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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82&page=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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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아버지 마포삼열 선교사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t. 미국)
백여년전,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미개한 나라에 벽안(碧眼)의 선교사들이 찾아와 이 땅에다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내던졌다. 이들은 우리 민족이 겪는 고통을 위로하며 또 고난에 함께 동참하며 이 땅에서 살다갔다. 이들은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복음 하나로 이 땅에 와서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오늘날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들어서고 어떤 비난의 소리가 쏟아져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귀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초기의 개척 선교사로서 미지의 한국에 오직 말씀을 전하여 그들의 영혼을 살려야한다는 열정과 사명감으로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건너와 45년동안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초기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성한 한국교회의 아버지 마포삼열 선교사에 대해 살펴본다.
사명의 땅 한국 (Korea)
한국교회의 아버지로 불리워지는 사무엘 오스틴 마펫(마포삼열)은 1864년 미국 인대애나주 매디슨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을 경영하였으며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어머니는 좀 자유분방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경건한 신앙을 배웠으며 11세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다. 마포삼열은 하노버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대학원에서는 화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러나 박사과정을 마친 뒤 그의 생각은 달라졌다. 그는 특별한 소명감을 자각하고 자신의 일생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데 투자하기보다는 하나님께 헌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자 많은 해외 선교사를 길러 낸 매코믹 대학에 1885년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베어드 (W, M. Baird)와 함께 공부하였다.
신학교를 마친 뒤 마포삼열은 주님을 알지 못해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기도 중에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였다. 마펫 선교사가 한국에 올 당시는 선교를 하러 간다는 사실은 곧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때의 한국은 정말 오지였고 또 미개했다. 그러나 한국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땅으로 영접하고 한국백성과 한국을 위해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단하였다.
당시 한국의 시대상황을 설명한 백과사전의 기사를 보자. “한국은 중국에 소속된 하나의 작은 왕국이며 깊은 산 숲 속에는 호랑이 곰 등이 득실대고 사람들은 미개한 야만인들이며 도전적인데다 해적과 같고 일부다처제가 일반화 되어있다. 또한 부패한 불교가 왕성한 종교적 나라이다. 외국인의 출입은 허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최초의 선교사였던 의사 알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거리거리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파리, 모기, 날파리들이 떼를 지어 득실거리고 있었으며, 더러운 개천에는 온갖 병균이 들끓고 있다. 또한 집집마다 파리, 빈대, 벼룩이 없는 집이 없다. 천연두, 매독, 회충 등은 흔해빠진 병이었고 종기나 무좀같은 피부병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걸려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랑과 희생으로 한국땅을 일군, 선교의 개척자
1889년 4월 15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혈혈단신으로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후에 결혼하게 된 부인 알리스 피셔는 한국에서 순교했다. 그는 한마디로 소명감이 투철하고 철저한 복음주의적 신앙을 지닌 성경중심의 사람이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복음전도를 개시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결심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외에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며 만일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결심했다.”
처음 6개월간은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그 해 8월에 평양으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당시 평양은 인구 약 10만명의 도시였으며 복음의 불모지였다. 그는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처음에는 초기 교인 최치량의 주막에서 예배를 드리다 평양 중심지인 널다리골 기와집 한 채를 사들였다. 이 집이 평양 최초로 설립한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다. 후에 장대현교회로 개칭, 발전하였다.
1893년 평양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처음의 어려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밤만 되면 불량배들로부터 돌세례로 곤혹을 치르곤 했다, 그 중 하나가 평양 깡패로 알려진 이기풍이었다. 그는 잔치집마다 찾아다니며 술과 떡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던 깡패였는데 마포삼열 선교사의 집에도 끈질기게 찾아와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등 그의 행패는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때는 그가 던진 돌에 맞아 입원하기도 했다. 하루는 선교사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던 이기풍이 다치게 되었는데 선교사가 찾아가서 치료해 주며 사랑을 베풀었다. 이에 감복하여 회개하고 초대 목사가 되었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마포삼열은 선교의 개척자답게 모든 어려움을 관용과 아량, 그리고 인내로 이겨나갔다. 이에 따라 점차 많은 이들로부터 ‘마포목사’로 불리며 존경과 칭송을 받게 되고 전도활동의 성과도 점차로 나아지게 되었다. 이처럼 마포삼열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하여 평양개척역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일어난 복음의 불씨는 점점 번져서 7명의 세례교인으로 시작하여 1949년에는 신도수가 70,000명에 이르고 세례교인 수만 해도 25,79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은퇴할 때는 일천여 교회가 서게 되었으니 이는 어떤 선교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교역자 양성을 선교목표로
마포삼열은 1901년 평양에서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뜻을 두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창설하였고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신학교 교장(1904-1924)에 취임하였다. 처음에는 2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여 1907년 한석진,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양전백 등이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숭실학교를 설립하여 1918-1928년에는 교장으로 시무하였다. 일제의 압력에 신사참배를 하면서라도 학교를 유지해야한다는 학생과 교직원들과 유지들 앞에서 “저는 신사참배하며 학교경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라는 한마디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마포삼열은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독립의 성취를 위해 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수완을 발휘하기도하였다.
그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위기였던 일제 말기에 있어서 한결같은 자세로 신앙의 지조와 신학의 정통성을 지키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마포삼열은 병을 얻고 요양을 위해 귀국하였다가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별세 하였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한국의 북서지역 개척자로서, 특히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또한 한국장로교회의 초석을 놓았고 우리나라의 기독교교육과 문화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신학교육 즉 목회자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또한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을 자기민족처럼 사랑했다. 한국인의 아픔을 자기아픔으로 여겼다. 그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말씀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과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사도바울처럼 고백하며, 이 땅에 복음을 전하며 한 평생을 산 마펫 선교사의 그러한 정신은 진실로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마포삼열 선교사야말로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불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오명희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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