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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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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2.1.23 설교 |
이제는 [창조신앙]이어야 합니다.
창1:28
우리는 지난주에 요나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시대적인 요구가 어떤 것인지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창조주 신앙’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려면 ‘기독교만의 하나님’을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창조 신앙’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우리를 이기주의적으로 둘러싸고 있던 ‘기독교만의 하나님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 세상과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기독교는 이 말씀을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400년 전에 세계 인구는 5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2030년이 되면 세계 인구는 100억이 됩니다. 그러니 이런 마당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은 결코 축복이 되지 못합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불과 200년 동안에 자연은 엄청나게 파괴되었습니다. 이렇게 지구가 망가진 까닭은 서구 기독교가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한데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도 그릇 해석하고 적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창1:28절을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만물이 창조된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와 불편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가 짐승을 잔인하게 대하는 것을 금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그것은 짐승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잔인하게 될까봐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이다.”헨리 모어 는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정원에 잡초를 만드신 까닭은 사람들에게 근면성을 길러 주시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월리암 커비는 “몸에 기어 다니는 이를 만든 것은 사람이 게을러 질까봐서다.”라고 합니다. 심지어 뉴만 이라는 사람은 “우리는 동물을 하고 싶은 대로 다뤄도 된다.”라고 카톨릭 대백과 사전에 쓰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된 대는 창세기 1:28의 해석 때문입니다.
‘정복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상대방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선악을 알지도 못하고, 무력으로 누구를 억누르는 것도 알지 못하던 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 리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은 밑바탕에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위협하는 것은 그때로서는 자연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함께 살아야 하는 이웃이라기보다는 물리쳐야 하는 대적 자 였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자연은 악마적이지 않습니다.
‘다스리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복하다’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아직 지배나 통치가 어떤 개념인지도 모를 때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은 지배가 아니라 돌봄의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연은 사람의 손으로 돌보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하나님이 더 잘 돌보시지 않습니까? 비무장지대를 보아도 알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이런 해석 자체는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러면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것은 여기서 부터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큰물을 처리하는 작업이 창조 활동의 주요 내용으로 나옵니다. 둘째 날 하나님은 물 한가운데 궁창이 생기게 하여서 물을 위 아래로 가르셨습니다. 셋째 날에는 아래 있는 물을 모아 한 곳으로 흘러 바다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창세기의 말씀들이 선포되는 곳은 큰물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우선 큰물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 삶의 중요 과제였을 게 아닙니까? 창세기 2장에는 물이 아니라 가뭄이었죠. 거기서는 가뭄을 극복해야 하는 게 인간들의 과제였을 것입니다. 결국 두개의 창조이야기는 사람들이 물과 가뭄이라는 두 자연현상을 극복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할 때,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며 선언하신 말씀들은 자연을 지배하라는 뜻이 아니라, 엄청난 자연을 재앙이 되지 않게 극복하고 멋진 삶, 보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라는 뜻인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연을 신성시하던 미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의 고유한 지위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린이들은 가로등을 보면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쁘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예전의 어른들이 가로등을 보았다면 필경 엎드려 절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창1:28절은 해와 달을 보고 절하는 미몽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비추고 밤하늘을 밝혀주는 하나님의 피조물인줄 알라는 것입니다. ‘미신으로부터 해방’이라는 큰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 신앙’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27절의 말씀도 다시 보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구절입니다. 이걸 두고 사람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을 닮았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신적인 본질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저 피조물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3:19) 사람을 동식물과 구별되는 존재로 보거나,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은 그리스 철학과 헬레니즘 사고입니다.
어떤 이들은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뜻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형상’이라는 말은 ‘초상’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왕들이 행차를 할 때 왕이 몸소 행차하지 못할 경우 초상을 세웠습니다. 통치권의 상징이었죠. 하나님이 인간을 그런 존재로 세상에 보냈다는 것이죠.
창세기를 다시 보십시다. 하나님은 초상을 앞세워 백성들을 통치하는 분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돌보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도 그러라고 하셨지요(2:15). 돌보는 일은 동산을 경작하고 가꾸는 농사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인이 그러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셨던 그일, [창조하고 돌보는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식물이 광합성 작용을 부지런히 해서 나뭇가지와 잎새를 만들고, 벌꿀들이 꿀을 부지런히 모은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일을 창조라거나 노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창조와 노동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앞서서 창조하시고 일하면서 지으신 세계를 사람에게 맡겨서 계속 창조하고 돌보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활동과 구원의 역사에서 사람들이 함께 일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던 창조와 노동의 삶을 우리가 살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대목입니다(창2:26-27).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게 A4 용지에 그려진 사진이나 그림인가요? 그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들이 무슨 커리케쳐 같은 건가요? 아닙니다. ‘하나니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복사본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걸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둘 셋이냐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형상’의 의미가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어떤 ‘상’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내는 ‘관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중요한 인권선언의 의미가 있습니다. 노예 제도를 기본으로 하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의식의 지진과 같은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님이 살인을 금하셨지요. 그 근거가 뭔지 아세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9:6). 그것은 당시 만연되어 있던 인종과 신분, 성에 따른 차별에 대한 해방이었던 것입니다.
