운 옥중에서도 시편을 묵상하면서 30편, 31편, 50편, 51편에 대한 주해를 썼다. 이것들은 모두 죽기전까지 손이 묶인채 들어줄 사람 없이 설교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몸은 묶였으나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고 싶은 영혼의 갈망은 아무도 막지 못하였다.
그들은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사보나롤라를 교수형에 처한 후 다시 불태워 그 재를 시내를 관통하는 아르논 강에 던져 버리라고 하였다. 1498년 5월에 사보나롤라는 두명의 동료와 함께 사형대 앞으로 끌려갔다.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의 적대자들이 “선지자여, 너의 권세를 보이고 기적을 행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침묵을 지켰다. 우리 주님께서도 동일한 조롱과 배척을 당하지 않으셨던가!
사보나롤라는 진리편에 선 사람들 특유의 담대함으로 사형을 맞이하였다. 그는 이전에 플로렌스에서 처음 설교하면서 자신은 거기에서 8년 동안만 설교할 것과 자신이 이 설교사역으로 말미암아 순교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플로렌스의 광장에서 숨을 거두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나를 위해 그토록 많은 고통을 당하신 주님, 그 주님을 위해 내가 기꺼이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였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 이전의 가장 위대한 개혁자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사보나롤라는 이탈리아가 낳은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현대 기독교는 그를 모든 나라와 역사에서 열정적인 선각자 대열에 세웠다. 그는 진정 눈물의 설교자였으며 애국자였다. 그의 진리에 대한 신념, 조국에 대한 사랑, 의로운 일에 대한 헌신 등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칠흑과 같은 영적 암흑기에 교회를 향하여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고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그의 거룩함에 대한 추구와 경건을 잃지 않았다. 설교자는 죽어도 그가 외친 진리는 살아서 그렇게 다음 세대를 깨웠던 것이다.
오명희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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