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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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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2.2.2 설교 |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일까?
창3:3
요즘 주일 설교와 수요 성서강좌를 구약성서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도 중복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일에 한 것으로 수요일에 하지는 않습니다. 듣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설교용과 강좌용이 다릅니다. 주일 설교가 포괄적이라면 수요 강좌는 좀 더 역사적인 토대와 신학적인 형성과정을 세밀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혹시, 주일에만 교회에 오시고 수요일은 안 오시거나 못 오시는 분들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수요강좌’의 원고나 동영상을 꼭 보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창조 이야기가 끝난 창세기는 이제 에덴동산과 선악과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2-3장에 나오는 거죠.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누구보다도 이 부분, 에덴동산과 선악과 이야기는 가장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 다른 해석을 들을 너그러움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에덴동산과 선악과에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간략하게 말해서 ‘인간의 타락과 원죄’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갖게 한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성 어거스틴과 마틴 루터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안의 죄를 극복하기위해 씨름한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에 의해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타락했다는 자연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지 헨드리라는 교수는 유럽에서 자연과학이 비교적 늦게 발달한 까닭은 그리스도교가 자연을 어둡고 사악한 영역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메튜 폭스라는 신학자는, 99%의 그리스도인들이 원죄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본래 하나님의 창조가 선하며 축복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고 말합니다.
이런 어거스틴식, 루터식 사고는 피조물 하나하나에 대해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던 창세기 기록자의 관점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타락을 강조하는 신앙관은 자연을 함부로 대하고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사악한 사회구조를 만들게 됩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흑인을 사람취급 하지 않았던 미국의 남북시대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존의 에덴동산과 선악과에 대한 배움을 넘어서 에덴동산과 실낙원 이야기가 갖고 있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해석을 지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회복되어야 망가진 세계와 교회와 신앙이 회복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는 온갖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인간이 만들어집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들지만 성적인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과 실낙원 이야기로 넘어가면 다른 피조물들은 배후로 밀려나고 사람이 주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과 실낙원 이야기는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남자와 여자, 사람과 자연의 관계는 어떤 건지, 그런 것들이 어떻게 엉클어졌는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왜 남자들만 일을 히야 하는지, 여자는 왜 아이를 낳을 때 고통스러워하는지 하는 질문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질문은 태초에만 있고 지금은 없는 질문입니까? 아니면 생명을 가지고 살았던 모든 인간들이 항상 던지는 질문입니까? 그러니 이 질문이 마치 옛날에는 있고 지금은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어떤 물건을 보면 갖고 싶고, 좋은 음식을 보면 자동으로 침이 넘어가고, 남자나 여자가 성욕을 느끼고, 땀 흘려 노동하고, 고통스럽게 애 낳고, 고생하고 병들고 그러다가 죽는 게 과연 심판의 결과 즉, 에덴동산과 실낙원에서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일까요? 결국은 사람이, 여자가, 뱀이 혐오와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이게 정말 에덴동산과 실낙원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까요? 이게 하나님의 본심일까요?
왜 흐믓한 2장25절을 어둠의 3장으로 연결하는 걸까요? 이게 성경의 의도일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온 이야기들은 상상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인간은 가장 완벽한 존재이지만 오늘날의 인간은 가장 타락하고 추한 존재라고 보는 상상입니다.
어느 시대나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고 합니다. 사람에겐 늘 과거를 아름답게 여기고 현실을 흐뭇하지 않게 여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동양 사람들이 요순시대를 그리워하듯 서양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실낙원을 들먹이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에덴동산은 하나의 유토피아로서 우리에게 제시된 게 아닙니다.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오늘날 사람들과 전혀 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지도 않습니다. 물론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자신들을 비춰주는 거울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에덴동산의 그 때 그 사람들로 돌아간다고 해 봅시다.
