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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을 통해 알아야 되는 것

창세기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146 추천 수 0 2013.01.17 2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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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2:1-3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2.2.7 설교 
야곱을 통해 알아야 되는 것  
창12:1-3

우리는 지난 3주간에 걸쳐 구약성서의 처음이었던 창조의 부분들을 보았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이나 신앙의 적용대신에 ‘오늘’ 이 시대에 맞는 이해는 어떤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보았던 것이 특별하면 특별하다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요약을 한다면, 우리가 믿고 우러르는 하나님은 ‘심판자’의 무서운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과, 인간의 타락이 영구불변한 부정성만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지요. 이 모든 것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더욱 충만하고 기름지게 하는 유기적인 사건들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게 옳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부터 창조의 부분을 넘어서서 인간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12장부터는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라기보다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그 참상을 겪고서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 첫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우리가 들어서 잘 아는 이야기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것을 ‘개인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해 드리고자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아브라함과 ‘나’를 동일시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고’ ‘나만 아브라함 같은 믿음을 가진’사람처럼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주의 신앙관의 시초입니다.

그럼 창세기 12장에서 등장하는 ‘뉴 맨’ 즉 새로운 사람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는 좀 더 큰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것은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비로소 믿을만하고 더불어 일할 만한 인물상을 찾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이 존경하고 본받을 그런 모범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성서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물상으로 우리 앞에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서가 제시하는 인물상, 다시 말해 이 땅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싶은’그런 인물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브라함으로부터 제시되기 시작한 그 궁금증의 출발은 야곱을 통해 잘 나타납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은 이스라엘이죠. 개인의 이름이 나라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위대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야곱은 그런 칭송을 받을 만큼, 한 개인의 이름이 나라의 이름이 될 만큼 큰일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서를 수 백 번을 읽는다 해도 그 어디서건 야곱의 어마어마한 행적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는 야심가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비한 인물입니다. 열등의식도 있습니다. 용감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야곱이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평가 되었을까요? 그는 우리 식대로 한다면 무도한 놈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런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앞의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이런 사태를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몇 주에 걸쳐 보았던 성서속의 하나님은 우리가 그동안 듣고 믿어왔던 교리적인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 계신 분이었습니다.

이 야곱의 이야기에서 다시 뒤로 넘어가 아브라함을 생각하겠습니다. 저들이 한 행동들은 생각지 마시고 단지 저들의 인물됨만을 생각해보세요. 아브라함과 야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두 사람 모두 ‘무모한 모험’에 도전하는 인물상이 아닙니까? 중간에 그들이 행했던 이런저런 일들 말고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기성의 것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좌충우돌하면서 그들은 창조적인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밀어 보이는 새로운 인물상입니다. 이것은 이미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서 예견된 것이기도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을 ‘타락과 원죄’라는 어두운 사슬로만 여기지 말자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을 역동적이게 하는 출발로 보자는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드린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야곱을 내밀어 보이는 까닭은 다른 게 아니고 이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처럼, 야곱처럼 해서 복을 많이 받자고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아브라함과 야곱 같은 그런, 창조적인 세계를 향해 용감하게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고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가는 그런 동업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제시하는 인물상, 즉 오늘 나의 됨됨이인 것입니다. 이런 자녀들로 오늘날 우리가 살 게 되길 바라신다는 말입니다. 이걸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두 종류의 사람을 마다합니다. 가능하면 고생 덜하고, 남보다 잘나고 많이 벌고 그래야 됩니다. 그러다보니 아브라함과 야곱을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교회는 성서에 등장하는 이런 인물들을 성공한 인물들, 성공을 뒷받침하는 인물들로만 제시를 합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그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그렇게 성공한 인생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격다짐으로 밀어 붙여 믿으려고 대듭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그들의 인생이 얼마나 험악했습니까? 그들이 복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현세의 복이라기보다는 내세나 후대의 복들이 아니었습니까? 이것이 성서가 제시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야곱과 아브라함을 통해 제시된 사람됨의 모습을 알 수 있겠죠?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지 알겠죠? 그럼 좀 더 자세하게 야곱의 삶에서 일어난 장면들을 읽어 봅시다.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 번째로 야곱은 ‘사랑을 위해 자기를 던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형을 피해 도망친 삼촌의 집에서 살았던 종살이 20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성서가 그토록 강조하는 ‘사랑하라’는 말은 ‘사랑을 위해 야곱처럼 자기를 던지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은 ‘사랑 때문에 울고 살고 죽는’것을 비웃습니다. 그런 순정과 순수함도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고 있는지는 우리가 다 아는바 입니다.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랑을 위해 자신을 던져라!’