이 모두 자기인식과 관습의 울타리를 벗어나 큰 세계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는 말씀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거기에도 계신다는 것입니다. 너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이니, 너도 그렇게 처신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은, ‘내가 하던 일을 네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교회에 갇힌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과 가뭄 같은 삶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피조물들이 보기에 좋도록 일하는 하나님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이 시대의 믿음이요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1:28
우리는 지난주에 요나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시대적인 요구가 어떤 것인지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창조주 신앙’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려면 ‘기독교만의 하나님’을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창조 신앙’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우리를 이기주의적으로 둘러싸고 있던 ‘기독교만의 하나님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 세상과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기독교는 이 말씀을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400년 전에 세계 인구는 5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2030년이 되면 세계 인구는 100억이 됩니다. 그러니 이런 마당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은 결코 축복이 되지 못합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불과 200년 동안에 자연은 엄청나게 파괴되었습니다. 이렇게 지구가 망가진 까닭은 서구 기독교가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한데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도 그릇 해석하고 적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창1:28절을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만물이 창조된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와 불편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가 짐승을 잔인하게 대하는 것을 금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그것은 짐승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잔인하게 될까봐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이다.”헨리 모어 는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정원에 잡초를 만드신 까닭은 사람들에게 근면성을 길러 주시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월리암 커비는 “몸에 기어 다니는 이를 만든 것은 사람이 게을러 질까봐서다.”라고 합니다. 심지어 뉴만 이라는 사람은 “우리는 동물을 하고 싶은 대로 다뤄도 된다.”라고 카톨릭 대백과 사전에 쓰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된 대는 창세기 1:28의 해석 때문입니다.
‘정복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상대방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선악을 알지도 못하고, 무력으로 누구를 억누르는 것도 알지 못하던 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 리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은 밑바탕에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위협하는 것은 그때로서는 자연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함께 살아야 하는 이웃이라기보다는 물리쳐야 하는 대적 자 였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자연은 악마적이지 않습니다.
‘다스리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복하다’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아직 지배나 통치가 어떤 개념인지도 모를 때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은 지배가 아니라 돌봄의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연은 사람의 손으로 돌보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하나님이 더 잘 돌보시지 않습니까? 비무장지대를 보아도 알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이런 해석 자체는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러면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것은 여기서 부터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큰물을 처리하는 작업이 창조 활동의 주요 내용으로 나옵니다. 둘째 날 하나님은 물 한가운데 궁창이 생기게 하여서 물을 위 아래로 가르셨습니다. 셋째 날에는 아래 있는 물을 모아 한 곳으로 흘러 바다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창세기의 말씀들이 선포되는 곳은 큰물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우선 큰물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 삶의 중요 과제였을 게 아닙니까? 창세기 2장에는 물이 아니라 가뭄이었죠. 거기서는 가뭄을 극복해야 하는 게 인간들의 과제였을 것입니다. 결국 두개의 창조이야기는 사람들이 물과 가뭄이라는 두 자연현상을 극복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할 때,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며 선언하신 말씀들은 자연을 지배하라는 뜻이 아니라, 엄청난 자연을 재앙이 되지 않게 극복하고 멋진 삶, 보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라는 뜻인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연을 신성시하던 미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의 고유한 지위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린이들은 가로등을 보면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쁘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예전의 어른들이 가로등을 보았다면 필경 엎드려 절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창1:28절은 해와 달을 보고 절하는 미몽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비추고 밤하늘을 밝혀주는 하나님의 피조물인줄 알라는 것입니다. ‘미신으로부터 해방’이라는 큰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 신앙’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27절의 말씀도 다시 보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구절입니다. 이걸 두고 사람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을 닮았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신적인 본질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저 피조물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3:19) 사람을 동식물과 구별되는 존재로 보거나,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은 그리스 철학과 헬레니즘 사고입니다.
어떤 이들은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뜻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형상’이라는 말은 ‘초상’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왕들이 행차를 할 때 왕이 몸소 행차하지 못할 경우 초상을 세웠습니다. 통치권의 상징이었죠. 하나님이 인간을 그런 존재로 세상에 보냈다는 것이죠.
창세기를 다시 보십시다. 하나님은 초상을 앞세워 백성들을 통치하는 분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돌보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도 그러라고 하셨지요(2:15). 돌보는 일은 동산을 경작하고 가꾸는 농사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인이 그러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셨던 그일, [창조하고 돌보는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식물이 광합성 작용을 부지런히 해서 나뭇가지와 잎새를 만들고, 벌꿀들이 꿀을 부지런히 모은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일을 창조라거나 노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창조와 노동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앞서서 창조하시고 일하면서 지으신 세계를 사람에게 맡겨서 계속 창조하고 돌보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활동과 구원의 역사에서 사람들이 함께 일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던 창조와 노동의 삶을 우리가 살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대목입니다(창2:26-27).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게 A4 용지에 그려진 사진이나 그림인가요? 그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들이 무슨 커리케쳐 같은 건가요? 아닙니다. ‘하나니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복사본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걸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둘 셋이냐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형상’의 의미가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어떤 ‘상’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내는 ‘관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중요한 인권선언의 의미가 있습니다. 노예 제도를 기본으로 하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의식의 지진과 같은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님이 살인을 금하셨지요. 그 근거가 뭔지 아세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9:6). 그것은 당시 만연되어 있던 인종과 신분, 성에 따른 차별에 대한 해방이었던 것입니다.
이 모두 자기인식과 관습의 울타리를 벗어나 큰 세계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는 말씀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거기에도 계신다는 것입니다. 너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이니, 너도 그렇게 처신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은, ‘내가 하던 일을 네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교회에 갇힌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과 가뭄 같은 삶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피조물들이 보기에 좋도록 일하는 하나님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이 시대의 믿음이요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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