우선,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합시다. 과연 이렇게 하면 이상적일까요? 남녀 간의 성에 대해서도 천진난만하게, 소꿉장난 하는 아이들이 자신의 성기를 장난감 다루듯 그렇게 가지고 논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상적인 세계가 되는 걸까요? 오늘날 누구나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을 꿈꿉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런 상태를 항상 꿈꿉니다. 그래서 생긴 게 무릉도원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일하지 않고도 먹을 것이 풍성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삶이 기쁨으로 넘칠 거라고 믿으십니까? 아니 상상이 되십니까? 성에 대한 기쁨, 해산의 고통과 양육의 즐거움이 없어도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것들은 모두 에덴동산과 실낙원에서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생겼다고 상상하는 것들입니다. 성욕, 소유욕, 지식욕, 명예욕, 승부욕 등등이 그런 것들인데, 만약 원죄와 타락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절의 기쁨은 모두 사양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어찌 말로는 그러면서 뒤로는 더 많이 그런 것들을 탐하는 것일까요? 이 이중성은 뭘까요? 이렇게 에덴동산과 실낙원 이야기를 상상해 왔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이중성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에덴동산을 일도 욕망도 없는 곳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입니다. 흔히 타락한 이후에 욕망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에덴동산의 사람들은 선악과를 보자마자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이전입니다. 한마디로 에덴동산의 인간은 이미 금지된 것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존재, 지금의 우리와 같은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성적인 욕망이 없었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게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는 말은 에둘러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자를 보자마자 남자가 탄성을 질러댔다는 게 아닙니까?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인데, “둘이 한 몸이 되어라”였습니다. 알거 다 알고 있다는 전제 속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타락한 이후에 비로소 노동을 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에덴동산에도 이미 일은 있었습니다. ‘맡다’와 ‘돌보다’는 말은 실제로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또 타락의 결과로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네가 죽으리라’는 경고 속에 이미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에덴동산은 이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어떤 이상향이 아닙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배운 바를 버리라는 이야기냐? 아닙니다. 이 세상의 현실적인 요소들이 원초적인 형태 내지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여기면 됩니다. 그래서 키엘케골은 에덴동산의 인간을 [꿈꾸는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껏 배운 대로 ‘에덴동산의 타락과 죄악으로 인한 추방’은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난 존재’ 또는 ‘꿈을 실현해가는 존재’로의 비약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알에서 깨어 나와 이상향을 건설해야 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지요. 그러니 지난 에덴동산의 삶, 경험은 오늘 우리들의 현실을 이뤄가는 꿈이 되는 것이고,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현재는 나쁘고 과거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을 버려야 하고 과거를 붙들어야 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는 금령은 이간에게 그것을 따 먹을 수도 있다는 자유의식을 갖게 해주는 출발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 역사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로 지어졌다는 말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자유를 의식하는 순간 인간은 불안을 느끼죠. 바로 이불안이 인간을 위대하게도 비참하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불안을 벗어나 구원에 나아갈 수도 있고, 불안을 이기지 못해 죄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 이쯤에서 우리는 창세기의 몇 기록들을 통해 드러낸 하나님의 본심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으로 인간들을 걸려 넘어지게 해서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벽하게 단번에 지으시고, 현재의 삶을 통해 꿈을 이루어가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바랄 뿐 아니라 현재를 감동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심이고, 우리가 누리는 자유 성취의 기쁨인 것입니다.
창3:3
요즘 주일 설교와 수요 성서강좌를 구약성서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도 중복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일에 한 것으로 수요일에 하지는 않습니다. 듣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설교용과 강좌용이 다릅니다. 주일 설교가 포괄적이라면 수요 강좌는 좀 더 역사적인 토대와 신학적인 형성과정을 세밀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혹시, 주일에만 교회에 오시고 수요일은 안 오시거나 못 오시는 분들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수요강좌’의 원고나 동영상을 꼭 보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창조 이야기가 끝난 창세기는 이제 에덴동산과 선악과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2-3장에 나오는 거죠.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누구보다도 이 부분, 에덴동산과 선악과 이야기는 가장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 다른 해석을 들을 너그러움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에덴동산과 선악과에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간략하게 말해서 ‘인간의 타락과 원죄’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갖게 한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성 어거스틴과 마틴 루터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안의 죄를 극복하기위해 씨름한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에 의해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타락했다는 자연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지 헨드리라는 교수는 유럽에서 자연과학이 비교적 늦게 발달한 까닭은 그리스도교가 자연을 어둡고 사악한 영역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메튜 폭스라는 신학자는, 99%의 그리스도인들이 원죄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본래 하나님의 창조가 선하며 축복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고 말합니다.
이런 어거스틴식, 루터식 사고는 피조물 하나하나에 대해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던 창세기 기록자의 관점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타락을 강조하는 신앙관은 자연을 함부로 대하고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사악한 사회구조를 만들게 됩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흑인을 사람취급 하지 않았던 미국의 남북시대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존의 에덴동산과 선악과에 대한 배움을 넘어서 에덴동산과 실낙원 이야기가 갖고 있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해석을 지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회복되어야 망가진 세계와 교회와 신앙이 회복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는 온갖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인간이 만들어집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들지만 성적인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과 실낙원 이야기로 넘어가면 다른 피조물들은 배후로 밀려나고 사람이 주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과 실낙원 이야기는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남자와 여자, 사람과 자연의 관계는 어떤 건지, 그런 것들이 어떻게 엉클어졌는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왜 남자들만 일을 히야 하는지, 여자는 왜 아이를 낳을 때 고통스러워하는지 하는 질문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질문은 태초에만 있고 지금은 없는 질문입니까? 아니면 생명을 가지고 살았던 모든 인간들이 항상 던지는 질문입니까? 그러니 이 질문이 마치 옛날에는 있고 지금은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어떤 물건을 보면 갖고 싶고, 좋은 음식을 보면 자동으로 침이 넘어가고, 남자나 여자가 성욕을 느끼고, 땀 흘려 노동하고, 고통스럽게 애 낳고, 고생하고 병들고 그러다가 죽는 게 과연 심판의 결과 즉, 에덴동산과 실낙원에서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일까요? 결국은 사람이, 여자가, 뱀이 혐오와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이게 정말 에덴동산과 실낙원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까요? 이게 하나님의 본심일까요?