두 번째로 야곱은 힘 대신 지혜와 부드러움을 쓰는 사람입니다. 창25:27-28은 명백하게 야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서는 남성성이 강하지만 야곱은 여성성의 사람입니다. 야곱의 일생에는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내들이 그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치마폭에 쌓인 허약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어머니다움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리는 것은 이런 모성성에 기인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창조해 가시는 하나님의 동업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야곱은 복을 ‘얻으려는’존재가 아니라 ‘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에게서 ‘복을 받아 챙기려’고 하지 말고 ‘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으로 살려는 의지를 배웠어야 했습니다. 야곱이 ‘복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것은 그가 이름을 잘 짓고 잘 바꾼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아담의 일(창2:19-20)이기도 했지요. 이름을 짓는 다는 것은 사물을 규정하는 행동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닥친 상황을 해석하는 마음입니다. 야곱은 ‘이름 짓기’를 통해 자신에게 닥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창35:18에 보면 야곱의 사랑하던 여인 라헬이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됩니다. 그러자 어미는 죽기 전에 그 아이의 이름을 ‘베니노/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어줍니다. 첫 아이는 하나 더 아이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던 요셉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내가 유언처럼 지어놓고 사라진 아이의 이름을 바꿉니다. 그게 베냐민입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을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바꾼 것입니다. 야곱의 이런 행동은 그저 아들의 이름을 잘 짓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규정하는 능력이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제시하는 인간상, 하나님이 이땅에 내려 보낸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면 모습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살면서 성취해야할 자아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이름 짓기는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보는 신앙의 행동이었습니다.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을 칩니다. 얼마나 곤하고 피로했겠어요. 그런 그가 꿈에서 천사를 만납니다. 이건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피곤하다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 야곱은 누구를 보는가하면 ‘하나님’을 보고 만납니다. 그래서 거길 ‘베델/하나님의 집/창28:17-19’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이 자기가 피곤해서 자다가 꿈을 꾼 곳이라는, 이 사고는 당시대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이해이며 해석인 것입니다. 오늘날을 사는 기독교인도 교회라는 건물을 벗어나서 이런 사고를 갖기가 쉽지 않은 때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완전히 그 틀과 울타리를 벗어나 하나님을 체험하는, 어디든지가 하나님의 정원 즉, 에덴동산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나 형에게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맨 뒤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어떤 분이 나타나 그를 밤새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분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야곱은 그 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엉덩이뼈까지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알 수 없는 존재와 씨름하던 야곱은 그로부터 ‘네가 하나님과 겨뤄 이겼다’는 말과 함께 이름을 야곱(속이다/ 발뒤꿈치를 잡다)에서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뤄 이기다)로 바꾸게 됩니다. 이번에는 천사가 그의 이름을 바꿔 준 것입니다. 여기가 야곱의 삶의 하이라이트가 아닙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 야곱은 밤 새 씨름한 그 장소를 뭐라고 이름 짓습니까? 창 32:30에 보니까 ‘브니엘/하나님과 싸워 이기다’라고 짓습니다.

야곱은 실로 험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 인생 가운데서도 그는 베냐민-베델-브니엘-이스라엘 같은 이름을 지어내며 절망 가운데 복을 만들어가며 살았습니다. 야곱을 보면 하나님이 복을 거저 주는 게 아니라 사람이 친히 복을 만들어 쟁취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의 사람으로부터 오늘날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제시하는 인간상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욱 더 창조적으로 복된 삶을 위해, 복을 쟁취하기 위해 움직이고 판단하고 해석하고 고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게 성서가 제시하는, 야곱을 통해 보이는 인간상입니다. 이것이 성암교회가 다른 교회와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다른 교회는 이렁저렁 복을 거저 주지마는, 되로 하고 말로 받지만은, 우리는 거저 얻는 복이란 없으니 치열하게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씨름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을 통해 ‘이걸’ 알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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