왜 흐믓한 2장25절을 어둠의 3장으로 연결하는 걸까요? 이게 성경의 의도일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온 이야기들은 상상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인간은 가장 완벽한 존재이지만 오늘날의 인간은 가장 타락하고 추한 존재라고 보는 상상입니다.
어느 시대나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고 합니다. 사람에겐 늘 과거를 아름답게 여기고 현실을 흐뭇하지 않게 여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동양 사람들이 요순시대를 그리워하듯 서양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실낙원을 들먹이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에덴동산은 하나의 유토피아로서 우리에게 제시된 게 아닙니다.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오늘날 사람들과 전혀 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지도 않습니다. 물론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자신들을 비춰주는 거울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에덴동산의 그 때 그 사람들로 돌아간다고 해 봅시다.
우선,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합시다. 과연 이렇게 하면 이상적일까요? 남녀 간의 성에 대해서도 천진난만하게, 소꿉장난 하는 아이들이 자신의 성기를 장난감 다루듯 그렇게 가지고 논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상적인 세계가 되는 걸까요? 오늘날 누구나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을 꿈꿉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런 상태를 항상 꿈꿉니다. 그래서 생긴 게 무릉도원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일하지 않고도 먹을 것이 풍성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삶이 기쁨으로 넘칠 거라고 믿으십니까? 아니 상상이 되십니까? 성에 대한 기쁨, 해산의 고통과 양육의 즐거움이 없어도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것들은 모두 에덴동산과 실낙원에서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생겼다고 상상하는 것들입니다. 성욕, 소유욕, 지식욕, 명예욕, 승부욕 등등이 그런 것들인데, 만약 원죄와 타락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절의 기쁨은 모두 사양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어찌 말로는 그러면서 뒤로는 더 많이 그런 것들을 탐하는 것일까요? 이 이중성은 뭘까요? 이렇게 에덴동산과 실낙원 이야기를 상상해 왔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이중성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에덴동산을 일도 욕망도 없는 곳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입니다. 흔히 타락한 이후에 욕망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에덴동산의 사람들은 선악과를 보자마자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이전입니다. 한마디로 에덴동산의 인간은 이미 금지된 것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존재, 지금의 우리와 같은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성적인 욕망이 없었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게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는 말은 에둘러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자를 보자마자 남자가 탄성을 질러댔다는 게 아닙니까?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인데, “둘이 한 몸이 되어라”였습니다. 알거 다 알고 있다는 전제 속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타락한 이후에 비로소 노동을 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에덴동산에도 이미 일은 있었습니다. ‘맡다’와 ‘돌보다’는 말은 실제로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또 타락의 결과로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네가 죽으리라’는 경고 속에 이미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에덴동산은 이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어떤 이상향이 아닙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배운 바를 버리라는 이야기냐? 아닙니다. 이 세상의 현실적인 요소들이 원초적인 형태 내지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여기면 됩니다. 그래서 키엘케골은 에덴동산의 인간을 [꿈꾸는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껏 배운 대로 ‘에덴동산의 타락과 죄악으로 인한 추방’은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난 존재’ 또는 ‘꿈을 실현해가는 존재’로의 비약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알에서 깨어 나와 이상향을 건설해야 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지요. 그러니 지난 에덴동산의 삶, 경험은 오늘 우리들의 현실을 이뤄가는 꿈이 되는 것이고,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현재는 나쁘고 과거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을 버려야 하고 과거를 붙들어야 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는 금령은 이간에게 그것을 따 먹을 수도 있다는 자유의식을 갖게 해주는 출발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 역사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로 지어졌다는 말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자유를 의식하는 순간 인간은 불안을 느끼죠. 바로 이불안이 인간을 위대하게도 비참하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불안을 벗어나 구원에 나아갈 수도 있고, 불안을 이기지 못해 죄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 이쯤에서 우리는 창세기의 몇 기록들을 통해 드러낸 하나님의 본심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으로 인간들을 걸려 넘어지게 해서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벽하게 단번에 지으시고, 현재의 삶을 통해 꿈을 이루어가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바랄 뿐 아니라 현재를 감동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심이고, 우리가 누리는 자유 성취의 기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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